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빌린 것은 깨끗이 쓰자]와 마찬가지로 교양국어 과제물을 조금 다듬어 올린다.
아래 [빌린...]이 환경에 대한 원론적인 입장을 표명했다면
이것은 그것에서 좀 더 나아간 세부적인 입장 표명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무분별한 녹색바람을 경계한다]


   인도의 종교 중에 자이나교가 있다. 자이나교는 엄격한 계율로 말미암아 대중성을 잃고 신도가 적게 되었다고 배웠다. 자이나교 신도들의 유명한 행동이 바로 땅위의 개미라도 밟을까봐 조심조심 걷는 행동이다. 비살생의 도리를 다하는 그들의 노력이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작은 세를 유지하는 것도 어쩌면 스스로 자초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원광스님이 왜 세속오계를 만들어야 했던가? ‘불살생’인 불교의 교리를 몰랐을 리 만무한데, ‘살생유택’이라는 파계(?)를 감행해야 했던가. 이는 하루가 멀다하고 전쟁에 시달리는 민중들을 위한 배려였으며, 스스로 낮춤이었다. 환경보호에 대한 문제에서 이 둘의 대처방안이 어떤 시사점을 주는 듯하다.


   고3 때 입시를 위한 면접을 준비하면서 중요한 시사 상식으로 배웠던 ‘가이아 이론’이 떠오른다. 가이아 이론은 지구를 대기, 해양, 지표의 바위 등 환경계와 인간을 포함한 생물계로 이뤄진 하나의 유기체로 간주한다. 연일 환경오염에 대한 기사들을 접하는 나로서는 가이아 이론은 우리가 앞으로 가져야 할 삶의 양식이라며, 역시 진리는 소박한 것이라며 칭찬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이 이론이 뜨게 된 이유는 인간이 지구를 남용함으로써 유기체 전체를 위태롭게 한다는 메시지 때문일 것이다. 지구와 인간은 하나의 유기체라는 매혹적인 이론은 환경오염에 고민하던 많은 이들의 가슴을 환하게 해주었을 것이다.


   우리 주위의 많은 환경주의자들은 환경운동을 “모든 생명체는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운동”이라고 보고, 그 안의 인간을 “욕망을 가진 동물이다”라고 규정한다는 점에서 가이아 이론과 관련성을 갖는다. 이들은 덧붙여 “산업혁명이 환경파괴의 출발이었다”라며 과학문명을 비판한다.


   똑같은 사안을 놓고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세상살이의 묘미와 불행이 다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산업혁명이야말로 폭발적으로 증가한 인구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한 출발점이었다고 생각한다. 과학의 발전이 아니었다면 지구는 인간의 생존을 위한 투쟁의 결과 폐허로 변했지 않을까? (공산주의 실험을 볼 때 인간은 생각보다 더 이기적이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객관성과 합리성 등을 생명으로 하는 과학의 최대한 활용만이 환경문제를 줄이고, 발견하고, 해결할 방법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가이아 이론은 지구를 살리기 위한 어떤 실질적 처방도 내리지 않은 채 인간에게 행동 하나하나에 대한 죄의식과  죄 값만을 강요한다. 자이나교 신도들이 “너희들은 하찮은 미물의 생명을 등한시하는 못된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며 도덕적 우월감을 가졌을 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우월감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설법의 호소력은 내려갔으리라.


   “아류 생태주의는 몸에 해로운 만병통치의 비책을 찾으려 한다. 그들은 먼 과거의 신화적 정신성에 의지하던 직관주의를 찬양한다. 그것은 인간 이성을 부정하고 범신론적 ‘우주적 자궁’에 스스로 파묻혀 몽롱해진 결과가 아닐까?”
- 머레이 북친, [휴머니즘의 옹호], 18쪽 발췌



   이제 환경보호에 대한 화두를 반대하는 이는 거의 없게 되었다. 다만 환경에 거스르지 않는 개발이 어느 정도일 것인가는 논의하는 수준이지 환경보호를 부정하기는 힘든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된 것은 환경 운동을 하시는 분들의 노고가 무척 크다. 그들이 환경오염의 경각심을 일깨우고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행동으로 말미암아 환경의 훼손을 막아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정말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일부 환경주의자들에게서 보이는 모성적 자연에 대한 신앙, 다시 말해서 환경은 인간이 범할 수 없는, 인간의 가치에 의해 결정될 수 없는 ‘본질적 가치’를 지녔다는 믿음에는 고개가 저어진다. 자연을 그렇게 신격화 시켜놓고 우리 모두를 원죄의식에 시달리게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인간이라는 게 그렇게 완전치 못한 동물이라 자꾸 구박만 하면 오히려 더 안 하게 된다. (공부하라는 잔소리 들으면 더 공부하기 싫어진다고 하지 않는가) 요즘에는 환경보호의 강력한 논거로 이걸 보호하면 경제적 효용이 더 높다거나 하는 것을 드는 경우가 많다. 무척 잘하는 일이다. 환경 운동가들은 시민을 자꾸 환경파괴범으로 만들 것이 아니라, 당근을 보고 좇아가도록 해야 한다. 조금 구차해 보이지만, 뭔가를 지키거나 뭔가를 바꾼다는 것이 그저 고고한 자세만으로 되지 않지 않던가.


   변기 물 내리는 것을 절약하기 위해 변기 탱크에 벽돌이나, 패트병을 넣어야 한다고 한창 유행이던 적이 있었다. 마치 그것을 안 하면 물낭비의 원흉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요즘에는 대변과 소변을 구분해서 물의 양을 조절하는 시스템이 있다고 한다. 소변을 볼 일이 많으니, 이런 식으로 사용하다보면 물이 절약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괜히 변기 탱크에 팔 걷어붙이고 벽돌이니, 패트병이니 넣고 환경보호에 뿌듯해 하는 모습보다는 더욱 편안하게 환경보호를 하는 것 아닐까? (조금 지저분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벽돌이나 패트병을 넣어두면 대변 볼 때는 물이 적게 내려가서 가끔 막히거나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럼 휴지를 적게 쓰면 되지 않느냐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자꾸 이런 이야기만 하니 내가 무슨 환경방임주의자(?)가 되어버린 듯 하다. 나 또한 환경보호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우리 국민들이 환경을 생각하는 마음이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환경보호가 상식으로 체화된 사회 분위기를 위해서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한다. 그 다음에 방법론의 차이에 대해서 논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인간을 ‘자연계에 붙은 암세포’ 정도로 규정하는 일부의 인식은 너무나 反휴머니즘적이다고 지적하고 싶다. 비록 내가 ‘인간중심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을지라도 인간마저 휩쓸어 버리는 녹색바람(?)에는 비판을 가할 것이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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