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향한 릴레이

잡록 2003. 8. 13. 09:11 |
[행복을 향한 릴레이] - 서울외국어고등학교 교지 날애 기고문

  나는 잦은 우수(憂愁)의 유혹을 느낀다. 그럴 때면 내 불행을 지적인 방황으로 억지로 승화시켜 자기 합리화에 급급했다. 하지만 진정 지혜로운 이라면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할 것이고 자기 나름의 행복의 철학을 가지려 할 것이다. 행복의 물음은 절실한 실존의 물음이다. 젊은 날의 키에르케고르는 젊은 날 자신이 목숨을 바칠만한 가치 있는 것을 찾지 못하여 한탄했다고 한다. 나는 조금만 탄식하고 행복이라는 가치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행복해지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어떻게 하면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인가?'
행복을 정의하는 데 어려운 점은 우리 모두가 행복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너무 자명한 것이므로 이에 대한 정의조차 필요치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나는 행복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고 각 개인은 타인과 다른(어느 정도 겹치겠지만) 고유의 행복을 향유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행복에 관해 보편적 정의를 내릴 수 없다고 믿었다. 이러한 논리는 다분히 유명론(唯名論)적이다. 유명론이란 행복이란 일반적인 이름의 단어가 존재하지만, 단순히 행복이 단 하나의 현실이나 인간 정신 안에서 일반적인 생각으로 정해 있다는 점은 부정한다. 이러한 논리는 분명 매력적이지만 결함은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어떤 의미에서 각자의 행복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여러 행복이 있을지라도 그 안에는 공통된 어떤 것이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행복이라는 단어로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이라면 행복의 이데아가 있다고 주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행복을 프랑스어로 '좋은 시간'이라는 뜻으로 'bonheur'이라고 한다. 행복은 좋은 것이고 인간은 좋은 것을 원한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행복이란 수단적 선이 아닌 본래적 선이다. 본래적 가치란 그 자체로서 가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행복해져야 한다는 물음을 던질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행복해져야 하는 이유를 '가족을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라고 말할 수 있는가? '∼위하여' 행복을 추구하는 이라면 그 '∼위하여' 행복을 유보하는 것도 의미 있다고 여긴다. 그런 이들이 이러한 것을 타인에게도 강요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행복의 추구는 그 자체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


  행복이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가? 다음 대화를 들어보자.

지금은, 아침 7시 한 서울외고 학생이 종종 걸음으로 버스를 타러 가고 있다.
"당신은 왜 이른 아침에 버스를 타러 가십니까?"
"학교에 공부하러 가기 위해서요."
"그럼 당신은 왜 공부를 하시나요?"
"원하는 대학이나 학과에 가기 위해서요."
"당신은 왜 대학을 가려합니까? 그 자체가 목적입니까?"
"아니요. 대학을 졸업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요."
"그럼 왜 일을 하려합니까? 일한다는 것이 목적입니까?"
"아니요. 일이 즐거워서 하기도 하겠지만 우선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돈을 벌려 하십니까? 돈을 수집하기 위해서 입니까?"
"아니요. 돈이 있으면 필요한 물건도 사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으니까요."
"왜 필요한 물건도 사고, 하고 싶은 것을 하려고 합니까?"
"그런 것이 안되면 삶이 고통스럽기 때문이죠."
"이 모든 것이 고통을 피하기 위한 겁니까?"
"예. 그렇다면 행복할 수 있으니까요."



  다소간의 비약도 많지만 이 대화에서 우리는 행복은 분명 인생의 목적이고 이를 위한 모든 인간 활동은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적으로, 행복이란 유일의 목적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칸트는 행복을 '가능한 만족의 총체'라고 말했다. 즉 현실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거나 상상할 수 있거나 맛보기 원하는 모든 만족을 얻은 사실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이 정의에 입각해서 잘 생각해보면 행복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현실적으로 모든 욕망을 채울 수 있는가? 인간은 거의 필연적으로 채울 수 있는 정도보다 항상 더 많은 욕망을 가진다. 오죽하면 미국의 경제학자 스테일리는 다음과 같은 행복의 방정식을 만들었겠는가.


  행복 = 소유 / 욕망


  그렇다면 인간은 정녕코 행복을 알 수 없고 영원히 만족할 수 없는 존재인가? 욕망이 생기자마자 모든 고통과 갈등을 제거하고 항상 새로운 쾌락을 얻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인가? 이 모든 것이 헛된 환상에 지나지는 않는가? 극적인 행복이나 환희의 순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 다음에는 무엇인가? 무미 건조한 나날들인가? 행복이 하루 걸러 다시 찾아오리라 생각하는가? 아무런 생각 없이 행복을 좇기에는 던져볼 물음들이 너무 많다. 답은 없고 에피쿠로스의 가르침만 귓가에 울린다. "까르페디엠 (Carpe diem)" '열매를 따듯이 하루하루를 사시오.'


  나는 인간은 각자의 행복만을 추구할 때 도덕적이라는 윤리학적 이기주의에 호감을 느낀다. (개인적으로는 이기주의를 개인주의로 바꿨으면 하지만...) 개인 각자는 자신의 행복이 무엇인지 가장 잘 아는 존재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각 개인의 행복 추구가 타인에게 간섭하지 않는 한, 윤리학적 이기주의는 나름대로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건 너무나 이상적인 바람이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자신의 불행은 자신의 잘못만으로 이루어져야 하지만 현실에서 그렇지 않은 경우를 많이 보았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개인들은 각자의 행복을 모두 잘 누리지 못한다. 또한 개인들의 행복 추구가 서로 충돌을 일으킨다면 어찌할 것인가? 윤리학적 이기주의는 여기서 침묵을 지킨다.


  아는 바도 없지만 행복을 논하기 위해 광대한 칸트의 철학 중에서 그가 말한 인식이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자신의 인식이론을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비유했다. 종래에는 대상에 따라 인식한다고 생각했지만, 인간에게 내재해 있는 선천적 형식에 따라 대상이 들어와 인식된다는 것은 마치 천문학상에서 천동설이 지동설로 뒤집힌 것만큼이나 획기적인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전의 인식론은 주어진 명백한 대상을 우리가 인식해 가는 것이었다면 칸트의 인식론은 그냥 주어진 대상을 우리가 여러 가지 범주를 이용하여 능동적으로 인식해 낸다는 차이가 있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면 여기 오이 한 접시가 가득 있다고 하자. 나같이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릴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잘 씻어서 아삭 깨물어 먹고 싶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피부미용에 관심이 많다면 오이마사지를 떠올릴 테고, 달팽이를 키워 본 사람은 오이를 썰어서 달팽이 먹이로 주고 싶을 것이다. 이처럼 똑같은 오이를 두고서 사람마다 다른 인식의 형식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느끼는 것임에도 말만 어려운 건지도 모르겠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면 얼마 전에 불현듯 "개개인의 행복이 최대한 보장되고 개인의 행복이 타인의 행복에 해를 끼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의 행복이란 어떤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아마 윤리학적 이기주의에 미련이 남았는지... 물음은 꼬리를 이었고 결국에는 인간은 행복하게 살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동안 행복의 방법론들을 모색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근 한달 간 행복주의니, 해피즘이니 하며 고민하던 나였는데 어느 날 한 스님의 신문사설을 읽고 경악(?)했다. "반드시 행복해야 돼."라는 생각 속에서 행복은 무거운 짐이 되어버린다는 그 글을 읽고 나의 지난 한 달간의 논의가 얼마나 허망했는가 돌아보니 허탈 그 자체였다. 나만의 행복은 무엇일까 하며 갖은 궁리를 하면서 행복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엄습했다.


  그러던 중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고서는 스스로 행복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해냈다며 자화자찬(?) 해버렸다. 얻은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다는 것은 진리지만 때로는 얻기 위해 잃은 건지, 잃기 위해 얻은 건지 알 수 없기도 하다. 그때마다 잃은 것에 가슴 아파하는 건 비단 나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잃은 것을, 모자란 것을 채워나가면 거기서 행복이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얻은 것에 감사하고 있는 것에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을... 설령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다손 치더라도 우리는 얻은 것을 소중히 해야 한다. 그렇다면 굳이 행복을 찾고자, 누리고자 헤매이지 않아도 되지 않을는지...


  사실 행복에 대해 말하자니 가장 먼저 라이프니츠가 생각난다. 라이프니츠는 신이 이 세상을 가능한 모든 세계 가운데서도 가장 훌륭한 것으로 창조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직도 넘쳐나는 악은 무엇이란 말인가? 라이프니츠는 이렇게 반론한다. 그러한 악이 있기에 세상은 선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만일 악이 없다면 선한 것은 결코 선한 것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추한 것은 아름다운 것을 위해 있는 것이며, 불완전한 것은 완전한 것을 위해 있는 것이다. 비록 부분적인 악이 있다 할지라도 전체 속에서는 선한 것이며 무한한 신의 눈에는 결코 악이란 있을 수 없다고 당당히 말한다. 결국 악함이나 추함이나 불완전함 모두 우주의 질서를 위해 필요한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견해를 '철학적 낙천주의'라고 한다. 나는 '낙천주의자'라는 별명을 가진 라이프니츠는 못될 모양이다. 지금의 내 모습은 행복에 목마른 이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이할까. 그런 그도 말년에 실각하여 분루를 삼키며 고독한 나날을 보내지 않았던가. 화려한 지위에 있었던 라이프니츠도 정치적 몰락과 함께 그의 장례는 아무런 격식도 없이 초라하게 치러졌다고 한다. 하지만 감히 이런 그에게 조소나 던질 수 있겠는가? 그의 오른쪽 다리의 혈액순환에 이상이 생긴 이유가 아마도 며칠이고 의자에서 떠나지 않을 때도 있을 만큼 공부를 계속한데 있지 않을까라고 전기 작가가 말한 그의 삶을 보며 나는 그의 사상을 감히 억지 논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 비판하기는 쉬워도 주장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행복에 대한 많은 탐구를 하지는 못했지만 어설프게나마 나의 행복론을 정리해본다.


  행복이란 '행복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서 말한 것처럼 만족을 기반으로 하며, 누군가가 정하는 것이 아닌 내가 느끼는 것이다. 행복은 내면이 풍요로운 이에게 싹트기 쉽고, 사소한 것에서 찾을 수 있는 눈을 가진 이를 찾아간다. 행복이란 목적의 달성보다 거기에 이르는 과정, 노력하는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혹자는 무척 실망할 것이다. 주절주절 늘어놓고 고작 이런 것 말하려 한 것이냐고. 시시콜콜한 책에서도 나올법한 이야기라고. 좀 더 멋있고 그럴싸한 말은 없냐고 물어도 할 말이 없다. 진리란 본래 지극히 단순하고 담박한 것. 속인들의 수많은 덧붙임은 부질없기만 하다. (물론 나의 경우에는 단순하다기보다 빈약한 것이지만) 이런 뻔한 이야기를 참 빙빙 둘러서 말한 건가? 그래도 뭐... 어차피 행복이란 우리 삶을 영원한 화두일테니...


  "행복에는 날개가 있다. 붙들어 놓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고 실러는 말했다. 흥진비래(興盡悲來)인 것이다. 삶의 모든 일들은 무상(無常)하기만 하다. 그러나 무상하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깨닫고, 새롭게 느끼고, 새롭게 행복할 수 있을 수 있지 않는가! 이 '무상의 역설'을 우리는 달게(?) 받아들이자.


  진리의 여신 아테네는 제우스의 머리 위에서 완전 무장한 채 튀어나왔다고 한다. 진리를 찾는다는 것은 거짓과 싸우는 것이다. 진리는 선물로 받는 것이 아니라 투쟁해서 얻어내는 것이다. 나의 유치한 행복 이야기도 진리와의 싸움에 좋은 무기가 되었으면 한다. 교육 현실이 인문학적 사유를 용납하지 않는다고 외면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행복의 철학, 자신의 인생관은 결국 스스로의 몫이기에.


  달라이라마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진정한 자비심은 물질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행복해지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 아직도 멀은 나이다.
          

[행복]  - 헤르만 헤세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한
행복할 만큼 성숙해 있지 않다.
가장 사랑하는 것들이 모두 네 것일지라도

잃어버린 것을 애석해 하고,
목표를 가지고 초조해 하는 한
평화가 어떤 것인지 너는 모른다.

모든 소망을 단념하고
목표와 욕망도 잊어버리고
행복을 입 밖에 내지 않을 때,

사건의 물결은 네 마음에 닿지 않고
너의 영혼은 비로소 쉬게 된다.



  실로 그랬다. 행복이라는 주제로 생각하고 행복의 의미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행복의 결핍을 증명하고 있었다. 부질없이 '행복'이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기 위해 또 샘물을 길러낸다. 6(^.^)9
Posted by 익구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익구청년 2004.08.03 04:18 Address Modify/Delete Reply

    고등학교 2학년 때 교지에 싣기 위해 쓴 행복에 대한 글이다.
    익구식 횡설수설의 극치를 느낄 수 있다. 산만하다는 비판이 아깝지 않다.^^;
    그러나 이런 졸문마저도 몇날 며칠이 걸린다는 비극적 사실은
    글 즐겨 쓰는 이들만이 공유하는 동병상련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