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수험시절 면접과 논술을 공부한답시고 토론 프로그램을 메모해가면서 보던 것과는 달리... 요즘 들어 토론 프로그램을 보는 것은 하나같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소모적인 논쟁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분명한 목적 의식(?)이 상실된 까닭이 크겠지만... 그런데 8월 31일 일요일 밤에 있었던 케이비에스 2TV의 ‘100인 토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에서는 호주제 폐지 논란에 대한 토론은 최근 본 토론 중에서 가장 뜨거웠다. 그만큼 이 문제가 우리 사회의 큰 화두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것 같다.


뭐 대개의 토론은 양측의 입장이 극단으로 치닫기 마련이지만... 호주제는 특히 더하다. 호주제 폐지론자들은 현행 호주제는 이 땅의 부계혈통주의와 남성중심적 사회를 존속시키며 여성을 억압하는 반인권적인 제도라고 열을 내고... 호주제 폐지반대론자들은 유구한 전통 타령을 하며 서구의 개인주의의 물결에 맞설 방파제라고 역설한다. (지금까지 본 호주제 유지론자의 입장 중에 압권은 호주제 폐지가 공산주의 여성 동등권 이념투쟁의 연장이라며, 공산화의 일환이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별걸 다 빨간 색을 칠한다...^^;)


호주제 폐지는 호주의 개념을 없애는 것과 더불어 자녀의 성과 본을 어머니의 것으로도 따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 가지고 시비 거는 이들이 많다. 부모성 함께 쓰기 운동을 비아냥거리고, 성씨 빼고 이름만 쓰는 사람들을 개만도 못한 놈들로 치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성씨 없던 사람들이 성씨와 족보를 가지게 되면서 이왕이면 명문 세도가문의 것을 써서 명문 세도가문인 척 하려고 했다는 것은 거의 진실일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씨 왕조의 후손이니 김수로왕의 후손이니 하는 말을 나누며 유대감을 느끼는 것은 한국적 정서라고 둘러대기에는 영 마뜩지 않다.


1989년 민법개정으로 호주의 권리와 의무가 대폭 축소되어 현행 호주제는 사실상 관념적인 제도로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허울뿐인 제도가 미풍양속이고 우리 전통문화의 대들보라고 주장할 이유가 있는지 두 번 생각해도 아리송하다. 특히 호주제 없으면 개랑 다를 바 없어진다고 핏발 세우는 소위 유림들은 뭐하는 이들인가. 진정한 보수는 바꿔야 할 것은 기꺼이 고치면서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이 상식인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변화를 모른다. 이들에게 역사를 더 공부하길 권한다. 조선이 누구 때문에 어쩌다가 망했는지를... 다행인 것은 이들이 더 이상 이 땅의 권력을 넘볼 수 없을 만큼 쇠락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뜻을 이어받을 후세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데 그네들은 위기감을 느낄지 모르지만 그건 다 자업자득, 인과응보이니 너무 섭섭하게 생각지 마시라.^^


권해효 : 60년에 호적법이 생긴 이후에 문제없이 쓰였다는데 사실은 59년도부터 가정법을 개정하기 위해서 많은 여성단체가 50년 세월을 싸워왔습니다. 사실은요. 잘 아시잖아요., 70년대도 있었고, 90년도에 민법 개정도 있었구요. 80년대도 있었구요. 59년부터 있었다구요. 문제가 있다고 제기를 해왔단 말이에요. 무시하고 있었죠. 이제까지요. 사실 무시하고 있었죠.



배우 권해효의 부드러운 말이 무척 호소력 있게 들린다. 그렇다. 지금까지 무시해왔다. 남성의 울타리 안에서의 양성평등을 용인하던 이들이 그 울타리를 넘어서려는 이들에게 드디어 삿대질을 하며 울타리를 넘지 못하게 하려고 하고 있다. 결국 울타리를 없애는 것이 가장 빨리 모순과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다. 울타리를 낮춘다거나 쪽문을 내는 정도에서 타협해봤자 남는 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래서 논쟁은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 고은광순 운영위원 고은광순과 배우 윤문식의 설전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역시 무지는 위험하다.^^;


고은광순 : 네. 호주제를 폐지했을 경우에 발생할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그거 검증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검증되지 않을 것을 왜 걱정합니까. 지금 현재 있기 때문에 피해가 생기고 고통스러운 건 충분히 검증되어 있습니다. 제가 가지고 나온 책에도 보면 얼마나 가슴아픈 사연들이 많은지 몰라요. 줄줄이 많이 있어요. 이건 틀림없이 지금 현재 발생하고 검증된 사실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수정도 아니고 개선도 아니고 폐지가 최선이라고 학자들도 다 발표를 했어요. 그래서 용역 줘서 이런 거 저런 거 다 살펴보니까 개인별로 만드는 것이 최선이겠다. 이런 여러 가지 복합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개인별로 만드는 것이 최선이겠다고 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게 오랜 연구 끝에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있는 것을 없는 척하고 발생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 검증되지 않았으니까 가지 말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굉장히 가혹한 얘기입니다. 그리고 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요. 노예 해방이 되야 되는 건 당연한데 노예 해방되는 데든 돈이 많이 드니까 하지 말자라고 하는 말은 백인주인,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굉장히 비인간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그런 식의 말은 절반의 인구에 해당하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굉장히 폭력적인 발언입니다.


윤문식 : 그렇게 극단적으로 나오시면요. 지금 그걸 그 법을 관철시키시려면 그렇게 극단적으로 말씀하지 마시고, 저같이 무식한 놈들을 설득시켜야 되는 겁니다. 지금 수많은 사례들 수집했을 때 물론 나보다 얼마나 피해가 있다는 걸 많이 연구하셨기 때문에 그런걸 주장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이 호주제를 폐지했을 때 그보다 더 많은 피해가 있을지 어떻게 아느냐 이거죠. 그래서 그런걸 더 신중하게 생각해야 되지 않겠느냐 이런 얘기를 하는 거 에요. 그리고 지금까지 잘 진행해왔던걸 지금 사례들이 가슴아픈 사례들이 많은 겁니다. 그 사례에 많은 사람들이 물론 민주주의 국가는 다수결이고 물론 후세 인간도 존중해야 되겠지만, 그 몇몇의 소수 인원을 위해서 전통적인 문화의 근간을 흔들어놓는다는 것은 난 도대체 이해가 안되는 거에요.


고은광순 : 소수가 아니구요. 지금 이혼율이 세계 2위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윤문식 : 그럼 호주제 폐지한다고 이혼 안합니까? 이혼할 여자는 이래도 저래도 해요.


고은광순 : 그 이혼한 사람들이 다시 재혼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현재 이런 문제를 성씨문제라든가 호주제 문제 때문에 고통을 겪어야 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이미 깨졌지만 사실은 실패한 결혼을 정리한 것에 불과하고 우리는 오히려 그들의 결단을 박수를 쳐줘야 될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이 다시 제2의 삶을 살 때 그 사람들에게 또 다시 굴레를 법이 비정상으로 낙인찍고 또 다시 굴레를 주면 안 되는 거죠.



윤문식에게서 대한민국 보통 남자들의 무지를 쉽게 느낄 수 있다. 자기 아내의 고통은 외면하면서도 후세를 걱정하고, 대한민국의 전통을 사수하는데는 열과 성을 다하는 모순... 한총련 수배자들에게는 그다지 관심이 없으면서, 휴전선 너머의 북한의 인권을 걱정하는 오바질도 다 매한가지다. 유시민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으며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실현하는 이들’이 제발 좀 더 줄어들길 바란다.


<맹자>의 양 혜왕 편을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온다. 하루는 왕이 궁궐에 있는데 하인이 소를 데리고 지나 가더란다. 봤더니 소가 눈이 슬프거든. 우는 거 같고. 그래서 "어디에 데려가느냐" 했더니 "제사지내러 잡으러 갑니다" 그러더란다. 그래 소를 다시 봤더니 우는 거 같거든. 불쌍하잖아. 그래서 소를 잡지 말라고 그랬다. 그랬더니 하인이 "그럼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뭘 잡을까요" 그러자 왕이 하는 말이 양을 잡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얘기가 퍼져 나가니까 온 백성들이 비웃었다. 멍청한 왕이라고. 소는 불쌍하고 양은 안 불쌍하냐는 얘기다. 그런데 맹자가 그에 대해 뭐라고 했냐면, "그렇지 않다. 그 사람은 어진 군주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사람이다. 자기 눈앞에 보이는 것에 조차도 연민의 정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라면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백성에 대해서 연민의 정을 가질 리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게 인간의 한계라고 생각을 하고, 자기 주변에서 직관적으로 정서적으로 다가오는 연민의 문제나 이런 것에 반응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연민의 정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 뉴스툰 인터뷰 中



호주제 폐지를 주장하는 이들은 그리 어려운 논거를 들이댈 필요가 없다. 그저 담담히 상식에 호소하자. 세상의 절반이 희생되어 이룩하는 그 어떤 것도 온전할 수 없다는 것을 차분히 주장하자. 윤문식과 비슷한 무지가 지배하는 세상을 바꾸는 일은 더할 나위 없이 짜증이 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끊임없이 교감하며 설득해야 할 수밖에. 그래도 승기를 슬슬 잡아가고 있다는 것을 위안 삼을 뿐이다. 끝으로 동국대 영화영상학부 유지나 교수의 다음과 같은 확신에 나도 동감한다.


유지나 : 개인의 행복 추구권으로써 가족이 가치 있을 때 있는 것이고, 어떤 개인 특히 한 성이 다른 성을 억압하는 가족이라면 항상 깨져나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변하고 좋은 전통을 만들어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인으로써 이 한반도에서 인간존중의 전통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확신하고 자료 있습니다. 왜 몇십년 전통만 전통이고, 백년 전 전통은 아닙니까? 인간 존중의 전통을 살려서 남녀성이 같이 양성평등하는 가족제도 만들기 위해서 호주제도 없애도 됩니다. 확신합니다. 여러분 잘 생각하시면 아실 거에요. 처음으로 한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은 옳은 일입니다. 저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남녀차별보다는 양성평등이 더 이득이 된다는 것이 뭇사람들의 가슴에 알알이 박히기까지는 엄청난 비용을 지출해야할지도 모르지만... 양성평등에 대한 신념이 하나하나 늘어갈 때 투자한 것의 몇 곱절 되는 거대한 수익을 거둘 수 있으리라 믿는다. 별로 리스크가 높은 투자도 아니니 더 많은 개미 투자자들이 몰려들기를 바란다. 6(^.^)9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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