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로 받아들이기

잡록 2004. 1. 20. 04:06 |
총학생회장의 한총련 의장 출마에 우려를 표합니다.

발신: 37대 경영대 단과대 운영위원회
수신: 37대 중앙운영위원회

  기실 학생운동이라는 단어는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 애매한 점에도 불구하고 우리 37대 경영대 학생회와 단운위는 이른바 비운동권이라 스스로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존 학생운동세력에서 주창하는 좁은 의미의 ‘운동’이 오늘날 대학사회의 지향점이 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그다지 동의하지 않습니다.

  유지훈 총학생회장의 한총련 의장 출마 결의와 당찬 포부에는 정파적 이해관계를 떠나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그러나 이미 숱한 학내 구성원들이 지적했듯이 총학생회 선거 기간에 충분한 학우들과의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다시금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총학 선거 이후에 결의를 하셨다는 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학생운동 단체의 장을 맡아서 학내 문제가 소홀해지지 않을까 우려하는 학우들이 많은 만큼 충분한 해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학우들은 진취적이지 못한 어리석은 이들이 아니라, 민족고대 총학생회를 책임지는 분으로써 기꺼이 품고 가야할 소중한 학우일 것입니다.

  우리는 보다 근본적으로는 한총련이 주장하는 기치들에 동감하지 않습니다. 시장의 논리나 신자유주의 같은 사회과학적 용어의 모호함은 논외로 치더라도, WTO 반대 같은 구호에 우리는 선뜻 동의할 수 없습니다. 가령 농산물 시장 개방 같은 부분에서는 너무나 가슴 아프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정책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공감하지만 다자통상체제의 큰 틀을 결국 거스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다수 평범한 우리 경영학도들 또한 인간다운 삶을 고민하는 같은 학생이며, 급변하는 경제환경 속에서 우리나라의 진로를 모색하는 학생이라는 것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학생회가 어떤 정치 철학을 가진다면 그건 오로지 자유주의, 다원주의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선거를 통해 어떤 정치적 견해를 가진 선본이 선출되어 그 지향점에 맞는 사업들을 진행하게 나가는 것을 비판할 생각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 생각에 비추어 입장을 밝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총련 의장 출마 과정의 문제점과 정파적 입장 차이에 비추어 유지훈 총학생회장의 한총련 의장 출마에 대해 적지 않은 우려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자의 이유는 이미 많은 학내구성원들이 지적하셨지만, 후자의 이유는 지난 총학 선거 때에 나타난 경영대 학우들의 의사에 기반한 경영대 내부의 의견입니다. 지난 총학 선거에서 고대 학우들의 가장 많은 지지를 얻었고, 사실상 저희가 한총련 의장 결의를 저지할만한 권한이 주어진 것도 아니라 이런 의견 밝히는 것이 무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학우들의 의사를 수렴할 위치에 있는 총학생회장께 저희의 우려를 분명히 전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작년 한해 구호만 요란했던 한총련 개혁의 성과물에 대해 의구심을 표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변화를 위한 노력이 없다면, 그 선의에도 불구하고 학생운동은 쇠락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봅니다.

  여러 입장 차이가 엄존함에도 불구하고 같은 학생회 일꾼으로서 총학생회장의 노고에 격려를 보냅니다. 아무쪼록 우리의 이러한 세세한 우려를 철학의 빈곤과 배제의 논리를 넘어서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또한 경영대에 대한 고민 게을리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위의 글은 고려대학교 37대 중앙운영위원회에 37대 경영대 단과대 운영위원회 명의로 올린 한 장짜리 성명서의 전문이다. 총학생회장은 한총련 의장 출마에 대한 학우들의 의견을 수렴한기 위해 과반 학생회나 각 단과대학 집행부 회의 등에서 간담회를 가지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해왔다. (그러나 슬프게도 고대 내의 상당수 단과대가 집행부 회의를 열만큼 사람이 많지도, 과반 학생회 간담회를 가질 만큼 조직되어 있지도 않다) 여하간 자꾸 찾아오고 싶다는 사람 모른척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단운위를 해서 새터 등을 논의하는 와중에 우리의 입장을 간단히 정리해서 제출하는 것으로 대체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주재하는 회의가 하도 너무 세세하고 지루하게 이어진다는 단운위원들의 볼멘 소리를 수렴해서 성명서의 초안을 들고 논의를 나눠봤다. 한 친구가 이 글을 이렇게 평했다. “경영대스러운 글이네요. 반대를 하되 크게 목소리를 내기 보다는 약간 돌려서 말하는 식으로...^^;” 여하간 별다른 이견 없이 초안에서 약간 윤색을 해서 중운위 단대별 보고 시간에 성명서를 발제했다.


성명서의 내용을 얼추 다 말한 나는 결국 소심함을 드러내고 말았다. “우리의 ‘우려’는 ‘격려’의 다른 이름이 될 수도 있으니 선의로 해석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여하간 내 이런 소심함 덕분이었는지 경영대의 입장을 완곡하게 밝히면서도 큰 마찰 없이 넘어갔던 것 같다. 총학생회장님도 전자의 지적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후자의 지적의 적합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기본적으로 100% 동의가 있는 학생회 사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여운을 남겼다. 나 또한 경영대 학우들에게는 당시 총학 선본의 지지가 낮았지만, 고대 전체의 의사의 총합으로 된 총학생회장인만큼 그 권위를 인정한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미 한해 사업을 진행할 권한이 주어졌는데 굳이 학생운동 단체의 수장으로 나설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그래서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원칙(?)을 깨고 한 말씀 올렸던 것이다.^^;


총학생회장의 간단한 해명이 있으신 후 동아리연합회장님께서 한 말씀 하셨다. “저는 자유주의자는 아닙니다만, 사상의 자유라는 측면을 이야기하고 싶군요. 자신이 가진 생각 때문에 탄압 받고,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이 땅의 현실을 지적하고 싶습니다”정도가 되었다. 나 또한 국가보안법은 위헌의 소지가 다분하며, 불필요한 법이라고 생각한다. 자유주의자를 칭하는 사람으로서 사상의 자유시장이 세워지는 것을 누구보다 고대한다. 실상 사이비 자유주의자가 아닌 이상 국가보안법에 찬동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법의 개폐에 관한 것은 국회 소관인 만큼 의회권력을 교체하지 않고서는 어찌 할 방도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열린우리당이 국가보안법 개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는 만큼 그 정당의 성공을 기원할 뿐이다.


얼마 전 내 잡글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확실한 감정 한가지가 “세상은 생각보다 더 더럽다”라고 말했다. 그 느낌과 더불어 요즘 점점 더 커지는 것은 “선의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에 대한 탄식이다. 자칭 진보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는 특히나 더 그렇다. 저들의 선의를 충분히 이해하고자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현실적 방법론 차이에 대한 거리감과 전략상의 패착에 대한 불만, 은밀히 감추고 있는 권력욕에 대한 비판이 뒤섞이면서 도통 저들의 선의를 순수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 이건 아마 한나라당이 노무현 대통령의 선의를 코딱지만큼도 받아들이지 않고, 행동 하나하나의 배후 음모를 캐내려는 것과 비슷한 심보일 게다.^^; 그걸 애써 부인할 생각은 없다.


학생운동이 해체되고 있다는 진단과 더불어 나오는 것이 바로 바닥을 쳤다는 분석이다.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생운동단체 내부의 자성과 혁신이 미비하다면 아마 바닥에서 지하로 파들어가는 일만이 남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학생운동진영이 맞서 싸우던 기득권세력들보다 먼저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무척 안타까운 일이지만 말이다(물론 이네들의 노력 덕분에 오늘날 기득권도 갈수록 약화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제 학생회 일꾼 생활도 3년 차에 접어들었건만... 내가 배운 것이 있다면 남을 불신하는 법이고, 남의 선의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세가 아닐까? 그것을 마치 세심한 분석과 치밀한 논리로 합리적 비판을 한다고 둘러대면서도 말이다. 선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는 비감(悲感)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모르겠다. 또 남의 선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나의 선의는 인정해달라고 호소할 자격이 있을까라는 물음도 던져본다. 난 착한 사람이 되지는 못해도 적어도 못된 녀석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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