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한 친구가 교과서였던가, 공책 표지에 떡 하니 떡 하니 이렇게 써놓은 것을 보고 크게 놀란 적이 있다. “자유, 평등, 축구”... 축구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외국의 축구 선수와 동향까지 줄줄 꿰고 있었던 그 친구로서는 프랑스 대혁명 이념의 밀도만큼 축구를 사랑한다는 것을 밝히고 싶었을 것이다. 내 자신은 비록 축구는 스포츠 민족주의의 대표주자에다가 남성주의, 집단주의의 원흉이 아니겠냐며 딴지 걸면서도 그 친구의 열정을 존중했다. 물론 마음 한구석의 불편함은 감출 수 없지만 말이다. 기억은 안나지만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자유, 평등이랑 축구 따위가 동급이 될 수 있단 말인가’라고 투덜거렸을 것이다.


지난 한일 월드컵 때 한국과 터키의 3,4위전 표가 우연찮게 생겼지만 별로 흥미가 없던 터라 대구로 내려가서 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면 경악하는 친구들이 한 둘이 아니다. 농담 삼아 미친놈 소리도 좀 듣고,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는 너는 남자도 아니라는 무시무시한 낙인도 찍힌다.^^; 살다보면 이렇게 완연한 소수파가 되어 여기저기 구박을 받는 경우가 누구나 몇 번씩은 있게 마련이다. 많은 사람들이 부대껴 사는 세상에 많은 사람만큼이나 많은 생각이 있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다.


나는 그 누구도 자기와 다르다고 해서 함부로 무시하고 외면할 위치에 오르지 못한다는 인식론적 기초를 세우려고 노력한다. 가령 나는 조선일보가 너무나 싫고 거기서 기생하는 인간들을 혐오하지만, 조선일보가 구독자 1위를 자랑하고 있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 신문지의 독자들을 존중한다. 비록 그 신문지의 독자들이 관성에 젖었음을 타박하고 그 신문지의 상도덕이 떨어진 사기행각을 규탄하지만 그 정도와 범위는 얼마만큼이 되어야 할지는 아직 명확히 잘 모르겠다.


세상에는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그것들을 철저히 인정해주어야 하는 것도 나의 의무이다. 내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이해는 못해도 인정은 해준다”는 참 지키기 어렵다. 내가 싫은 것에 대해 더욱 구박하고 싶고 욕하고 싶어지는 나의 옹졸함이 부끄럽다. 언젠가 학원 국어 선생님이 던져준 “너가 어떤 조직을 위해 무슨 일을 하려거든 남의 것을 무시하는 버릇을 버려야 한다”는 충고는 나에게는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어쩌면 한참기간 유통기한이 지속될 방부제가 가득 들은 충고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사람에게 한 움큼씩 존재하는 서로 다른 얼굴의 열정이라는 녀석이 ‘당연히’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좀 더 다양한 열정들이 서로 경쟁하고 연대하는 풍토에서 열정이 식지 않는 좀 더 살맛 나는 세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것을 “틀렸다”고 몰아세우기는 쉽지만 그저 “다른” 것으로 존중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다수가 가는 길을 가지 않는다고 틀린 것이 아니라는 당위적 목표와는 별개로 다수가 실천하는 것이 진리라고 여겨지는 광경이 많이 목격된다. 그러나 이걸 게거품 물고 질책할 것도 없는 것이 원래 소수파가 불편한 점들이 많지만 또한 장점들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요즘 들어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같은 날라리 소수파는 늘 다수파가 되기를 원한다. 민주주의 원리 하에서는 소수파는 그래도 조금은 더 불편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이 고안한 민주주의는 생산적이고 합리적인 제도다. 다수의 지혜를 모아 절제된 권력을 행사한다면 말이다. 합법적인 방식에 의해 다수표를 획득한 쪽이 정해진 일정 기간 동안 지배력을 행사하고, 소수표를 던졌던 이들도 지도자의 권위와 지시에 따르고 일정 정도의 책임을 공유하는 것은 거래비용도 줄이는 여러모로 효율적인 방식인 것이다. 민주주의는 결국 숫자싸움이고 남의 생각을 존중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내 편이 많아져서 내 의사가 좀 더 실현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도 인정을 외쳐대고, 균형감각을 떠받들다 보니 요즘은 뭐 하나 내 입장을 정하기가 쉽지 않다. 한쪽으로 밀어붙이는 나의 습성에 대한 비판을 너무 전폭적으로 수용한 탓인지 어떤 사안에 대한 나의 생각을 내놓는 일이 좀 더 힘들어졌다. 어쭙잖은 경계인 흉내도 아니지만 자꾸만 중간잡기로만 향하는 내 모습이 우습다. 귀가 얇은 내 천성도 있지만 이 쪽 가서 들으며 무릎을 치다가도, 저 쪽 가서 들으면 또 맞장구가 쳐진다. 교묘한 저울질의 끝은 대개가 중간 어디쯤으로 수렴해 버린다. 오래 생각할수록 상반된 대안의 장단점이 보이면서 적당한 타협에 급급한 모습이 부쩍 눈에 띈다.


크든 작든, 역사의 한편은 늘 ‘논평자들’의 차지다. 화사한 진보적/자유주의적 교양인인 그들은 ‘오늘의 가장 곤란한 문제’ 앞에선 늘 ‘객관적’이다. 논평자들의 관심은 문제나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나 문제의 해결에 대한 논평이다. 논평자들의 목적은 실은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논평자들의 논평은 언제나 같다. “뜻은 좋지만 방법에 문제가 있다.” 그 말의 실제는 이렇다. “나는 이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핑계로 방법상의 문제를 찾았다.”
- 김규항, [논평자들] 中, 씨네21 2001/08/22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도 논평자들의 대열에 합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긴 요즘 은연중에 나의 목표가 된 것이 세상을 세련되게 욕하는 내공을 쌓기 아닌가...^^; 게다가 더 끔찍한 것은 확신에 찬 논평을 내놓는 것도 아니라 한참이나 머뭇거리면서 조심스레 논평을 슬쩍 던져서 힘만 빠지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무지한 나로서는 이런 어정쩡한 포지셔닝을 취하는 것도 감지덕지인지 모른다. 대충 두 가지 원칙만 세운다면 말이다. 첫째, 나름대로 이상주의자적 기질이 다분하다고 자처하는 나이지만 지나친 현실주의에 매몰되어 다른 이들의 꿈을 현실론을 잣대로 폄훼하지는 않는지 늘 돌아볼 것이다. 둘째, 나의 논평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노력만큼이나 지식과 실천의 병행을 위해서도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다원화된 사회가 될수록 우리는 옳고/그름의 문제보다는 그저 다름의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경우가 늘어날 것이다. 옳고 그름은 판정을 내리기 쉽지만, 다름의 문제 앞에서는 선택의 자유를 움켜쥐고는 하염없이 고독해진다. 나는 열심히 배우기 바쁜 일개 학생에 불과하기 때문에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나의 균형은 결국 남의 입장에서는 또 하나의 편파적이고 자기본위의 주장일 뿐이다. 그러니 내 입맛을 찾기 위한 탐구를 조금은 어깨 펴고 해야겠다. 어차피 아무리 애를 써도 나는 절대 깔끔한 객관성과 담백한 평형감각이라는 이데아(idea)를 확보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사회적 균형이라는 것은 모두가 같은 균형된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사회적 균형이 생기는 게 아니에요. 어떤 놈은 왼쪽으로 끝까지 가고, 어떤 놈은 오른쪽으로 끝까지 가고, 또 어떤 놈은 중간에서 폼 잡고 앉아 가지고 야야야, 그러지 마... 그렇게 얘기하고 그래서 총합적으로 어떤 집단적 의사결정이 나타날 때 균형이 취해지는 거라고.
- 유시민, [딴지일보] 긴급출동 이너뷰 中, 2003.10.20



유시민의 말처럼 내 안의 균형을 열심히 잡아 어떤 생각을 내놓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의 다른 생각들과 서로 다투면서 전체적으로는 균형을 잡아나가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자유시장의 원리가 충분히 보장되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다. 그래야만 괜찮은 비주류가 대중성을 확보하는 유쾌한 풍경을 더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주류와 비주류가 고정된 것이 아닌 늘 서로 긴장하면서 교체되는 유동적인 사회는 다소간은 정신이 없지만 그만큼 더 재미날 것이다. 한 쪽은 계속 호의호식하고, 한 쪽은 계속 욕만 해대는 모습은 너무 불공평하지 않는가. 양팔저울은 좌우로 요동을 치다가도 언젠가는 제 위치를 찾아간다. 우리 개개인이 양팔저울이 될 필요는 없지만, 사회가 양팔저울의 기능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어야 할 것이다.  


“그 놈이 그 놈인 것을...”이라며 토라져서 눈을 샐쭉 흘기는 것으로 말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설령 거기서 거기이더라도 그 세부적인 차이점에 희망을 투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사소한 다름으로 분열되는 것도 안되겠지만 세심한 관찰력은 균형감각의 기본이다. 나의 발언은 결국 지극히 편파적이지만 그 과정만은 진실하고 합리적이어야겠다. 객관과 평형의 이데아는 불가능하지만 과정상의 엄격함과 성실함으로 충분히 만회할 수 있으리라. “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뭐...”라고 너스레를 떠는 것은 사적 인간관계에서야 어느 정도 통용되는 것이지, 사회적 관점에서는 바람직하지 못할 때가 많다.


불편부당(不偏不黨)을 내거는 이들일수록 더 치졸하게 편들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치열하게 고민해서 나온 결론을 가지고 당당하게 편파적으로 살자. 나도 누구처럼 인기가 많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한 구석에 있지만 설령 내 결정이 대중성과 거리가 멀더라도 너무 두려워하지 말자. 비주류의 구덩이에 있다며 내 코가 석자라며 역지사지(易地思之)에서 사고를 시작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는 말자. 이런 기본적인 다짐을 지키는 것만으로 이 세상살이가 조금 더 가슴 뛰게 만들 것이다. 게다가 귀가 얇은 나의 천성은 적당한 상쇄효과를 만들어 내어 ‘즐거운 편벽됨’을 만들어줄 것이다. - [憂弱]


이상적인 자유민주주의는 좌와 우의 균형 위에 위태롭게 서 있다. 달리 말하면 자유와 평등의 균형 위에 서 있다. 평등이 쇠약해질 때, 자유는 흔히 더 힘세고 사나운 사람들이 약하고 순한 사람들을 짓밟으며 제 이익을 멋대로 취할 수 있는 권리로 변질된다.

자유가 비실거릴 때, 평등은 흔히 다수의 횡포와 중우 정치로 가는 길을 닦는다. 인류 역사를 돌이켜보면, 자유에 대한 열망과 평등에 대한 열망은 거의 비슷한 정도로 인간의 유전자에 각인돼 있는 듯하다. 회색 지대에서 이 둘의 균형을 꾀하는 것이 좌우의 근본주의자들에게는 마땅치 않겠지만, 진, 선, 미는 바로 그 곳에 있다.
- 고종석, 오늘속으로(9월23일) 균형 中, 한국일보 2003년 09월 22일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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