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가족들에 대해 무척 무심한 편이다. 친구들과는 곧잘 펼치는 대화마당도 가족들과는 좀처럼 펴 보일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몇 문장의 짤막한 대화들이나 지극히 사무적인 대화들을 나누기 일쑤이다. 동생과는 그래도 재미난 이야기 마당을 열어보기도 하지만 부모님과는 도통 그러지 않는다. “가족주의는 야만이다”라는 명제의 자세한 내막은 들여다보지 않고 그 날카로움에 매혹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제 멋대로 둘러대 본다.


그래도 소심한 모범생으로 학창시절 그럭저럭 마친 지난날 덕분인지 부모님과 나 사이는 은근한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듯하다. 때때로 개인주의적 신경질이 발동해서 다툴 때도 있다. 하지만 대개는 부모님은 내게 큰 간섭 없이 내 하고자 하는 데로 놔두셨고, 나 또한 웬만한 일들은 부모님과의 상의 없이 내 마음대로 결정한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마치 부모님으로부터 대단히 독립된 지위에 있는 듯 하지만 알바 하나 하지 않는 나는 재정적으로 부모님께 의존해 있다^^;)


여하간 엄마, 아빠와 교류가 부족한 점은 반성하고 있지만 억지로 소통의 절대량이나 밀도를 높이려고 노력을 하지는 않을 것 같다. 난 내게 주어진 문제를 풀어내고 고민을 키워내면서 알콩달콩 재미난 삶을 꾸려나가는 것으로 자식된 도리를 다할 생각이다. 자식을 향한 불필요한 근심걱정을 덜어주는 것은 소극적 의미에서의 효도가 충분히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못난 아들이지만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그 중에서 두 가지를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지극히 사소한 것이지만 내 인식의 기초에 보이지 않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장면1 - 초등학교 저학년 어느 날

나 - 한글에 대한 글짓기 한 거 있는 데 한 번 읽어봐 줘. (원고지 대여섯 장을 넘긴다)
엄마 - (조금 읽어보신 후)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언어이다”라는 말은 우리나라 국민이니까 하는 말이지.
나 - 아니야. 한글이 최고로 좋은 언어라고 세계에서 모두 인정했다구.
엄마 - 그런게 어디 있어. 외국 사람들은 자기 나라말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거지.
나 - 아니야 세계의 유명한 국어학자들도 다 한글이 훌륭하다고 했다니깐...
엄마 - 아무리 한글에 대한 글짓기라고 해서 한글에 대한 칭찬을 하는 건 좋은데... 무조건 한글은 세계 최고다라는 말만 써놓고 아무런 알맹이가 없는 거 같구나. 이것 가지고는  한글의 우수성을 입증할 수가 없거든.
나 - 그래도 원래 좋다는 걸 좋다고 말하는 걸 어떡해... (결국 작은 실랑이 끝에 엄마가 고쳐준 약간의 맞춤법을 제외하고는 그대로 제출함)


사실 한글에 대한 글짓기라는 숙제가 주어졌다면 숙제를 내준 사람의 의도는 아마도 한글에 대한 일방적인 찬양과 애정표현을 기대했으리라. 나는 그것에 충실하게 미사여구를 동원해 한글만세를 외쳤을 것이다. 그런데 엄마께서는 “한글이 세계 최고”라고 너무나 당연히 믿고 있는 나의 인식이 편견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해 주셨다. 엄마와의 대화에서 나의 공리(公理)를 무턱대고 큰소리로 외쳐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웠다.


장면2 - 중학교 1학년 어느 날

나 - 아빠, 오늘 학교 수학 선생님이 국산품 애용을 어찌나 강조하시던지...
아빠 - 물론 국산품 애용도 좋지만 그렇다고 남의 물건 안 쓰고 우리 것만을 사 쓸 수는 없잖니.
나 - 그래도 국산품 애용을 해야 무역수지도 좋아지고 나라경제로 발전하고 각종 좋은 결과가 있는 거 아닌가?
아빠 - 물론 그렇지. 하지만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겠다고 하면서... 남의 물건은 사지 않고, 어떻게 우리 물건만 사달라고 말할 수 있겠니. 그건 염치없는 행동이야. 무조건적인 국산품 애용은 장기적으로 수출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어.
나 - 안 그래도 무역적자라는 데 국산품 애용해서 잘 먹고 잘 살아야지.
아빠 - 분에 넘치는 사치로 인해 무역 적자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히 줄여야겠지. 하지만 국산품 애용만이 능사는 아니란다. 외국의 좋은 기술을 들여오려는 노력과 기업운영의 비용절감 등의 다양한 요소들이 그 나라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이지.


극치의 미학을 신봉하던 시절, 국산품 애용하자며 열변을 토하시던 수학 선생님에게 설득 당한 나는 외제는 나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이런 조악한 인식을 아빠께서는 차분하게 납득시켜 주셨다. 수출은 선이요, 수입은 악이라는 국산품 애용주의로 경도되기 직전인 나를 아빠께서는 자유 무역의 기본적인 원리를 꺼내서 수정해주셨다. 아빠와의 대화에서 내가 더 크게 감복했던 것은 이런 말씀을 하신 아빠께서 국산품 애용을 추구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지난 설 연휴에 엄마께서 친척들에게 돌릴 선물로 조그만 외제 주전자를 사자 아빠께서는 곧장 볼멘 소리를 내뱉으셨다. “국산도 좋은 거 많은데...”라면서 말이다. (그래도 당시에는 국산 수정펜은 거의 없던 시절인데 일제 수정펜이 쓰기 싫어서 여러 문구점을 돌아다니며 국산 수정펜을 찾아 헤맸던 내 노력이 반드시 못난 행동만은 아니었으리라^^)


비록 사소한 장면이었지만 이 두 가지가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어린 시절 푸욱 빠져있던 국수주의나 극단주의적 경향을 부모님의 영향으로 상당 부분 걷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어줍잖게나마 자유주의자를 자처할 수 있다면 그것의 절반 정도는 아마 부모님의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부모님께서는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장면의 교훈과 더불어 상당한 수준의 불개입 원칙으로 나를 존중해주셨기 때문이다. 이제 딴에는 어른이라며 부모님의 말씀에 귀기울이지 않고 지내고 있지만 여전히 부모님은 나란 녀석에게 큰 스승이시다. 앞으로 좀 더 살갑게 대해야 할 텐데 걱정이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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