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다양성의 위대함을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 반대자를 접할 때도 불편한 것은 사실이지만 저주스럽거나 구역질나지는 않는다. 마음 한 구석의 응어리를 어찌할 수 없다고 해도 적어도 표정이 일그러지거나 하지는 않도록 노력한다. 내가 놓치고 있는 부분을 그네들이 잘 찾아낼 수도 있고, 내가 어쩌다보니 잘못 생각하고 그릇된 판단을 내리고 있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방식이 옳고 재미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유지만, 마주보고 있는 저 친구의 세계관과 행동양식 또한 충분히 존중하고 인정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다.


한편으로 나는 당파성의 막강함도 실감한다. 제 잇속을 차리려는 이기적 함수를 가진 인간이 대다수인 세상이라면 입맛에 맞는 사람들이 모여 파당을 짓고 자기 몫의 확장을 위해 노력하게 된다. 인간이란 시리도록 현실적이고 사실판단에 약삭빠른 동물 같으면서도 지극히 추상적 가치에 목매기도 하고 저마다의 이상을 품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대의나 시대적 과제를 끌어오면서 자신의 무리에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역사는 진보하고 사회는 윤택해졌다.


다양성과 당파성은 늘 오묘한 긴장관계를 그린다. 끊임없이 균형점을 찾아가는 양팔저울과 같으면서도 그 균형점의 이데아는 끝내 찾지 못하고 마는 그 무엇이다. 나 또한 이 균형점의 이데아를 모색하면서 바지런히 여기저기 주워들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내가 딛고 있는 곳의 내 당파성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다양성을 즐거이 받아들일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해본다. 내가 남들보다 코딱지만큼 더 열심히 공부하거나 노력하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논리나 어떤 성과물로 상대방을 이기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다원주의는 내 당파성과 권력의지를 표현하고자 하는 참 좋은 토양이다.


2.
내가 무늬만 개혁적인 사람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요즘 들어 개혁 레토릭의 험난함을 절감하고 있다. 개혁세력은 수적으로 다수일지는 몰라도 고종석님의 표현을 빌리면 문화적 소수파이며, 내가 보기에 정치적 소수파에 불과하다. 그러나 다수파는 오히려 단결하고 있고, (한나라당과 잔류 민주당, 자민련의 손잡기나 악의적 언론의 짝짜꿍이나 수구세력의 총궐기나...) 소수파는 열심히 분열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늘 지울 수 없이 따라다닌다.


물론 개혁진보세력의 분열은 그네들의 치열함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지금은 치열함과 고결함의 미덕보다는 전략전술과 광범위한 양보들을 통해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나 같이 소심하고 줏대 없는 사람들은 자꾸 지는 모습만 보이고 갈라서 버리면 상처입고 잠수를 타버릴 유인이 강해진다(물론 살다보면 지는 싸움을 해야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지는 싸움 만들고서 제 몸 상할 필요 없다는 것이 합리적 경제인의 선택이라면 될 수 있는 한 이기는 싸움을 하기 위해 준비를 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다시 붙잡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포괄적으로 본 ‘우리’의 궁극적 승리에 대한 신념은 변함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도정에서 표출되는 갈등상은 승리의 환호를 자꾸 흐릿하게 한다.


이런 어지러움 속에서 대강 입장 정리가 되어 가는 것 같다. 친노 집단, 혹은 노빠들의 소굴이라는 정치칼럼 사이트 서프라이즈(www.seoprise.com)와 같은 열성적 지지자들의 존재가 참 고맙다. 너무나 합당하고 근사한 비판으로 속이 따끔거리게 해주는 개혁세력들의 의견을 경청하지만 미친놈 소리 들어가며 호위하는 서프족을 미워할 수 없다. 물론 나와 당파성이 상당부분 맞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나 같은 날라리 지지자는 열성적 지지자들에게 진 빚이 미안할 뿐, 그들의 투자 수익률이 낮다고 질책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3.
어떠한 사안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는 것은 그것이 사소한 일일지라도 참 어렵고 떨리는 일이다. 간혹 내가 서있던 곳이 부실한 논거로 적당히 때운 곳이라 무너지기도 할 것이다. 게다가 무식한 내가 무엇을 얼마나 알기에 감히 발언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도 세다. 그러나 모르면 닥치고 있어야 한다는 청년기 비트겐슈타인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면 우리는 아마 거의 다 침묵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나는 그보다는 논쟁의 시행착오법(trial and error method)이 더 살림살이에 보탬이 될 것 같다.


배우는 학생 입장에서는 양쪽의 입장을 부지런히 경청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특정 동네의 우물이 아닌 다양성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것들 중에 취사선택해서 자신의 당파성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 같이 귀가 얇은 녀석은 금세 혼란에 빠지기 일쑤다. 가령 신자유주의 논쟁만 해도 WTO는 전세계 민중을 착취하는 미국식 세계화에 불과하다는 입장과 WTO가 실현할 자유무역과 다자통상체제로 말미암은 경제적 다극화가 미국화를 막고 우리가 살 길이라는 입장과의 간극은 너무나 벌어져 있다보니 양다리를 걸치기도 여간 힘들다.


세상에 미국의 네오콘같은 사명감에 불타는 무식쟁이들만 있다면야 옥석을 가리기 쉽겠지만, 대개는 나름대로의 논리를 가지고 맞서니까 무식한 학생 입장에서는 새우등만 터지는 꼴이다. 그래도 부지런히 새우등이 터지다보면 가끔 콩고물도 떨어지고 그러겠지라는 희망을 안고 오늘도 싸움 구경에 눈이 둥그래지는 수밖에.^^ 백가쟁명 백화제방(百家爭鳴 百花齊放)의 시대에 사는 것은 확실히 정신 없고 골치 아픈 일이기는 하지만 그 곱절로 흥겹고 신나는 일이다. 다양성과 당파성의 긴장 속에 내 새우등은 늘 조마조마하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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