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8일 열렸던 경영대 사회과학학회 2차 세미나에서 ‘언론비평’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텍스트로 손석춘의 [신문읽기의 혁명]을 선정해서 밀도 있는 대화를 나눠볼 수 있었다. [신문읽기의 혁명]의 글쓴이 손석춘은 신문 취재, 편집은 물론 신문과 정치권력, 경제권력과의 관계 등을 여러 중앙 일간지의 기사를 시각적 자료로 제시하며 설득력 있게 풀어나가고 있다. 이를 통해 신문 읽기에서 편집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의 부제인 ‘편집을 알아야 기사가 보인다’가 이 책의 문제의식과 집필의도를 명확히 드러내주고 있다. 글쓴이는 신문 기사내용은 고정불변의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또한 신문이 제시하는 사고의 틀, 삶의 테두리 속에 갇히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글쓴이를 이를 위해 편집을 바로 보는 안목을 기를 것을 주창한다. 편집을 통해 비로소 신문이라는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글쓴이는 “삶의 현실과 신문 지면 사이에 불가피하게 놓이게 된 여과장치가 바로 편집”이며 “가치 판단이 빠진 편집이란 애초부터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글쓴이는 신문 편집국의 개념과 분업 구조를 설명하고 취재기자에서부터 편집국장에 이르는 과정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편집국과 편집부의 개념 차이, 취재기자와 편집기자의 분류 등을 이제야 깨우쳤다^^;) 이어 피라미드 구조로 된 신문기사의 편집과정에서 신문사의 주관적인 시각이 들어간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중앙 일간지들이 하나의 사건을 두고 표제와 기사내용이 다른 사례들을 들어 신문에 녹아있는 주관적 판단을 증빙해 보이며 심한 경우에는 왜곡되거나 사실과 동떨어진 표제가 붙여져 독자들의 인식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글쓴이는 신문편집의 3원색으로 “기사, 표제, 사진”을 들고 있다. 이 중에서 특히 개념상 설명이 필요한 “표제”에 대한 중점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그는 표제는 기사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기에 중요하다고 말하며 “기사의 전체 내용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사가 읽혀지는 해석의 틀을 제공”해준다고 그 의의를 밝히고 있다. 실제로 독자는 표제를 읽고 기사의 내용을 짐작하고, 읽을지 말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부 언론의 고질적인 병폐로 지적되는 것 중에 하나가 표제의 왜곡과 선정성으로 독자에게 진실을 호도하려는 것에 있다.


‘실제로 있거나 실제로 있었던 일’인 사실(事實)을 보도하는 것이 신문의 이상이지만, 실제로는 ’문제가 되거나 관심을 끌 만한 일’인 사건(事件)을 보도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신문사가 자기 입맛에 맞는 가치판단을 내리는 것, 즉 사실의 사건화를 이용한 그들의 숨은 의도를 가려내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의 사건화’라는 용어는 이 책에 대한 어느 네티즌의 서평에서 따온 것임을 밝힌다) 종이 신문의 위상이 과거에 비해 많이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보통 사람들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창으로서 존재한다. 이 창의 얼룩들을 지우기 위해서는 편집을 이해하고 기사를 비판적으로 읽어 가는 능동적인 독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상 텍스트의 첫째마당을 개괄한 나의 발제문을 약간 수정해서 올렸다^^)


세미나는 시종일관 끊김 없이 물 흐르듯이 진행되었다. 가장 먼저 오늘날 신문이 영향력에 대한 고찰이 나왔다. (우리는 논제를 ‘종이 신문’으로만 한정했다) 참가자 대다수가 그래도 일정정도의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음에 논의할 가치가 있는 문제라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나는 인터넷 언론매체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으며, 최근에 왕성한 의제설정능력을 과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종이 신문의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의 영향력이 여전히 막강한 것은 각종 조사통계를 보아도 도통 책을 읽지 않는다는 국민들이 그나마 접하는 정보전달매체가 신문이라는 점과 신문에서 읽은 내용을 자기 생각으로 받아들여 부지런히 재생산하는 경우를 들었다. 다음으로 과연 신문의 ‘팩트조작’과 ‘관점차이’의 경계가 어디일까라는 화두가 이어졌지만 역시 녹록치 않았다.


나는 이야기 해보고 싶은 것으로 언론의 불편부당(不偏不黨)은 가능한가, 언론개혁의 목표와 실현방안은 무엇인가, 편집권은 누구에게 귀속되어야 하는가를 제시했다. 그런데 별로 싸울 거리가 없어 보이던 불편부당이라는 논제가 활활 타올랐다. 웬만한 신문들의 사시(社是)에 불편부당이나 공정보도를 내걸고 있다보니 한 번 시비나 걸어보자는 거였는데 의외로 이야깃거리가 쏟아져 나왔다. (물론 논의가 확대되면서 이런저런 논제가 섞이다보니 그렇게 느껴졌을 수도 있지만...) 언론의 불편부당 문제가 중요한 것은 이것에서 어느 정도 합의를 보아야 언론개혁의 목표를 설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불편부당 문제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언론개혁의 목표도 달라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크게 보아 ‘정치적 지지까지 표명하는 분명한 입장 드러내기’와 ‘기계적 중립실현에 노력하는 것’이 그것이다. 전자는 불편부당보다는 차라리 가면을 벗고 자기의 색깔을 떳떳이 밝히고 경쟁하자는 것이다. 후자는 불편부당의 이상은 찬성, 반대의견을 골고루 실어주는 등의 노력을 통해 일정정도 실현 가능하다는 것이다. 전자가 영리를 추구하는 사기업으로서의 신문사를 바탕으로 한다면, 후자는 공익적 목적과 사회의 공기(公器)로서의 신문사를 지지한다고 할 수 있다.


불편부당에 대한 설왕설래를 경청하다가 문득 든 의문은 과연 입장 드러내기 수준은 어디까지인가 하는 점이다. 대국적으로 우리 신문의 색깔은 이렇고 어느 당을 지지한다 같은 수준에서 그치는 것인가, 아니면 사안별로 자신의 입장을 밝혀 공론의 장에서 논쟁하겠다는 것인지 등에 대한 혼란이었다. 나는 신문의 제 색깔 드러내기는 좀 더 확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보수 언론들의 자신들의 논조가 보수적이라고 칼럼 등에서 공공연히 밝히고 있고, 기사도 특정 정당에 유리하게 편집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런데도 불편부당을 외쳐되며 근엄한 표정을 짓는 것이 가당찮다는 생각이다. 신문사 입장에서 정치적 지지까지 표명한다는 것은 엄청 부담스러운 일일 것이다. 정치권력과의 껄끄러운 관계나 독자들의 반발 등이 충분히 예상되기 때문이다. (물론 정치권력의 압력에 대한 위협은 거의 사라졌다고 본다. 지금도 열심히 트집잡고 욕하고 있지만 잘만 살고 있지 않는가^^;)


결국 지금도 암묵적으로 보이는 신문들의 당파성을 드러내는 것은 분명 그네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부담은 당연히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다. 한쪽으로는 자기 입맛대로 세상을 재단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불편부당을 외치는 어정쩡한 포지셔닝은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다. 신문사가 이런 어정쩡한 입장이다 보니 글을 쓰는 기고자들이나 기자지망생이나 일반 독자까지도 갈피를 못잡고 덩달아 헷갈리고 있는 실정이다. 보통 언론개혁하면 공정보도와 일정정도의 기계적 중립을 회복하기 위한 시도라고 정의 되지만, 나는 선명한 정치색을 밝히는 것도 충분히 언론개혁의 목표가 충분히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불편부당에 대한 두 가지 태도가 언론개혁의 목표 설정까지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미 충분히 색깔을 드러내고 있는 마당에 그런 상징적인 조치가 무슨 실효성을 가질 수 있겠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또한 설령 정치적 지지를 드러낸들 그것이 사실 보도를 해야할 부분에서의 왜곡을 정당화 할 수 있다는 지적 또한 타당하다. 언론은 객관적일수는 없더라도 공정해야 한다는 당위적 목표도 맞는 말이다. 이런 반론을 접수하다보면 나의 주장이 언뜻 쉬워 보이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제 속셈은 적당히 감추고 공정한 척 하는 지금의 언론 풍토에서 차라리 자신이 편파적임을 드러내는 대신 반대자의 의견을 경청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보는 것에 대한 바람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건 우리 시민사회의 성숙과 더불어 그 실현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에서 쉬운 듯하면서도 어렵다. (딴지일보의 레토릭인 “우리는 편파적이다, 그러나 편파적이 되는 과정은 공정하다”가 자꾸 맴돈다^^)


불편부당의 문제는 언론자유와 공익의무간의 문제로 바꿔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신문사의 눈에 맞는 기사를 선택하고 사설과 칼럼란을 채우는 것은 그네들의 자유다. 그러나 여기서 독자들에게 사실을 기반으로 한 올바른 가치 판단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공익의무와 배치되게 된다. 그러나 이것 중에 양자택일하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다. 신문사의 성격이 영리추구와 공익목적 중간 어딘가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언론 자유는 무제한의 자유가 아니라 공익의무를 지닌 제한된 자유라는 것도 확실하다.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주는 언론 본연의 자세에 충실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언론 자유라는 명목의 갖은 특혜를 주는 ‘계약적 관계’일 따름이다. 언론의 자유는 다른 모든 부문에서의 자유와 마찬가지로 책무가 따른다.


불편부당을 가지고 너무 시간을 끄는 것 같아 편집권에 대한 것으로 넘어갔다. 사실 ‘편집권=경영권’인가에 대해서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만장일치로 나왔다. 서구의 언론사들이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사주가 영리적 목적으로 신문 지면을 마음껏 재편할 수 있는 우리의 구조에서는 부적절한 등식이라는 데 생각이 모였다. 미국의 경우 편집권이라는 개념이 별로 없고 재산권이나 소유권과 연계하여 언론자유권이나 편집권을 발행인, 소유주에게 귀속되는 것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식 자유언론관을 우리나라에서 주장하는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미국 언론의 편집기능의 자율성이 무척 잘 보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경영자는 일반적인 편집방침을 정할 뿐 개개의 편집업무는 편집진의 자율적 결정에 맡겨진다고 한다. (이에 대한 내용은 관훈저널 2001년 가을호에 실린 부산대 신방과 임영호 교수의 ‘언론자유와 편집권’을 참고했다)


편집권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나누다가 첫째마당에서 시간을 너무 소비한 나머지 둘째마당에 대한 논의를 서둘러 진행했다. 광고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신문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나는 지난날에는 언론이 정치권력에 예속되어 많은 폐해를 나았다면 지금은 경제권력과의 불의의 동맹을 맺고 있는 것이 더 큰 일이라는 문제제기를 했다. 얼치기 경영학도이다 보니 아직 경제현상의 왜곡을 읽어 낼만한 눈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진위 여부를 가릴만큼의 내공이 없기 때문에 일단은 계속 속아주고 있는 실정이지만 말이다.^^; 진중권의 다음과 같은 지적이 무척이나 설득력 있다.


언론의 왜곡보도는 주로 정치면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정치면의 왜곡보다 더 심각한 게 경제면의 왜곡보도다. 정치 보도의 왜곡은 대중의 관심을 끌지만, 경제 보도의 왜곡은 관심을 끌기도 어렵고 워낙 전문적인 문제라 웬만큼 식견이 있지 않으면 짚어내기도 힘들다.

- 진중권, [언론 ‘경제적 수구성’의 위험], 경향신문 2003년 6월 19일


경제권력에 휘둘리는 신문을 고민하다가 지난날 신문의 부끄러운 모습이 면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아직도 변변한 사죄의 말 한마디 없다는 친일 행적이나 독재 찬양의 기억들... 아마도 지난날의 과오를 깨끗이 털어 넣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지 않는 한 일부 언론에게 매서운 눈초리를 보내고 심지어는 저주를 퍼붓는 광경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이기적 함수를 가진 인간은 자신에게 손해를 끼친 것에 대해서는 놀라운 기억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 손해가 부도덕한 수단과 방법으로 자행된 것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나같이 별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마저도 지난날의 더러운 과거가 영 마뜩지 않다. 물론 서슬 퍼런 칼날이 두려워 엎드려서 부끄러운 짓을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심 어린 사죄만이 재생산되는 분노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길임을 깨달아야 한다. 나같이 소심한 사람은 진솔한 사죄가 있다면 다 덮어줄 용의가 얼마든지 있다.^^;


어느덧 시간이 훌쩍 흘러 세미나를 하고 있던 교양관의 불이 꺼져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저런 말들이 쏟아졌지만 정리하는 의미에서 언론개혁에 대한 짤막한 발언들을 해보기로 했다. 소유지분 제한이나 신문공동판매, 대안매체 생성과 참여 등의 대안들이 나왔다. 현실적 막막함 때문에 원론적 수준의 이야기들이 나오기는 했지만 언론의 문제가 조금씩이라도 해결되었으면 하는 바람은 한결 같았다. 나는 마지막 발언에서 의회주의자의 면모(?)를 과시했다. 시민의식 개혁도 필요하겠지만 언론개혁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수반될 법과 제도의 개정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국 의회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실상 민주주의 사회의 사회문제는 상당수가 궁극적으로 의회권력과 연결되어 버린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러나 나의 의회주의적 열망과는 달리 우리 국회 현실은 너무나 열악하고 절망스럽기까지 한 것이 사실이다.^^;


“진리와 허위가 대결하게 하라. 자유롭고 공개된 대결에서 진리가 불리한 편에 놓이는 것을 본 사람이 있느냐.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발할 수 있게 하라. 그러면 진리의 편이 반드시 승리하고 생존한다. 허위와 불건전은 ‘공개된 자유시장’에서 다투다가 마침내는 패배하리라. 권력은 이러한 선악의 싸움에 일절 개입하지 말라. 설혹 허위가 일시적으로 득세하는 일이 있더라도 선악과 진위가 자유롭게 싸워간다면 마침내 선과 진이 '자가교정 과정'을 거쳐 궁극적인 승리를 얻게 되리라.”

- 존 밀턴 1644년 [아레오파지티카(Areopagitica)]


나는 존 밀턴과 같은 순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겠다. 내가 믿는 것이 선이고 참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다는 이유도 있지만, 승리에 대한 불신도 한 몫 했으리라. 허위의 낮이 뜨겁게 펼쳐지는 데 진리의 갓밝이(여명)를 기다린다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하다 못해 해거름(석양)조차도 잘 안 보이는데 언제 밤을 지나 새벽녘을 맞이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물론 일부 언론들의 허위의 결정체로 몰아붙이는 것은 조금 지나친 처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선과 악의 대결 같은 뉘앙스를 풍기며 부시(Bush)스러운(?) 도식을 그려보는 것은 그만큼 우리 언론환경이 구질구질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뉴욕타임스의 창건자 아돌프 옥스는 1861년 8월 16일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외친다. “뉴욕타임스의 목적은 어느 일방을 두려워 하거나 어느 한쪽에 특혜를 주지도 않고, 정당이나 분파 또 어떤 이익집단에도 구애받지 않으면서, 뉴스를 불편부당하게 전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공공의 관심사항들이 모두 논의되는 광장이 되기 위해 다양한 견해가 반영되는 지적인 토론을 이끌어내겠다는 다짐입니다.” Without fear or favor... 두려움도 없고 그렇다고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객관적인 보도를 하겠다는 뉴욕타임스의 구호가 그들의 세계 최고의 신문의 위치에 서게 만들었다. 물론 모두를 납득시키는 공정하고 정확한 보도를 하기란 힘들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 가리워진 길을 가려는 언론인과 언론사들이 대접받는 세상이 오리라 낙관한다.


[신문읽기의 혁명]을 가지고 세미나를 한다고 하니 한 선배께서 옛날(97년에 초판이 나왔음)에 나왔던 이 책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이 문제라며 푸념하셨다.^^ 그러나 조금씩 달라지고 있고 앞으로 바뀌어 가리라 생각한다. 가디언의 편집국장이자 사주였던 찰스 스콧은 “해석(혹은 주석註釋)은 자유지만, 사실은 신성하다”고 했다. 왜곡을 마시고 불공정을 안주 삼는 그대들에게 바란다. “그대들의 맘에 안 드는 해석을 존중한다. 그러나 제발 사실만은 건드리지 마시라. 그대들에게 사실 자체를 건드릴 자유는 없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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