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할의 무임승차

사회 2003. 8. 26. 03:44 |
서프라이즈(www.seoprise.com)에 올려진 8월 12일날 있은 지승호의 김규항 인터뷰를 재미나게 읽다가 어느 한 대목에서 한 방 강하게 먹었다. 얼마 전 있었던 한총련 미군부대 진입 시위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대목이다. 나는 그 뉴스를 접하고 “몸 좀 사리고 있지”라는 생각을 먼저 했다. 그들의 치열한 정신이 보기에 이 땅의 보수의 찌든 풍토가 좀 마음에 안 들더라도, 굽히고 들어가지는 않더라도 가만히 있어 주는 걸로 합법화를 앞당기는 전략을 썼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단 인터뷰 몇 토막을 긁어보자면...


지 - 한총련의 미군부대 진입 시위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반응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다음날 거의 모든 언론들이 한총련을 비난하는 사설을 싣기도 했는데요.


김 = 그게 한총련에서 조직적으로 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어찌됐든 저는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한겨레를 얼핏 보니까 논설주간인가 하는 사람이 '옛날에 군사정권 시절 같으면 국민들이 그런 폭력적인 시위를 용인을 했지만...'이라고 썼던데 그거 다 개소리거든요. 그때 무슨 국민들이 용인했습니까. 그때도 세상을 몰라서 하는 짓이라고, 빨갱이 새끼들 다 잡아들여야 된다고 욕했습니다. 국민들은 늘 그랬습니다. 걸핏하면 그때 국민들이 떨리는 심정으로 대학생들의 시위를 지지했던 것처럼 말하는데, 전혀 사실과 다릅니다. 다들 제 식구 챙기면서 알뜰하게 살았죠. 제 얘기 동의하시죠?


지 - 예. 동의합니다.(웃음)


김 = 역사라는 것은 항상 비난받고 오해받는 소수가 뚫고 나가서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이 무임승차하는 식으로 발전합니다. 차라리 '난 한총련 놈들이 꼴 보기 싫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김규항의 말에 따르면 나의 “몸 좀 사리고 있지”라는 생각은 나름대로 그들을 위한 생각이라고 여겼었는데 이건 결국 한총련 놈들이 싫다를 완곡하게 돌려서 말한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악어의 눈물’을 흘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비록 서푼어치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나의 자유주의적 신념을 바탕으로 해서 한총련 합법화를 꾸준히 지지해왔다. 그게 아니라면 헌법에 보장된 사상의 자유에 근거해서라도 지지할 것이다. 이는 자유주의를 들먹이는 거창한 것이 아닌, 민주공화국 시민으로서의 당연한 책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늘 그렇지만 당연한 것이 가장 어려운 법이다. 그래서 오로지 당위만 부여잡으려는 편협한 사고는 위험하다. 물론 그 역도 마찬가지지만.)


내가 무심결에 내뱉은 “몸 좀 사리고 있지”는 내가 비굴한 현실주의자임을 증명한다고 스스로를 공격해본다. 나는 이상주의자를 자처하지만 나의 이상은 현실과 타협해서 제 모습을 거의 다 깎아먹기 일쑤다. 고심 끝에 ‘이상실현주의자’라는 억지 수식어구를 만들기까지 했다. 그릇된 것을 현실을 핑계 대며 그럭저럭 괜찮은 것으로 변신시키는 잔머리가 나의 이상실현주의의 요체인지도 모른다. 비난받고 오해받는 두려운 길을 가기보다는 알콩달콩 적당히 손잡아가며 살아가는 전략을 앞으로도 별 문제의식 없이 구사할 것이다.


그렇다. 김규항의 말대로 소수의 희생 끝에 역사는 진보해왔다고 볼 수 있다. 역사의 진보는 재화의 유형 중에서 공공재적 성격이 강하다. 공공재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진다고 한다.


첫 번째 특성은 소비에서의 비경합성(non-rivalry)인데. 한 사람이 그것을 소비한다 해서 다른 사람이 소비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두 번째 특성은 배제불가능성(non-excludability)으로서 대가를 치르지 않는 사람이라도 소비에서 배제할 수 없다는 성격이다.
- 이준구, 이창용, [경제학원론] 제2판 273쪽, (법문사, 2001)


경합성은 한 사람이 재화를 소비하면 다른 사람의 소비가 제한 받는 속성이다. 즉, 비경합성은 한 사람이 공공재 소비를 하는 데 드는 비용인 한계비용이 0이라는 말이다. 배제성은 다른 사람들이 재화를 소비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가능성이다. 즉, 배제불가능성이란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사람도 공공재를 사용하는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의 진보가 비경합적인 것은 가령 양성평등의 문화가 정착되었다고 할 때, 100만 명이 그 문화의 혜택을 누리는 것에서 1000만 명이 그 문화의 혜택을 누리게 하는데 드는 비용이 0에 가깝다는 것이다. (물론 이상적인 경우 한계비용이 0이겠지만, 아마 현실 상에서는 0보다는 클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또한 배제불가능한 이유는 가령 일단 민주화가 진전된 사회에서 어떤 이는 민주주의를 구현하게 하고, 다른 이들에게는 군사정권 시절의 폭압적 의사결정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허나 자발적으로 그 때 그 시절이 좋았다고 외치는 이들은 논외로 하자^^;)


공공재 문제 앞에서 역사라는 거대한 ‘시장’은 곧잘 실패를 한다. 그러나 그 실패를 만회하는 방법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럴수록 평가가 철저히 이루어져야하고, 보상과 문책이 정확하게 이루어져서 소수의 희생이 사후에나마 대접받고 보상받을 수 있어야 한다. 혹자는 그럼 희생의 의미가 없지 않느냐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미래의 불확실성에 자신의 내맡긴 것에 대한 보상이라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그 의미는 충분하다. 햇빛이 비칠 때 투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짙은 안개가 깔리거나 거센 폭우가 들이칠 때 투자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얻어진 진보는 참다운 진보가 아니라고 믿는다. 그러나 현실은 누군가는 계속 희생하고, 누군가는 희생의 열매를 향유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보상과 문책, 기록과 평가에 대한 인식이 투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희생한 이들에게 희생에 대해 어느 정도 보상하고, 희생시킨 놈들에게는 어느 정도 그 악행에 대한 죄 값을 짐 지우게 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문제는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선악의 개념이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분명한 악으로서의 조선일보 같은 존재들이 고맙기까지 하다^^;) 착한 이들과 나쁜 놈들을 가려내기 여간 힘들지 않은 세상이지만, 시장의 상도덕이 바로잡힌다면 마냥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김규항의 사관이 조금은 엘리트주의 냄새가 난다고 핀잔하기보다는, 소수의 희생을 넙죽 받아먹는 대다수 무임승차하는 이들에 대한 질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그리고 기록과 평가를 일상화하고, 보상과 문책을 공정하게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팔할은 무임승차하는 나의 남은 이할의 양심이다. 6(^.^)9


덧붙이며...

한총련 합법화 논의가 처음 불거져 나왔을 때 한총련이 불법의 그늘에서 벗어난다면, 다양한 학생운동 흐름들과 진검승부를 펼치지 않을까 하는 제멋대로의 상상을 해봤다. 비운동권을 표방하는 나로서는 거대한 경쟁자가 전면에 등장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이거 완전히 김칫국 몇 사발은 들이킨 꼴이다.^^;


그러나 이런 낭만적인 상상과는 달리 이미 운동권의 대세를 장악한 것으로 보이는 한총련이 합법화된다면 그야말로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운동통일’을 꾀할 것 같다는 두려운 상상이다. 뭐 통일이라고 해봤자 그네들끼리 감투 주고받고, 그들만의 언어로 유희하며 학생사회의 대장질하는 쾌감을 공유하는 철저한 그들만의 잔치겠지만 말이다. 학생회, 동아리, 학회 등의 대학사회의 여러 조직들이 하나같이 맥을 못 추는 판에 그네들이 독점을 하면 얼마나 하고, 통일해서 잔치 벌여봤자 얼마나 벌이겠냐는 생각을 곧바로 이어지기는 했지만.^^;


한총련 합법화 불길에 찬물을 끼얹는 일련의 사건 속에서도 변함 없이 한총련을 위시한 불법의 눈초리를 받는 운동 단체들의 합법화를 지지한다. 앞으로 합법화 된 그들과 대립각을 세울 일이 있다면 너무나 부족한 나로서는 불편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무지한 자의 편에 서줄 만큼 여유롭지는 않기에... 나의 무식을 손가락질 할 뿐 그들의 유식을 탓할 수는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유식과 무식의 경계는 늘 아슬아슬하다는 것이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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