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새내기 시절 교양국어 시간에 냈던 수시과제물을 조금 다듬어서 올린다)

[빌린 것은 깨끗이 쓰자]


  지구를 귀중히 다루어라. 지구는 부모가 당신에게 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들의 어린이에게서 빌린 것이다. - 케냐의 속담


  환경오염이 위험수준에 달했다는 이야기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제 하도 많이 듣다보니 어느 정도 면역이 되었는지 웬만한 사태가 벌어지지 않고는 관심조차 가지지 않게 된다. 얼마전 ‘생태맹(ecological illiteracy)’이라는 개념을 듣고 무릎을 쳤다. 생태맹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신비함과 풍성함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뜻한다.


  전영우 국민대 교수(산림자원학과)는 “천부적으로 물려받은,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우리의 정신적 능력이나 우리 자신이 자연과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는 감성이 결여된 상태가 바로 생태맹”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면서 우리의 사고와 의식으로부터 자연이 사라지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올 여름(2002년) 최악의 수해피해를 낸 태풍 루사가 난개발과 부실관리 등 환경파괴가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자연의 정복자인 인간이 벌이고 있는 과학 문명의 잔치 마당에서 지금 자연이 인간에게 반격의 포문을 열기 시작한 것인가? 우리가 정복한 자연이 이제 우리를 불안과 공포 속에서 몰아넣고 있다. 과학 문명은 인간을 물질적 빈곤, 추위와 더위, 질병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오늘날 첨단 과학 기술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희망까지를 우리에게 안겨주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인간의 물질적 소유욕과 그러한 인구 증가가 무한한 데 반해, 자연이 제공하는 자원은 물론 지구의 물리적 공간에는 한계가 있다. 골프를 하고 싶은 인간의 욕구가 산을 깎지만, 지구상에 산은 그렇게 남아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과학 기술의 위대한 공적과 문명의 진보를 규탄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과학 기술의 한계와 진보의 의미에 대한 재해석과 문명의 새로운 모델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인간은 지구의 살인범으로, 자연과 더불어 화석의 운명을 맞게 될 것이다. 사고 양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가치관과 세계관의 지각 변동과 같은 혁명이 절실하다.
- 박이문, [과학 문명과 자연의 반격]中



  이제 ‘지속 가능한 개발’은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의 대상이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속 가능한 발전 문제의 현실적 심각성을 잘 인식하지 못한 가운데 막연한 일로 여김으로써 실천적 논의가 미흡한 것 같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볼 때, 이 패러다임은 이미 유토피아적 논의를 넘어 21세기 지구 공동체의 최대 실천과제로 확산되고 있다. 유엔과 유럽연합은 물론이거니와 많은 나라에서 미래 건설의 기본 틀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한 무역규제와 보조금 삭감 등 실질적인 행동계획이 점차 강화되는 추세임을 볼 때, 지속 가능 발전 문제에 대한 국민적 인식을 높이고 착실히 대처하는 노력이 긴요하다 할 것이다.


  이 개념은 “경제가 희생되더라도 환경을 보전해야 한다”는 환경 지상주의적 이상론이 아니다. 지속 가능 발전 패러다임은 결코 경제성장을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며 경제, 환경, 사회의 동시적 균형발전을 추구하고, 이를 통하여 후손들에게 깨끗한 환경을 물려주자는 개념이다. 지나친 환경주의로 경제가 손상된다면 그것은 지속 가능할 수가 없다. 나아가 막대한 투자를 필요로 하는 환경보전과 사회발전도 불가능해진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겠다.
  

  우리나라는 에너지, 식량, 물 등 기초자원이 제약된 자원부족 국가이며 세계적인 인구조밀 국가다. 국토가 좁아 환경오염이 발생했을 때 자연정화 능력이 극히 제약된다. 이는, 우리에게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해야 필요성이 그 누구보다도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부터라도 지속 가능한 발전에 관한 실천적 인식을 확산하고 관련 정책을 발굴하여, 우리 경제,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착실히 높여 나가야 하겠다.


  비록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화두에는 조금 빗겨서 있어 보이지만, 1854년 미국대통령에 의해 파견된 백인 대표자들이 땅을 팔 것을 제안한 것에 대한 미국 서부지역에 거주하던 인디언의 추장 시애틀의 답 글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그는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는가?”라고 했지만, 오늘날에는 마실 물을 사먹는 것이 일상적이고 공기까지도 돈을 내고 즐겨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또한 “물결의 속삭임은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가 내는 목소리이다. 강은 우리의 형제이고 우리의 갈증을 풀어준다.”라고 했지만, 우리는 강의 오염을 걱정하는 척하면서도 쓰레기를 던져대기를 그치질 않는다. 오죽했으면 그가 문명인들에게 이런 경고까지 내리게 한다.“계속해서 그대들의 잠자리를 더럽힌다면 어느 날 밤 그대들은 쓰레기 더미 속에서 숨이 막혀 죽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야만인이라고 칭했지만, 도시적 안락함에 자연과의 교감을 내팽개친 우리는 얼마나 야만인의 혐의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요즘 사람들에게 가장 강력한 논거를 제공한다는 ‘경제논리’를 이용해서 환경보호의 의미를 설명해야겠다. 회계에서 가장 처음으로 나오는 회계방정식이 ‘자산 = 부채 + 자본’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연을 자본금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원래 자기의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걸 잘 굴려서 이익을 남겨 먹을까를 궁리한다. 그러나 위에서 인용한 케냐의 속담이 잘 말해주듯이 자연은 엄연히 우리의 부채이다. 우리의 후손들이 등장하면 고스란히 물려주어야 할 빚이란 말이다. (사실 인간세상에서 엄밀히 자본이라고 칠 만한 것이 자기 몸뚱이 빼고 뭐가 있을까 생각된다. ‘차마설’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세상 모든 재화는 결국 빌린 것일 따름이다.)


  이자는 쳐서 주지 못할망정 원금마저 깎아먹는다면 정말 상도덕(?)에 어긋나는 처사일 것이다. 상도덕도 지키지 못하면서 경제적 이윤을 얻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다면 후안무치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마저도 먹히지 않는다면 자연을 더럽히는 일이 결국에 손해보는 장사가 된다는 점을 각인시키는 전략을 쓰자. 시애틀 추장이 그 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었다. 6(^.^)9


  땅 위에 닥친 일은 그 땅의 아들들에게도 닥칠 것이니, 그들이 땅에다 침을 뱉으면 그것은 곧 자신에게 침을 뱉는 것과 같다. 땅이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땅에 속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만물은 마치 한 가족을 맺어주는 피와도 같이 맺어져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은 생명의 그물을 짜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그물의 한 가닥에 불과하다. 그가 그 물에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은 곧 자신에게 하는 짓이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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