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뇌 논쟁(?)

사회 2004.02.06 05:45 |
어느 아주 늦은 새벽에 한 친구와 메신저 상으로 대화를 나눴다. 그 친구도 다니는 대학의 반학생회장을 맡고 있는 터라 자연스레 ‘새터’(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이야기를 나눴다. (그 친구는 반일을 대표하는 자리 있는데 정확한 직함을 몰라서 반학생회장이라고 처리했다) 이 친구가 자칭 타칭으로 쓰는 별명이 있으니 ‘우군’이다. 우군은 ‘새맞이’(그 학교는 새터를 새맞이라고 불렀다)의 원칙이 있어야 한다고 고민했다. “내용 없이 무뇌한 새맞이가 정말 걱정스럽다”는 말을 덧붙였다.


실은 그 말을 듣고 뜨끔했다. 나도 그 무뇌의 혐의에서 그다지 자유롭지 못하니까 말이다. 2박 3일간의 일정은 자기 방사람들과 친해지기도 짧은 시간이라며, 이런저런 행사도 줄이고 어떤 새로운 시도도 해보지 않고 그저 예년의 프로그램들을 재탕하는 식으로 새터를 기획하고 있던 나도 갑자기 동병상련을 느꼈다. 나는 “원칙은커녕 최소한의 관심만이라도 있으면야 감지덕지지. 그 관심을 모아 총합을 대충 얼기설기 엮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고...”라고 궁색한 변명을 해봤다. 나의 변명은 이어졌다.


“그냥 선후배간의 첫 만남이고, 새내기들에게는 대학 생활의 첫 시작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원체 크니깐... 그것만으로도 새터의 의미는 그럭저럭 채워지고... 그냥 한바탕 질펀하게 잘 놀고 몇몇 사람 잘 만나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 아닐까? 실상 03학번 새터준비하는 친구들은 그냥 놀자판 새터라고 홍보해도 새터를 오려는 친구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며 볼멘 소리하는데 말이지...^^;”


우군은 갑자기 과반이 ‘진보적 자치 공동체’라는 것에 동감하냐고 물어왔다. 아마 새터 자료집 같은 것에 글을 쓰다가 그 문구를 집어넣느냐를 고민하던 중에 넌지시 물어온 것이라고 제멋대로 추측해본다. 여하간 우리의 대화는 이랬다.


익구 - 글쎄... 그럴 거창한 의미를 부여할 만한 과반들이 많이 남아 있기는 한건가?^^; 사실 내가 속한 단과대의 반은 그런 것을 이야기하기에 너무 황량하다보니...^^;

우군 - 허허. 오히려 ‘무너져 갈수록’ 그것을 잃어버리면 정말 끝장이란 걸 절감한단다.

익구 - 일단 '진보적 자치 공동체'에서 진보적이라고 붙일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일단 '다양한'이라고는 조심스레 붙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상 진보라는 것이 여러가지 의미가 있지만... 만약에 보수라는 것의 대립어로 쓰인다면 과반이 반드시 진보적 색채를 띨 필요는 없지... 그게 가능하지도 않을테고...

우군 - 아니. 그런 섬세한 의미의 진보 말고. 적어도 무뇌하지 않은-

익구 - 아 그렇다면 진보라는 단어보다는 '개성' 등의 단어들을 찾아 봐야하지 않을까...

우군 - 개성, 개성이라기 보다는...

익구 - 여하간 ‘개성’은 그냥 생각나길래 해본거고... 무뇌의 대립어로서 ‘진보’가 적절할지는 의문이라는 것이지... 차라리 ‘진지’면 모를까...^^;

우군 - 그 무뇌가 개인의 무뇌라면 그렇겠지만 집단의 무뇌라면 어떨까?

익구 - 집단의 무뇌가 개인의 무뇌의 총합을 넘어선 플러스 알파가 있다면 좀 더 고민해봐야겠지... 사실 그런 감이 없잖아 있고... 근데 근본적으로 집단의 무뇌라고 분명히 규정 내리기 힘든 세상이라는 데 가장 큰 문제가 있는 듯... 다원주의 사회에서 절대선, 절대악이 없는 이상 저마다의 논리를 가지고 세상을 인식하고 사는 데... 어떤 집단을 무뇌라고 지칭할 수 있을지 늘 조심스럽다니깐... 물론 치명적 도덕적 결함이 있어서 손가락질하기 쉬운 경우라면야 오죽 좋겠지만... 안 그런 경우가 많고... 집단의 무뇌가 뭔지도 잘 모르겠는데... 집단의 무뇌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고 그에 적절한 단어를 찾는 것이 어쩌면 너무 오바인지도 모르고... 이래서 낙관적 다원주의자인 나는 늘 회의주의와 짝짜꿍한다니깐...^^;

우군 - ᄏᄏ 무슨 말인지 알겠소. 공감하는 바이요.

익구 - 황당한 것은 위에 했던 말은 내 단골 레퍼토리라 지겹도록 반복하는 데도... 아직도 또 써먹을 여지가 무궁무진하다는 현실이지...^^;

우군 - 세상사는 건 과정이잖냐.

익구 - 과정이랑 성과물과의 균형을 잘 맞춰야겠지... 그 비율은 또 저마다의 몫이겠고... 에구에구 나도 제 잘난 멋에 사는 인간이라... 남들이 참 무뇌아스럽게 느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닌데... 남들이 다른 기준으로 나를 보면 저 놈 참 무뇌아구만... 이라는 소리를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늘 하려고 노력 중이지...


여하간 우리의 대화는 이쯤에서 대강 마무리된다. 어쩌다가 ‘무뇌 논쟁(?)’이 벌어졌지만 실은 참 어려운 문제다. 내 생각을 옳다고 믿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다른 사람도 자기 생각이 옳다고 믿는다면... 그래서 차이는 차이로만 끝나고 간극은 메워지지 않는다면...


역시 단골 골칫거리라 그런지 해법도 늘 비슷하다. 그래도 접점을 찾아가는 노력이 소중하다는 것, 소통의 어려움 때문에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해할 수 없는 세계관의 차이를 절감할 때는 어찌해야 하나? 맞부딪치는 생각 가운데 우열을 가려볼 수는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 다원주의를 주술처럼 외우며 팔짱만 끼며 여기도 맞고, 저기도 맞다며 황희 정승 흉내를 내볼까나?


상대방을 향해 무뇌아라고 손가락질 할 수 있는... 즉 우열을 가른다는 것은 너무 힘든 과제다. 나는 다만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팔리는 상품이 될 수 있는 자격요건에 대해 조금 말해볼 수 있을 뿐이다. 이런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내가 믿고 있는 바를 편파적으로 내뱉을 것이다. 그것이 사상의 자유시장의 상품이 될 수 있는지 늘 긴장하면서 말이다. 설령 내가 ‘무뇌아’ 소리를 듣더라도 말이다. - [憂弱]
Posted by 익구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