농활, 복거일, 자유...

잡록 2003. 7. 21. 01:33 |
얼마 전 기사에 성균관대 총학에서 농활을 운동권의 유물이라며 지원을 거부해서 논란이 되었다고 한다. 뭐 나는 농활을 안 가봐서 농활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모르겠다. 만약 농활이 단순한 봉사활동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면야 나도 그리 호의적이지만은 않을 것 같다.


뭐 그렇지만 이번 사태는 성대 총학의 오바인 것 같다. 실상 오늘날의 농활은 가는 사람만 간다. 거기서 무슨 의식화를 기대할 것도 없으며, 운동권의 외연을 넓히는 자리가 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지레 겁을 먹고 있다는 조바심의 발로일 뿐이다.


‘농민학생연대활동’이라는 거창한 이름이야 둘째치고, 농번기 때 농민들의 일손을 돕는다는 것은 소중한 경험이라는 생각이 든다. 봉사도 하고 경험도 하겠다는데 입맛에 좀 안 맞다고 일체의 협력을 거부하는 것은 어떤 흐름의 자치활동이라도 육성할 최소한의 의무를 망각한 처사다.


다만 성대 총학이 농활 대신 다른 봉사활동을 추진하겠다며 비난의 화살을 돌리려고 하는 것 같던데 그 점은 다행스럽다. 요즘 농활 같은 전통 있는 봉사활동 말고도 각종 봉사활동들이 개발되고 있다고 한다. 그건 일단 좋은 흐름이다. 봉사활동에도 우열이 있다고 따지고 들면 할 말이 없지만...


농활에 대한 생각을 잠깐 해보면서 문득 지난 어느 강의가 생각났다. 지난 겨울 복거일의 강의를 한 번 접할 수 있었다. 작년 2학기 교양국어 시간에 복거일의 영어공용화론을 주제로 발표하며 친일파의 논리라며 게거품을 물었던 기억이 있던 터라 조금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심약한 익구, 단호한 모습은 어디로 가고 나름대로 재치 있던 그의 강의에 빠져들었다. 결국은 농산물 시장 개방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논거들이 제법 탄탄했던 걸로 기억한다. 막연한 선입관을 부수는 것만으로도 자기 주장의 설득력을 충분히 얻을 수 있다는 좋은 교훈이기도 했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식량안보론’을 비판하는 구절이 특히 마음에 와닿았다. 아마 이건 두고두고 써먹을만한 가치가 있겠다는 고약한 심보가 발동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요약을 해보려고 했으나 그냥 그대로 인용한다. 타이핑하느라 고생한 손가락에 고마움을 표하며...^^


농업에 관한 ‘신화’들 가운데 가장 널리 퍼진 것은 “식량이 무기로 쓰일 수 있으므로, 사회 안보를 위해서라도 농업 기반은 보전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먹는 식량에 관한 것이라, 이런 ‘식량무기론’은 강력한 호소력을 지녔다.


그럴 듯한 주장이지만, 그러나 ‘식량무기론’은 근거가 허술하다. 식량이 무기로 쓰일 수 없는 까닭들 가운데 먼저 들어야 할 것은 세계의 농업 시장은 일반적으로 ‘구매자 시장’이라는 사실이다. 농업의 생산성이 빠르게 높아진 현대에서 주요 농업국들의 만성적 문제는 과잉 생산이다. 농업의 생산성이 아주 낮은 우리나라에서도 농사에 관련된 파동은 늘 과잉 생산이었다. 그래서 주요 농업국들은 늘 안정된 해외 시장을 찾는다. 자연히, 식량이 무기로 쓰이는 일이 일어나면, 먼저 그리고 훨씬 큰 손해를 보는 것은 식량을 많이 생산하는 나라들이다. 그런 나라들로부터 농업 시장을 열라고 거센 압력을 받는 우리가 그들이 언젠가는 식량을 무기로 쓸 가능성을 걱정하는 것은 한가롭고, 그런 한가로운 걱정 때문에 미리 소중한 자원을 낭비하는 것은 어리석다.


다음엔, 농업은 공업보다 기반을 복구하기가 훨씬 쉽고 간단하다. 콘크리트나 아스팔트로 덮이지 않는 한, 버려진 논밭은 한두 해 안에 아쉬운 대로 복구되어 다시 경작에 쓰일 수 있다. 실은 휴경(休耕)은 농약에 찌들고 화학 비료가 스며든 땅을 정화하고 지력을 높인다. 씨앗이나 생산 기술도 그리 어렵지 않게 보존될 수 있다. 그런 상태에서 어떤 나라가 식량을 무기로 쓰려고 할 것인가?


셋째, 어떤 나라나 나라들이 식량을 무기로 쓰려면, 그들이 농산물 시장에서 적어도 과점적 지위를 지녀야 한다. 현재 그런 지위를 가진 나라는 없다. 어떤 농산물을 수출하는 나라들이 연합할 수도 있다. 실제로 커피처럼 생산국들이 한정되었고 가격등락이 심한 품목들에선 카르텔을 결성하려는 시도가 나왔다. 그러나 그런 시도는 결국 실패했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그런 카르텔은 과점적 이익을 겨냥했지 식량을 무기로 쓰려 한 것은 아니다.


넷째, 식량을 무기로 삼는 일은 너무 비윤리적이어서 그럴 가능성을 크게 줄인다. 더구나 지금 식량을 수출하는 나라들은, 미국을 비롯해서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칠레, 네덜란드, 덴마크 등, 대부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녔고 사회가 안정되었다. 그런 나라들에서 식량을 무기로 삼은 정권이 안팎의 비난을 받고서도 살아 남기는 어렵다.


석유는 쌀보다 산업적으로 훨씬 중요하고 우리는 전혀 생산하지 못한다. 게다가 ‘석유수출국기구(OPEC)'라는 카르텔이 석유를 실제로 무기로 삼았고, 세계는 큰 불경기를 맞았었다. 우리도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도 지금 우리는 석유가 다시 무기로 쓰일 상황을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OPEC을 움직이는 나라들이 중동의 회교 국가들이어서,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사이의 분쟁과 미국과 이라크 사이의 전쟁은 당장 석유 공급에 영향을 미칠 터이지만, 지금 석유 문제를 걱정하는 사람은 드물다. 어째서 그런 ’준비 없음‘이 큰일이 아닌가?


물론 식량과 관련된 위기가 올 가능성은 작지 않다. 어떤 농산물의 수출국들이 연합하여 과점적 이익을 누리는 경우를 상정할 수도 있고, 기후가 갑자기 바뀌거나 무슨 병충해가 심각해져서 세계적으로 식량이 크게 모자라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들은 ‘식량을 무기로 삼는다’는 얘기에서 무기라는 말이 뜻하는 것은 아니다. 실은 ‘식량 무기론’은 논의의 초점을 잘못 맞추어서 그런 재난으로 농업 생산이 급격히 줄어들 가능성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방해한다.

- 복거일, [농업과 농민에 관한 선입관]中



길게 인용한 복거일도 무작정 개방만세만을 외친 것은 아니다. 경쟁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쌀 농사에 포격을 집중했다. 채소 같은 경우에는 신선한 것이 낫기에 국내에서 여전히 생산될 것이라며 나름대로의 아량(?)을 베풀어 보이기도 했다.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무역상무론 교수님께서 지난 학기 강의 중에 쌀을 100% 수입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을 내셨다. 평소 후덕함을 존경해마지 않던 터라 저 해맑은 표정에서 나온 격한 발언에 놀라웠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하니 그만큼 우리 농업, 특히 쌀 농사의 경쟁력이 형편없다는 절박한 상황의 방증이기도 한 것 같다.


아직 아는 바가 그리 많지 않아서 함부로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적어도 식량안보론만을 외치며 농산물 개방에 반대하는 것은 논거가 빈약하다는 것을 깨우칠 수 있었다. 물론 그래도 영 꺼림칙한 것은 사실이다. 도서관에서 아무리 손쉽게 빌릴 수 있는 책이라도 내 방안의 책꽂이에 꽂힌 책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심리적 차이감 내지는 불안감이라면야 오죽 좋겠냐만은.


진중권은 복거일을 보고 자유주의에 극단으로 흘러 천박해진 인물이라고 평한다. 나 또한 복거일의 문제의식에 때때로 공감하면서도, 그 숱한 자유 중에서 ‘영업의 자유’만을 사랑하며 재벌의 이익 옹호에만 열심인 ‘자칭 자유주의자’들과 통한다는 것이 영 찜찜하다. 아무쪼록 대학을 주식회사로 만들자는 쇼킹한 발언들을 ‘유연한 과학’이라고 칭하는 자화자찬을 하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다. 뭐든지 지나치면 ‘경직된 미신’이 되는 법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으시지 않는가.


파격적인 발언들을 많이 쏟아내다 보니 여기저기 공격도 많이 들어오나 보다. 뭐 열심히 발언하는 자는 종종 비판을 넘어선 비난을 접하기도 한다.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아 보인다는 점에서 복거일은 꽤 격이 높은 논객으로 보인다. 허나 “내게 도끼 들고 찾아온다는 사람까지 있었다‘라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하는 것은 마냥 편하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직도 국가폭력의 상흔에 시달리는 이들이 하고 많은데 그런 엄살은 고품격 논객으로서는 지나친 너스레다.


비록 자유지상주의자의 모습이 너무 강해 거북스러울망정 복거일은 내게는 아직 큰 존재다. 그의 헛소리를 매섭게 비판할 머리를 가지기 위해 안간힘을 써보겠지만, 자유가 철철 흘러 넘쳐 역겨움이 치솟는 그의 발언도 기꺼이 인정해야 하는 것이 나의 기본적인 책무다. 발언할 자유, 비판할 자유... 이 기본적인 것이 제대로 보장 안 된다는 것이 현실이다만... 자유주의자도 적어도 자유의 문제에서만큼은 과감할 줄 알아야 하는데 여전히 멈칫거린다. 6(^.^)9 (2003/06/26)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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