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집 만지작거리기

잡록 2003. 12. 5. 07:10 |
양성평등을 평생 믿고 실천할 것이라며 호언장담하는 나이지만 며칠 전 있었던 몇 마디 대화에서 내 신념을 뒤흔드는 작은 소동이 있었다.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어느 동아리 친구를 만나 잠깐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나는 뜬금없이 다음 동아리 대표는 누가 될 것인지 물었다. (아마도 이제 02학번이라 일선에서 물러날 때가 되었으니 차기는 누가 이끄느냐는 정도의 질문이었던 것 같다)


친구왈 “아직 정하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남자로 할거야.”
익구왈 “아니 왜?”
친구왈 “대표는 밤새도록 술을 마실 수 있어야 하거든. 여자는 그렇게 못하니까.”
익구왈 “푸하하 그런 건가?^^;”


당시의 광경이 정확히 기억이 안나지만 그냥 웃고 넘겼던 것 같다. 전 같으면 친구의 발언이 부당하다며 목청을 높였을지도 모르는 나이지만 이상하게도 ‘뭐 그럴 수도 있겠군’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왜 남자만이 밤새도록 술을 마실 수 있게 되는 환경이 조성되었는지, 아니 애시당초 왜 밤새도록 술을 마시는 문화가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최소한 평소 자주 하는 말인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걸”이라는 말이라도 할 수 있었으련만 그러지 않았다.


또 얼마 전에 고등학교 친구들과의 엠티를 논의하면서 준비하는 남자친구들이 여자친구들의 참여율이 저조한 것을 두고 여자들은 ‘끼리끼리 논다’ ‘자기 일만 알고 희생할 줄 모른다’ 하는 등의 푸념들이 쏟아졌다. 나는 평소처럼 적극적으로 방어하기보다는 암묵적 동조를 했다. 나 또한 저마다 바쁜 일 제쳐놓고 짬을 내는 엠티에 참여를 안해주는 여학우들이 무심하다며 투덜댔다. 이러한 사건들을 접하면서 나는 내가 믿는 만큼의 굳건한 양성평등주의자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로지 남성적 속성만을 찬양하는 저속한 마초이즘에 부역할 생각도 없지만 말이다. 내 소심한 성격으로는 악성 마초가 될 가능성이 별로 없지 않는가^^;)


마초의 혐의를 애써 걷어내고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해봤다. 대학물을 제법 먹으며 내 허접한 논리들도 많이 갈고 닦았고, 내 서툰 인식도 많이 교정했다. 전열을 정비한 만큼 사기도 충분한데도 싸움판에 들어가기는 망설여진다. 별로 사교적이지 못한 내가 그나마 알고 지내는 고마운 사람들과 이런저런 관점의 차이로 싸우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게다. 아는 사람과 싸우기는 자꾸만 고통스러워진다. 친한 사이인데도 그저 그런 이야기로 시간을 때우고 있다며 불평하는 한 편에는, 나란 사람과 교류해주는 존재들에게 칼을 겨누고 싶지 않아 칼집만 만지작거리는 내가 있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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