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된 보수정당?

사회 2003. 11. 6. 02:04 |
1.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입문 초기에 국민적지지 기반이 있는 진보정당이 만들어지면 진보정당으로 돌아온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월간조선 1988년 12월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주대환이 쓴 [진보정당은 비판적 지지를 넘어설 수 있는가]를 참고했다)


본질적으로 저는 재야에서 운동할 때나 지금이나 우리 사회를 고쳐야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민주화 운동으로 빚어지는 사회갈등은 반드시 거쳐가야 하며 또 극복돼야 하는 것이지 결코 회피하거나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국민적 지지기반이 있는 진보정당이 출현하면 그 길을 택할 각오입니다. (중략)
지금의 정치구도는 독재와 민주세력의 공방전을 형성돼 있습니다. 우리는 독재의 긴 터널의 끝 부분에 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보수야당에서, 이 독재의 질곡에서 벗어나가 위한 공동 노력을 전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입니다. 정치가 정상적인 궤도에 들어서게 되면 진보정당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겁니다.



노 대통령의 이러한 말들을 보며, 어떤 이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색깔을 칠할 준비를 할 것이며, 어떤 이들은 말장난에 불과한 허구적 변명이라고 폄하할 것이다. 여하간 노 대통령이 그렇게 말했다면 나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의견을 내어놓을 것 같다. 나는 이 땅의 정치가 제정신을 찾으면 마음놓고 보수정당을 지지할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에서는 어설픈 개혁에 손짓하고, 극우의 난동에 불쾌감을 표시하며, 자유주의를 들먹이면서 사이비 보수들을 질책하는 것을 부득이 업으로 삼고 있다. (여기서 ‘개혁’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진보를 주창하는 입장에서는 개혁은 보수의 다른 표현이라고 구박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수적 개혁이냐, 진보적 개혁이냐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개혁은 기본적으로는 진보와 더 가까운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듯 싶다)


일말의 양심과 최소한의 역사의식, 그리고 고등학교 사회교과서 수준의 상식만 있다면 도저히 지금의 보수라는 이들의 손을 들어줄 수가 없기 때문에 당분간 이 어정쩡한 위치잡기(포지셔닝)에 내 자신조차 흔들리며 지낼 것 같다. 이는 사상의 자유시장을 옹호해야하는 자유주의의 얼굴, 인민주권을 확립해야하는 민주주의의 얼굴은 내팽개치고 기득권이라는 가면으로 호객행위를 일삼는 이들을 보수주의자라고 여길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자유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만큼 그 가면의 두꺼움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처사다.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내 입맛에 맞게 해석한 것일 뿐,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자칭 보수는 보편적 상식의 경계를 벗어나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지점에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2.
고등학교 시절 나의 정치적 성향에 대한 평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극단적 진보’와 ‘은근한 보수’가 그것이다. 자칭 중도적 성향이라는 친구가 붙여준 극단적 진보라는 딱지는 기실 이념 인플레이션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이해찬의 교육개혁을 지지하고, 김대중 전대통령의 정책들을 비교적 지지했다는 이유만으로 극단적 진보라고 불리는 명백한 오류가 생각보다 크고 공고하게 퍼져있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뭐 이건 고등학생의 머리끼리 맞대면서 나올 수 있는 착오라고 너그러이 이해하고 넘어갈 일이다^^;). 아마도 양비론 같은 두루뭉술한 연막을 피우는 것보다는 자기 입맛을 당당히 드러내는 것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에 어떤 사안에 비교적 분명하게 호불호를 내놓다보니 오해가 생긴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재미난 것은 대학 새내기시절 내가 노무현 지지를 외쳤을 때는 그보다 덜한 화살을 맞았다는 점이다. 천만다행으로 이념의 인플레이션이 진정세에 들어갔고 거품도 많이 빠진 셈이다^^;)


은근한 보수라는 칭호는 일면 나에 대한 과도한 기대에 따른 실망감 표출의 일부이다. 철없던 시절 좋은 말이라면 여기저기 잘도 따와서 조합을 그럭저럭 해내다 보니 본의 아니게 나를 잘못 해석하게 만든 내 책임이기도 하다. 내가 원인제공자면서도 그 때는 은근한 보수를 욕이라고 생각하고 기분 나빠했던 것 같기도 하다. 말은 그럴듯한데 소심한데다가 행동력이 없다보니 입만 나불거리는 보수쟁이로 낙인찍혔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내 생활태도가 지극히 모범생적 가치관에 충실했고, 진취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진중함에 대한 탐구가 나를 답답하고 고지식한 보수주의자로 비춰지게 만들었다고 평가된다. 이에 대한 자각으로 고등학교 중반 이후에는 도덕적 결벽증 같은 것들을 많이 걷어내고 ‘타락 익구’ 같은 새로운 칭호들을 달갑게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옛 친구들이 나를 보는 틀은 고루한 원칙주의자이다(아직도 기억하는 것은 국어 교과서에 ‘고답적(高踏的)’이라는 단어가 나왔는데 이건 너에게 딱 맞는 어휘라며 감격에 찬 눈망울로 목에 힘주며 말하던 친한 친구의 그 벅찬 표정이다^^;).


극단적 진보는 분명한 오독이지만, 은근한 보수는 꽤 들어맞는 구석이 있는 해석이다. 은근한 보수라는 레토릭이 ‘생각의 진보성과 몸의 보수성과의 괴리’라는 뜻빛깔(뉘앙스)을 풍기지만 않는다면 제법 긍정적인 의미 부여를 해볼 만도 하다. 고등학교 시절 내 범생 이미지에 대한 모독쯤으로 치부했던 그 표현이 이제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재탄생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생각보다는 더 보수적인 사람이라는 깨달음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의 끈을 놓지 않고 왼쪽을 경청하는 겸손한 보수에 대한 목마름이다. 얼마 전 고안해 낸 ‘날라리 우파’라는 개념도 결국 은근한 진보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3.
앞에서 한국 정치가 바로잡히면 보수정당으로 갈 수도 있음을 내비쳤는데, 또 한편으로는 꽤 개혁적인 면모도 있다. 보수동네의 단골메뉴인 공동체를 위한 헌신, 희생이나 애국주의, 민족주의 꾸러미들이 개인주의자를 자처하는 나로서는 영 마뜩지 않다. 또한 나는 군사주의를 거북해하는 것이 체화된 사람이며, 양성평등 문제에서는 조급증이 날 정도로 빨리 개선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런 언뜻 보이는 개혁, 진보로 통칭될만한 행위들에 대한 바람이 젊은 시절 잠깐 품어보는 것이 아니라 전생애를 거쳐서 꾸준히 추진해 나갈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아마도 역량이 부족한 나는 내 입맛에 맞는 몇 개를 확실히 공략하겠다는 전략을 은연중에 세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보수동네에서 거닐든, 개혁동네에서 노닥거리든 중요한 것은 극우 헤게모니를 부수는 것이다.


실상 극우 헤게모니를 해체하는 것은 진보의 몫이라기보다는 보수의 몫이 되어야 옳다. 왜냐면 한통속이라고 여겨져서 같은 취급받으면 쪽팔리고 열 받으니까 먼저 더 나서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칭 보수라는 이들은 극우적 질서를 안온하게 여기고, 극우동네의 제도적, 문화적 유산을 활용해서 한 몫 챙기려는 상도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있다. 이렇다보니 진보 세력이 개인의 자유 같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가치를 챙겨주고 있는 기막힌 풍경이다. 명색이 시장경제를 신봉한다는 이들이 이렇게 제 할 일도 못 찾다가는 시장의 냉혹한 법칙에 의해 퇴출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좀 가져보자. 아무리 물질적 풍요를 좋아하는 보수동네라고는 하지만 상도덕에 어긋나는 이윤을 추구하는 것은 극단주의 세력이나 할 짓이다.  


탈이념의 시대라고들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가치체계의 분류로서 보수, 진보의 구분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그러나 이분법의 대부(?) 플라톤 선생이 보면 좀 섭섭할 정도로 딱 부러지지 않고 짬뽕에다가 혼란스럽게 전개될 것이다.^^; 이런 곤란함에도 불구하고 진보와 보수는 여전히 삶의 양태를 바라보는 틀이다. 그렇다보니 요즘은 별로 인기 없다는 이 두 낱말 사이를 끊임없이 저울질하고 있다. 최근 열린우리당이 창당되었다. 신당은 민주당보다는 개혁적이겠지만, 개혁당보다는 구질구질할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정당에 애정의 눈길을 보내는 것은 그나마 제대로 된 보수정당으로 달려갈 만한 가능성이 가장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구차하지만 이렇게 세심한 차이에 투자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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