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학기에 효순이, 미선이 1주기 기념을 위한 6.13 위원회에 대한 유인물을 받았다. 마침 날도 더운지라 부채 삼아 부치다가 문득 한 마디를 내뱉었다.


“참 그러고 보면 무슨 무슨 위원회도 참 많이 만들어지는구만...”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친구가 한 마디 한다.


“그게 다 반장 콤플렉스 때문이지.”


한바탕 키득거리다가 스스로를 돌아보기로 했다. 한국 사람들이 유난히 감투 밝힌다고 하는데 나도 그리 자유롭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워낙 모범생적 답답함과 완고함의 이미지가 주로 각인되어서 친구들의 인기를 별로 못 얻어서인지 학창시절 통틀어 반장 해본 기억이 별로 없다. 물론 안 한 것만 못한 부반장 시리즈들은 제법 해봤지만 말이다.


뭐 친구가 말한 반장 콤플렉스는 크게 두 가지 측면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반장을 많이 해봐서 반장을 해먹는 것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진 부류와 다른 하나는 반장을 하도 못해봐서 한이 맺힌 부류가 그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나는 후자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한이 맺힌 것은 아니니 콤플렉스 딱지 붙이기는 좀 과분한 것 같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바로 ‘2인자 콤플렉스’다. 별 좋지도 않은 거 만들어서 무안하기는 하다만... 따져보니 직선대표에는 그다지 호감이 가지 않는다. 일단 필수불가결한 표를 위한 아첨이 영 서툴다. 게다가 지금 내 모습은 대중성 확보하기가 힘들게 되어 있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그 반작용에서였는지 간선대표에 대한 욕망은 보통 이상인 것 같다. 이거 참 호가호위(狐假虎威)를 꿈꾸고 있는 게 아닌가.^^;


대중성의 확보를 위해 노력을 게을리 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자유주의자의 정체성을 위해 내 개성의 수호에 힘쓰는 방향으로 전환을 계획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외교정책은 ‘비굴모드’를 바탕에 깔고 있으며 “놀아줘~”를 외칠 준비가 되어있다. 이것은 나의 부족함에 대한 자각이기 때문에 그다지 부끄럽지는 않지만 너무 내 것을 포기하지는 말아야겠다. 내 것과 타인의 것이 공존하며 교류하는 것을 원하지 어느 한 쪽의 소멸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관계다.


아무리 아웃사이더가 존중받고 비주류가 평등한 대우를 받는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소수파에 서기란 일단 두려움이 앞선다. 하물며 이 땅의 현실은 두려움에다가 실질적 손해에 대한 손익계산서까지 첨부해주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인지 쥐꼬리만한 권력이나마 부여잡아 조금은 편하게 개성 타령하고, 자유주의 들먹거리며, 대중성 추구하려는 심산이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2인자 콤플렉스라고 하니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짐작하다시피 김종필이다. 때마침 오마이뉴스에 인터뷰기사가 실렸다. 그냥 노회한 정치인의 면상이나 좀 째려보고 말라고 했건만, 우연히 들어온 한 질문이 눈에 코옥 박혔다.


흔히 'JP는 영원한 2인자'라고 말하는데, 본인 스스로 생각하는 '정치인 김종필'은 어떤 사람인가.

- "(사람들이 나를 '영원한 2인자'라고) 그렇게 얘기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선두에 서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늘 뒤에서 선두에 선 사람 도왔다. 그러면서 선두에 선 사람 못지 않게 보람을 느껴왔다. 내가 골프를 좋아하는데 '티샷'보다 '세컨드 샷'이 잘 나간다고 '골프도 2인자'라고 하는 사람이 있지만…(하하). 지금도 그렇게 살아왔지만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이야~ 뒤에서 묵묵히 퍼스트 리더를 돕는 세컨드 리더가 되겠다는 저 답변에 감동 먹었다. 김종필의 인생역정으로 볼 때 저 말의 진정성이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무시할 것도 없다. 물론 그가 주인을 바꿔가며 연명한 데다가 무척 의심스러운 주인을 모시기도 했다는 점에서 대개의 사람들이 남을 부려먹지 못해 안달이지만, 그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는 것은 잘 모른다. 저마다 대장 하겠다고 설치지만 부하 하겠다고 손드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는 부리고 섬기는 상하관계가 수평적이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것이다.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주종관계식이다보니 섬기는 위치보다는 부리는 위치에 서고 싶은 유인이 크게 발생하는 것이다. 왕 아니면 노예라는 흑백의 세상에서는 나라도 왕을 하려고 달려들 것이다. 좀 더 평등한 상하관계가 구축된다면 굳이 부리는 위치에 목매달지도 않을 것이며, 섬기는 위치가 마냥 싫지만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 누군가의 위에 올라서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다. 인격적 미숙함이나 학문적 조악함을 조금씩 메워 나가는 것이 지금 단계에서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2인자 콤플렉스도 좋지만 너무 남들 보이기 민망한 감도 없잖아 있다.^^; 반장 콤플렉스라도 좀 수입해야할 판이다. 2인자 콤플렉스는 너무 쩨쩨해 보이지 않는가.^^


안 그래도 한 친구 녀석이 내가 JP를 닮았다고 성화인데, 그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김종필이 그 무지막지한 보수성과 어울리지 않게 꽤나 낭만적인 구석도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김종필은 아니다. 어차피 눈치가 떨어지는 나는 김종필 만한 2인자가 될 것 같지는 않다. 뭐 좀 침이야 흘리겠지만, 그 점에 있어서는 다행이다. 6(^.^)9


추신 - 이 글을 다 쓰고 나서 "남을 따르는 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발견했다. 역시 내가 하는 말들, 내가 하는 생각들... 죄다 예전에 한 번씩 나왔고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다. 그래도 발언하기를 게을리하지 말자.^^
(2003/06/26)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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