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마와 아니무스로 살펴보는 개성화 과정
-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읽고


  [아니마와 아니무스](이부영著, 한길사刊)는 융의 아니마(anima)․아니무스(animus) 이론을 종합한 후, 그 이론을 저자가 수집한 한국인의 꿈, 정신과 임상사례, 현대시, 무속 및 민담, 그리고 [도덕경] 등의 전통 사상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서구의 이론을 가져와 우리의 역사와 현실에 적용하려는 시도가 무척 신선했다. 책이 다루고 있는 범위가 워낙 광범위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아니마와 아니무스 개념과 양성평등의 문제를 집어보는 것으로 논의의 범위를 한정시키도록 하겠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카알 구스타프 융은 모든 인간은 그 정신 속에 자신과 반대되는 성적 요소, 즉 남성은 아니마(여성적 영혼)를, 그리고 여성은 남성적인 아니무스(남성적 영혼)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융이 말하는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극단적이면서도 서로 조화하고자 한다. 육체는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 있지만, 인간성의 본질은 원래 양성적이라는 것이다.


  먼저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페르조나’라는 개념을 알 필요가 있다. 융은 인간 정신의 표면을 지배하는 양태를 `페르조나'라고 이름 붙였다. 그에 대비해 정신의 내면으로서 남성의 퍼스낼리티의 여성적 측면을 `아니마'라 하고, 여성 퍼스낼리티의 남성적 측면을 `아니무스'라고 명명했다. 정신의 겉면인 페르조나는 때와 장소에 마치 카멜레온의 보호색처럼 바뀌어서 시대, 문화와 상황에 따라 의식과 행동방식을 적절하게 변화시킨다. 그러나 그 이면엔 남성의 경우 아니마, 여성에선 아니무스의 태고유형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집단사회 속에서 집단에 의해 요구되는 태도인 페르조나와 반대로 나타난다. 남성은 가장으로, 강한 직장인으로, 논리적인 경향의 남성적 페르조나를 쓰고 살아가지만 그 안에는 감정적인 아니마가 자리잡고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사회적 요구에 맞추어가는 가운데 남성과 여성의 무의식에는 남성과 여성의 페르조나에 대응하는 또 하나의 내적 인격이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남성의 무의식에는 여성적 인격이, 여성의 무의식에는 남성적 인격이 내적 인격으로 자리하게 된다. 아니마, 아니무스는 남성과 여성의 의식에서 억압된 것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원초적 조건인 원형으로 이미 그렇게 되어있는 것을 핵으로 하여 이루어진다.
(이부영, [아니마와 아니무스], 31쪽)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항상 무의식적으로 연인에게 투사되어 `매력' 또는 `혐오감'을 야기하는 주요한 원인중의 하나가 된다. 즉 남성의 경우 여성에게 아니마를 투사할 때 자기 아니마의 여성상과 동일한 특성을 가지고 있으면 매력을 느끼고, 모순된 경우에는 혐오를 느낀다는 것이다. 어느 시인의 “그냥 좋은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라는 시구는 그런 인간의 표현하기 힘든 무의식의 감정을 잘 대변해주고 있는 것 같다.


  저자는 “어떤 이성에게 한눈에 반했다면, 그건 자신의 아니마 또는 아니무스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라며 아니마, 아니무스를 알기 쉽게 설명했다. 상대방을 보고 느끼는 황홀함이 사실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상이라는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첫눈에 반했다’라는 경우를 융은 명쾌하게 설명해주고 있어서 무척 흥미로웠다. 이는 비단 남녀관계에서만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얼마 전 읽은 김근태의 에세이집에서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쓴 글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살다보면 괜히 좋은 사람이 있다. 아마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일인데, 내게 특별히 잘해주거나 각별한 이해관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신뢰감이 가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나에게는 김근태 의원이 바로 그런 분이다.
(김근태 에세이집 [희망은 힘이 세다], 252쪽)



  저자는 아니마, 아니무스의 투사로 인한 사랑의 실패에 대해 높은 의미를 부여한다. 자기 마음의 투사상이 아닌 현실의 그 남자, 그 여자를 보게 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사랑이란 자기 욕심을 채우고 상대를 자기의 이상상에 맞추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솔직히 이 대목이 가장 실용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의식의 자아와 무의식의 심혼과의 융합이야말로 평화의 경지이며 자기실현의 길이라는 말에 깊은 공감을 했다.


  요컨대 융의 아니마, 아니무스론은 인간이 남성과 여성에 머물러 있지 말고 남성은 여성적 요소를, 여성은 남성적 요소를 살려서 의식에 통합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의식의 중심인 자아는 전체정신의 중심에 거의 접근하게 된다.
(이부영, [아니마와 아니무스], 36쪽)



  지극히 남성우월주의적 관점에서 여성은 열등한 것으로 치부한 프로이트에 비해, 융은 비교적 합리적인 견해를 제시했지만 역시 그에게도 한계는 있었다. 아마 여성분이라면 융의 견해를 나처럼 이렇게 편하게 받아들이지는 못했을 것 같다. 결국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체는 어디까지나 남성이고 여성은 객체에서 머무르며 비교대상으로서의 가치를 보유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융이 과격한 여권신장을 주창한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남성에게 여성적인 것, 여성에게 남성적인 것은 본래 뒷면에 있는 것인데 자기의 성과 다른 성의 것을 앞면에 내세워 살리게 되면 자기 고유의 성이 소홀해진다. 여기서 융은 강조한다. “남성은 남성으로, 여성은 여성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같은책, 58쪽)



  그래서 조금 아쉬운 감이 남는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개념을 정립하고 그것을 조화시키자는 선에서 논의를 마무리한다. 조금 더 나아가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나 할까. 세계적으로 남녀평등 지표가 매우 낮은 나라인 한국, 여전히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질서가 강한 나라인 한국의 현실에 대한 저자의 따끔한 일침을 기대했다면 이 책의 범위를 벗어나는 무리한 요구였을까?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짧은 생각으로는 이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여자가 만들어지는 것은 맞지만 남자 또한 만들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이는 남성에게 더욱 어울리는 말처럼 느껴진다. 남성이야말로 사회적으로 제조되는 존재라고 생각된다.


  오죽하면 “전통적으로 남성성은 무엇인가를 욕구하는 것보다는 무엇인가를 회피하는 것으로 자주 정의”(E. 바뎅데, [XY 남성의 본질에 대하여], 183쪽)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인가. 하긴 가만히 따져보면 남자가 된다는 것은 여성스러움을 피하고, 동성애자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등의 주로 ‘안티’를 통해서 규정되기 일쑤이다. ‘남성다운’ ‘여성다운’ 같은 성의 특성을 나타내는 말을 프로이트는 “학문 영역 중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개념”이라고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남자가 되라”고 가르치고 윽박지르지만 ‘사내대장부’ ‘진짜 남자’가 과연 딱 정리된 것이 있는지 물으면 혼란스럽기만 하다. 흔히들 남성성은 여성성을 적극적으로 제거하는 노력을 통해 얻어낸다는 믿는다. 그래서 남자가 되기 위해 목숨 걸고 쇼(!)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렇게 한마디 내뱉어주는 쾌감을 위해. “니들이 남자다움을 알아!”

  
  우리가 보듯 남성성은 두드러지게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다른 남성들 앞에서 그리고 다른 남성들을 위해서 구축된, 그리고 여성성에 대항하여 여성적인 것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 속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자체로 구축된 개념이다.
(피에르 부르디외, [남성지배], 75쪽)



  하지만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한 명의 남성의 탄생하는 과정 그 자체이다. 한 명의 남자의 탄생에는 늘 여성에 대한, 그리고 다른 남성 및 스스로에 대한 억압과 폭력이 내재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런 식으로 남성다움을 성취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겠다는 전략인 셈이다.


  세상의 절반이나 되는 여성들이 단지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감수해야 하는 갖은 불공정함을 놓아 둔 채 어떤 진보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성적 차별은 ‘사나이’로부터 나온다.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사내다운 사나이가 존재’하기 위해선 언제나 ‘여자다운 여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나이’라는 말은 온갖 범죄, 온갖 불평등, 온갖 권위주의, 온갖 파시즘의 면죄부이기도 했다.
(김규항, [B급좌파], 83쪽)



  전통적으로 성역할 사회화의 과정에서 여성은 여성성만을, 남성은 남성성만을 확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져 왔다. 고작 몇 십 년 전만 해도 삼종지도(三從之道)니, 칠거지악(七去之惡)이니 하는 규범들이 엄존했던 이 땅에서도 최근 급격한 변화의 바람이 부는 것은 사실이다. 이 것을 보고 역사는 그래도 진보한다는 명제의 위대성을 실감할 수 있다. 내가 배웠던 고등학교 교과서의 일부를 먼지를 털면서 들춰보았다.


  어느 심리학자는 사람의 인성을 다음의 네 가지로 분류하였다. 남성적 인성, 여성적 인성, 양성적 인성, 그리고 미분화된 인성이 그것이다. 남성적 인성과 여성적 인성은 각각 전형적인 남성다움, 여성다움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의미하고, 양성적 인성은 여성다움의 장점과 남성다움의 장점을 골고루 갖춘 사람을 의미하며, 미분화된 인성은 남성다움이나 여성다움의 어느 것도 강하게 나타나지 않는 사람을 의미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주위 사람들과 원만한 인간 관계를 유지하며 인기를 얻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양성적 성향을 나타낸다는 점이다.
(한국 교육 개발원, [고등학교 일반사회]1999년 판, 75쪽)



  1970년대 이후 '심리적 양성성'에 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남성적이고 여성적인 성격이 모두 발달한 개인이 다양한 상황에 대한 적응력이 높다는 결과가 보고되고 있다고 한다. 자신의 무의식 속에 내재된 부정적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대면하고 통합된 ‘자기’를 이루는 길은 사실 자신 영혼의 평화뿐만 아니라, 여러 현대사회의 문제점들에 대한 대안을 마련해 줄 것이라는 융의 분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절실한 과제이다.


  그러나 대개 그렇지만 해결책이 명확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항상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쉽다는 보장은 없다. 쉽게 의식 속으로 편입되지 않을 뿐더러, 사회에서 여전히 여성다움과 남성다움을 원한다면 양성성으로 눈을 돌릴 유인은 현저히 떨어지게 된다. 얼마전 술자리에서 어쩌다 나온 친구의 한 마디가 뭇남성들의 이런 딜레마를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책에서 양성성 어쩌고 떠들어대도 그래도 역시 남자는 남자다워야지.”


  여성호르몬 또는 아니마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조화, 따뜻한 관심과 지원 등을 갖게 하지만, 남성 호르몬 또는 아니무스는 경쟁과 전쟁, 등급과 서열매기기 등을 만든다. 20세기는 분명 부와 권력을 얻기 위해 남을 억누르고 지배했던 남성의 세기였다. 남성의 시대가 계속돼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는 이들은 배려와 조화의 여성성이 21세기를 이끌어갈 것으로 내다본다. 이러한 여성성은 여성만이 지닌 것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 모두의 가슴에 들어있다. 다만 남성들은 그것을 억압해 왔을 뿐이다. 이제는 남성 안의 여성성을, 최후의 식민지를 풀어줄 때가 되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를 딴지를 걸며 지나친 여성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있다. 참 한쪽 면만을 바라보는 것 같아 답답하다.


  ‘지나친 여성화’를 문제시하는 논리는 옹색하기 짝이 없다. 우선 나는 그냥 ‘여성화’와 ‘지나친 여성화’ 사이의 경계가 어디인지, 여성화가 지나친 나머지 실제 어떤 좋지 못한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무엇이든 중용과 균형이 좋다고들 하니까 남녀가 반반씩 섞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치자. 그러면 당연히 이런 의문이 떠오른다. 우리 사회의 다른 분야는 거의 모두 ‘지나친 남성화’가 나타나는데 거기에는 문제가 없는가.
(유시민, [WHY NOT?], 330, 331쪽)



  모든 것이 남성중심적인 세상에서 남성들에게 아니마는 사라진 지 오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아남기에 거추장스러운 것이니까. 온화하고, 정서적이고, 따뜻한 여성적인 영혼이 사라진 세상에 '냉정하고, 거칠고, 공격적인 남성적인 합리주의'가 자리잡았기 때문에 자본만능주의, 각종 전쟁, 환경파괴를 낳은 것은 아닌지 조용히 되물어봐야 한다.


  인격의 성숙을 위해서는 '남자'와 '여자'라는 사회적 역할에 집착하기보다 내면의 인격을 통합해야 한다는 것이 융의 아니마, 아니무스 이론의 핵심이다. 남자는 남자다움을 배우는 동시에 이에 맹목적으로 집착하지 말고 내면의 여성적 감성을 키워 나가야 하고, 여자는 여자다움을 배우더라도 내면의 로고스(Logos), 곧 판단하는 힘과 지혜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남성은 보다 깊은 공감능력과 안정된 정서를 지닌 존재로, 여성은 막무가내로 따지는 것이 아닌 지혜로운 여성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된다.


  우리는 고정적이고 획일화된 아름다움이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양성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사회에서 개인은 좀 더 개성적이고 창의적이며, 무엇보다도 자유로울 수 있다. 더 이상 이 땅에 여자라는, 남자라는 이유로 고통받는 이들이 없어야겠다는 생각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떠나지 않았다.


  원래 인간은 양성이 결합되어 있는 양성체였다가 신의 노여움으로 두 부분으로 나눠어져서 서로를 찾게 되었다는 신화가 문득 떠오른다. 굳이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여성과 남성 사이의 문제는 인간의 영원한 테마일 것이다. 무의식 속의 여성성과 남성성은 우리 모두에게 자신에 대한 끝없는 반성의 출발점이다. 다른 성에 투사된 내 무의식 속의 여성성이나 남성성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돌아와 의식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 융이 말했던 한 개인이 온전한 자기에 이르는 과정을 ‘개성화 과정’은 여전히 요원하기만 하다. 6(^.^)9
Posted by 익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