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의 사회과학적 용어가 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확연히 달라지게 된다. 오늘날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신자유주의도 그 중 하나다. 정말 신축성이 뛰어난 고무줄마냥 이 용어에 대한 해석은 엄청난 탄력성을 보여준다.^^; 유시민 선생의 “한 점의 오류도 없는 사상이나 단 한 톨의 진실도 담지 않은 사상은 없다”는 말을 믿는 나로서는 설령 신자유주의가 진보진영에서 외치는 것처럼 나쁜 점만 가득하다 할지라도 몇 톨의 진실을 줍기 위해 기웃거려볼 생각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신자유주의가 몇 톨의 진실만을 담고 있는 것으로 폄하되기는 힘들 것 같다. (사실 고작 한 두 톨 정도의 진실만을 담은 사상은 생산성이 너무 떨어지기 때문에 머지 않아 적실성을 잃고 퇴출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라질 운명이라도 잠시라도 제 목소리를 낼 기회를 주는 것이 바로 사상의 자유시장이다)


내가 얼치기 경영학도로서 배운 몇 안 되는 것 중의 하나는 수익자부담과 참여자보상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조직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센티브 없는 곳에 열심히 일할 유인이 좀처럼 생기지 않고, 경쟁의 압력을 받지 않고 있는 개인이나 조직은 비효율에 수렁에 빠지게 마련이다. 이건 성선설 혹은 성악설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스런 인간의 귀차니즘일 것이다. 여기에 도덕적 가치판단을 내리는 것은 부적절하다. (나는 선악이 개인의 의지 이외의 어떤 것에 귀속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 본성에 선에 대한 능력, 악에 대한 능력이 동시에 있다고 말한 칸트의 성무선악설을 지지한다) 인간의 이러한 편안함에 대한 욕망이 비루하다고 한탄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나쁜 것이니 제거해야 한다고 난리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사실 귀찮음을 제거하려는 노력이 인간의 진보를 가져왔다는 것을 부인하기 힘들다.


신자유주의는 악의 화신도 아닐 것이고, 그렇다고 만병통치약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세계경제의 주도적 흐름이 되어 우리의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명색이 사회주의 국가라는 중국이 돈맛을 알면서 각종 개방정책과 외자유치에 두 발 벗고 나서고, 시장경제 도입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은 우리의 감상과는 별개로 엄연한 현실이다. 이런 중국의 거센 도전에 우리 기업들이 위기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도 외면하고 싶지만 분명한 현실이다. 결국 신자유주의가 천민 자본주의나 부박한 경쟁일변도의 논리로 전락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수밖에 없다. 물론 대전제인 상도덕이 바로잡힌 사회부터 만드는 것이 급선무이다. 사실 이것도 제대로 안된 흙에 신자유주의라는 나무를 심으려고 하니 제대로 자랄 리가 없다.


혹자는 신자유주의가 WTO로 대표되는 미국 주도의 세계화라고 비판한다. 물론 그런 측면이 다분하고 그것이 그리 달갑지는 않다. 어차피 우리 주도가 아닌 이상 남이 하는 일이 무조건 좋게 보이는 것도 배알이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거부하겠다는 것은 머리가 없는 짓이다. 약간 옆으로 새자면 미국의 패권이 쇠퇴한 뒤에도 자유무역질서가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것인가는 국제정치경제분야의 뜨거운 감자다. 현실주의자들이 WTO 같은 국제 레짐(regime)은 패권국의 운명과 같이 한다는 입장인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국제 레짐이 독자적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내가 보기에 자유무역질서가 살림살이에 보탬이 된다면 미국 패권의 지속 여부와는 관계없이 계속 유지할 유인이 생길 것이다. 솔직히 자유무역질서가 미국의 지원 없이도 제 앞가림 할 수 있을지를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미국과 함께 촉석루를 등지며 남강으로 뛰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미국의 이익에 봉사한다는 명제는 타당하지만, 미국만의 이익에 목매달고 있다는 명제는 타당하지 않다.


경영학은 제한적인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을 가진 인간을 가정한다고 한다. 시장도 정부도 불완전하다. 인위적 질서인 국가가 그런 것처럼 자생적 질서인 시장 역시 완전무결한 존재는 아니며, 시장과 정부는 서로 대립하면서도 의존하는 관계일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합리성에 한계가 있는 이상 시장의 오바(over)와 정부의 삽질을 적절히 제어하는 것도 사실 불완전할 것이다. 그러나 부지런히 감시의 눈빛을 보낸다면 오류의 폭은 줄어들 것이며, 효용의 수준은 늘어날 것이다.


칼 포퍼의 점진적 사회공학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다. 첫째는 추상적인 선의 실현을 위해 힘쓰지 말고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모든 악은 직접적인 수단에 의해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미래의 유토피아 건설로 악을 간접적으로 제거할 생각말고, 오늘의 희생을 쥐어 짜내기보다 지금의 고통을 덜어내는 데 힘쓰라는 것이다. 이는 고종석 선생의 선을 증진시키려는 노력은 악을 감소시켜려는 노력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말과도 상통한다. 기쁨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더는 세상은 개개인을 조정하여 세상을 바르게 만들 수 있다는 ‘치명적 자만’을 버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찬반을 떠나 점진적 사회공학으로서의 순기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한다. (물론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순기능은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생각들 하시겠지만 말이다) 신자유주의가 사회적 약자에게 그리 따뜻한 눈길을 보내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것은 기업가에게 사회적 책임을 강제하는 것만큼이나 억지스런 짓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낮은 사람들에게 발길질까지 해대는 것은 반대한다. 적어도 균등한 기회를 주고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수확할 수 있는 풍토를 조성하는 것이 신자유주의가 주창하는 자유경쟁의 원리일 것이다. 냉정한 자기책임의 원칙을 역설하기 전에 우선 상도덕이 바로잡힌 시장 구축에 힘써야 한다.


신자유주의가 공짜 점심을 먹으려는 자들에게 칼로 작용한다면 환영할 일이다.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합당한 보상이 주어지는 사회, 성실한 사람에게 균등한 기회가 주어지고 투명하게 평가되는 사회, 상도덕을 어긴 자들에게는 엄중한 문책과 퇴출이 이루어지는 사회라면 나는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일부 광신적 시장주의자들의 도피처가 되고, 일부 자본가들의 식탁만을 풍성하게 하는 수단으로 전락한다면, 정치만능주의에 대항한답시고 경제만능주의에 빠져버린다면 나는 열심히 구박하겠다.


모든 주의주장이 그렇듯이 실재를 보다 명확하게 해석하는 능력과 더불어 보다 많은 이들의 후생을 증진시킬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사상만이 생명력을 얻을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그 선의에도 불구하고 천박한 경제만능주의로 빠진다면 매섭게 비판해야겠지만, 공정한 게임의 규칙이 적용되는 자유경쟁의 제도화에 힘쓴다면 응원할 생각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우상을 섬기는 이들 상당수가 가진 자의 더 큰 자유만을 옹호할 때 나는 곤혹스럽다. 알아서도 잘 살 사람들을 굳이 돕는 것은 자유주의 미감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내버려둬라(Laissez faire). 자유주의자가 할 일이 이 땅에 만연한 부자유를 제거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가진 자의 부자유보다는 못가진 자의 부자유를 제거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 맞다.


자유는 본질적으로 차이를 낳고, 이 차이에는 여러 종류의 불평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주의자는 이 차이가 차별이 되는 것을 막고, 불평등이 계속 고착화되는 것에도 고개를 가로 저어야 한다. 과연 신자유주의라는 이름 하에 행해지는 것들이 자유주의 미감을 얼마나 구현해낼 수 있을지 좀 더 두고봐야겠다. 자유주의 미감이라 함은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째려 볼 수 있는 역량을 갖추려면 우선 나부터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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