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사랑에 대한 고백

잡록 2003. 7. 21. 01:40 |
나른한 일요일 오후를 때워볼 속셈으로 수유역 근처의 헌책방을 찾아 가봤다. 뭐 딱히 작정을 하고 간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둘러보며 손이 까맣게 되도록 고르고 골라 책 몇 권을 사들고 왔다. 세월의 무게였을까, 이래저래 먼지 투성이에 누렇게 빛바랜 책들을 그냥 두기 아쉬워 겉표지의 때를 한 번 벗겨본다. 바랜 책장이야 그저 먼지 한 번 쓰윽 닦는 것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었지만.


사실 나는 책을 읽는 것만큼이나 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것을 좋아한다. 가끔은 어느 것이 더 좋은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다. 서점을 활보하며 읽은 몇 구절이 절실했을 때도 많았다. 나올 시간을 정하고 나서야 서점에 들어서지만 지금까지 제 시간에 나온 적이 거의 드물다. 꼭 책장 몇 장 더 넘기다가, 책 몇 권 더 꺼내보다가 이런저런 약속도 늦고, 함께 온 사람 기다리게 하기 일쑤다. 어쨌든 이렇게 자기와의 약속 늘상 어겨가며 이래저래 주섬주섬 사 모은 책들을 책꽂이 앞에서 어디 꽂아둘까 궁리하는 재미는 아는 사람만이 아는 뿌듯함이다. 그래서인지 충동구매를 의식적으로 행한다. 이 정도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이려나?^^;


지금 남들 다 하는 공부를 따라가기도 벅찰 판에 한가롭게 이런저런 책들 속에 파묻혀서 신선놀음 할 처지냐는 자괴감이 분명 있다. 필요한 책만 골라서 읽는 것도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대단한 능력일 것이다. 물론 모든 독서라는 것이 그렇게 일정한 목표를 이루는 징검다리 역할이면 충분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독서가 그렇게 단지 수단이라면 궁극의 목적지까지 다다르는 도정의 괴로움을 어떻게 다 견뎌내라는 것인지 항변하고 싶다.


등산을 즐기는 사람이 오로지 정상에 오르는 희열만을 위해서 산을 오르내리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올라가는 걸음의 즐거움, 내려오는 걸음의 가뿐함도 함께 느끼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칸트의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정언명령을 조금 바꿔서 ‘독서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고 말하고 싶다. 설령 어떠한 목표점이 존재하는 과정에 어느 책이 놓여있더라도 그 책을 집어들고 있는 순간만큼은 그 독서 자체의 즐거움 속에 빠져들 수 있는 외도(?)를 감행해야 한다. 그래야만 독서가 좀 더 재미난 것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어쩌면 과거의 악몽에 아직 헤어나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시절 교과서 이외의 독서도 신분에 걸맞지 않는 행동으로 취급된다. 교과서 이외의 독서는 한낱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이런 책을 읽는 동안 다른 누군가가 교과서를 파고들어 나보다 한 문제를 더 맞추지 않을까’ 하는 강박관념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상당수 고3 수험생들이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고, 앞으로도 겪게 될 것 같은 이 강박관념은 우리의 독서 풍토를 사막화시키는 주범이다. ‘독서를 하지 않으면 지적 성장이 퇴보하지는 않을까’ 하는 독서를 안 하는 데서 오는 강박관념보다 이처럼 고3 수험생들이 공유하는 (교과서 외의) 독서를 “하는” 데서 오는 강박관념의 해악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세상 모든 지식의 기초는 기본적으로 암기라는 푸념으로 위안을 하며 그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학은 책을 읽기 좋은 환경이니 책을 많이 읽도록 합시다’라고 설파하는 것은 참으로 야만스러운 짓이다. 대학에서는 마음껏 독서하라고 외쳐봐도 한 번 떠난 마음이 쉽사리 돌아오기란 영 쉽지 않다. 비단 고3 만이 아닌 그 이전까지 포함해 중, 고등학교 시절을 죄다 ‘독서는 사치’라는 인식풍토 속에서 보내다가 이제는 사치품이 아닌 필수품이라는 이 놀라운 경제학적 전이(?)에 놀라울 따름이다. 물론 필수품이 되어 좀 더 대중화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독서는 누구에게나 그리고 어느 때나 필요하지만, 청년 학생기에 있어서는 가장 필요하다. 말할 것도 없이 학생의 본분은 공부하는 것, 즉 모르는 것을 배워 익히는 것이므로, 이 때문에 학교에 다니는 것이지만, 현대의 교육제도는 종합적이 되지 못하고 교수의 가르치는 방법도 불완전하다. 전공 학과에 관해서만 가르칠 뿐이고, 전공 외의 것에는 일체로 언급하기를 싫어하며, 또 그 전공 학과일지라도 부분적으로는 지극히 상세하지만 근본에 들어가서는 조금도 손을 대려고 하지 않는다. 때문에 현대 교육의 이런 결함을 보충하고, 다시 더 알고 배우기 위하여 독서가 중요한 의의를 갖게 되는 것이다. (조용만, [학생과 독서] 中)
- 안춘근, [독서의 지식], 범우사, 44~45쪽에서 재인용


물론 일리가 있는 말이다. 우리가 교육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한계가 있다. 전공에만 파고들어 테크니션으로 전락하기보다는 다방면의 교양을 쌓아 좀 더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학문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독서의 가치를 새삼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이미 중고등학교를 거치며 독서를 외면하게 되어버린 많은 이들이 이제 와서 다시 독서의 즐거움에 풍덩 몸을 던지라는 속삭임이 우습다는 것은 솔직한 심정이다. 독서를 멀리 만드는 대학 이전의 교육 풍토를 시급해 개선해야 할 것이다. 시험을 위해서만 독서를 한 인생에게 ‘밑천이 달린다’는 위기감을 선사(?)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책을 읽다보면 어디까지가 내 생각이고 어디서부터가 남의 생각인가 혼미할 때가 종종 있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이 책 속에 녹아 있는 것을 보고 선수(?) 당했다고 아쉬워할 때가 있다. 실상 내 고유한 생각이라고 자부하던 것들이 결국은 누군가가 했던 이야기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자꾸 반복되다보면 책에서 읽었다는 기억은 제거해버리고 이 생각은 나의 것이라는 상도덕에 어긋나는 일을 저지르게 되고 만다. 고종석의 이 말에 내가 얼마나 무릎을 쳤던가.


내 표절의 역사에서 정녕, 놀라운 것은, 내가 남의 글들을 여기저기서 훔쳐 내 이름으로 발표한 글을 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읽노라면, 그것들을 표절한 기억들은 가물가물 사라지고 그 글이 온전히 내 독창적인 생각인 듯한 착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 내가 그때 이미 이런 대단한 생각을 했구나”하며 후안무치한 자족감에 빠진다는 것이다.
- 고종석, [서얼단상], 개마고원, 266쪽


허영의 독서도 분명 있었을 것이고, 불필요한 금전적 낭비도 따지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책장을 넘기며 그 책들만큼 아름다운 마음들과 대화를 한 것이 행운이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至樂은 莫如讀書(지극한 즐거움은 책 읽는 것 이상이 없다)는 이제 옛사람의 감상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지식의 광산을 캐는 연장에 책만 있다고 주장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을 사랑한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책 사랑에 대한 고백은 아무리 해도 모자란 그 무엇이다. 6(^.^)9 (2003/07/07)
Posted by 익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