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몇몇 문구들이 나의 가슴을 때렸다. 그 문구들에 대한 나의 짤막한 소회들을 정리해봤다.

1.
딴지일보에 캐나다의 스벤드 로빈스 연방하원의원에 대한 기사가 올라왔다. 약자와 소수자의 권리보호에 힘써온 그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지역을 찾아가 아라파트를 지지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유죄입니다. 편을 든 것이 유죄이지요. 하지만 반드시 편을 들어야 한다면 압제자 (Oppressor)의 편이 아닌 약자 (Oppressed)의 편을 들겠습니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주의자로서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것이 유죄씩은 아니더라도 무척 부담스러운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늘 부지런히 눈치보고, 하고 싶은 말도 적당히 둘러대는 사람들의 차지다. 타인의 입장에서 보는 나는 편파적이고 오류투성이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겸손, 남의 생각 중에 맞는 부분에 끄덕이는 여유로움이 있는 사람이라면 남의 견해에 함부로 유죄 선고를 내릴 수 없을 것이다. 설령 나의 당연한 권리로서 어떤 사안에 대해 편을 들게 되었을 때 그에 따르는 오해를 어느 정도 너그러이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부당한 비난에는 방어를 해야겠지만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 만큼의 비용을 치르는데 인색하지 않은 내가 되길 바란다. 아울러 나의 편들기가 압제자보다는 약자에 기울어지는 것은 물론, 조직된 소수의 이익보다 조직되지 않은 다수의 이익 옹호에 인색하지 않는 내가 되어야겠다.

2.
“밤 그림자처럼 스쳐 날아가는 그것, 누구도 알 수 없고, 어떤 사냥꾼도 쏘아 떨어뜨릴 수 없는 것…생각은 가둘 수 없다(Die Gedanken sind frei).” 독일 민요의 한 구절을 빌려 1999년 새해 소망을 빌어본다.


- 이 땅에 ‘사상의 자유'’를, New+(주간 동아일보)의 ‘유시민의 세상만사’ - 1999. 01. 14

고3 시절 우연히 집어 든 유시민의 [WHY NOT?]은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내가 유시민 선생을 익구의 지적 스승 내지는 영혼의 스승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게 된 결정적 이유는 바로 이 책 때문이다. 개인주의가 자랑스러운 것임을 확신하게 해준 고종석 선생이 있다면, 유시민 선생은 자유주의가 내 입맛에 맞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분이다. 여하간 2002년 7월경에 있었던 유시민 강연회에 참석한 후 내가 [WHY NOT?]책에 받은 유시민 선생의 싸인 문구가 Die Gedanken sind frei 였다. 그간 늘 이 문구의 뜻이 궁금했었는데 이제야 알게 되어 무척 반가웠다. 생각은 가둘 수 없지만 이래저래 많은 제약요인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생각이 자유롭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닌다. 문제는 실천적 노력이나 행동이 자꾸 가두어지면 그에 따라서 생각의 영역도 자꾸 축소될 개연성이 높다는 것이다. 내 스스로가 만들어내고 들어가 앉는 생각의 감옥에서는 얼른 탈옥하는 것이 상책이다.

3.
전공필수 과목인 경영정보시스템이라는 강의는 그리 관심도가 높지 않아서 그랬는지 늘 지루하고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교재 중에 나의 눈을 확 끌었던 대목이 있다.

의사결정시 인간의 감정과 심리상태는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저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의사결정은 위험을 수반하기 때문에 위험에 대한 불안감은 의사결정에 부정적인 영향으로 작용한다. 즉, 지나치게 의사결정 시기를 연기하려고 하는 ‘방어적 회피(defensive avoidance)', 불안한 의사결정 상황을 빨리 벗어나기 위해 충동적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과민한 반응(over-reaction)',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의사결정은 하지 않고 점점 더 많은 양의 정보만을 수집하려고 하는 ‘지나친 경계(hyper-vigilance)' 등과 같은 현상은 의사결정을 객관적이기보다는 감정적으로 처리하게 만든다.


- 한재민, 경영정보시스템, 학현사(1998), 380쪽

하나하나 무릎을 쳤지만 특히 지나친 경계 대목에서 몸둘 바를 몰랐다. 자료의 홍수 속으로 도피하는 것, 결국 방어적 회피와도 연계된 이야기겠지만 차일피일 미루면서 판단을 못내리는 경우가 있다면 지나친 경계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 방어적 회피를 하고 있지는 않나 자문해봐야 할 것이다. (다행히 소심쟁이인 나는 과민한 반응을 내릴 유인은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것을 그나마 위안으로 삼는다^^;) 물론 어차피 인간은 제한된 합리성을 가진 존재이고 합리성에의 결벽증 적인 집착은 스스로를 피곤하게 할 뿐이지만, 최대한 합리적 의사결정을 내리려는 모든 노력은 그 자체로 가치 있고 아름답다. 우리는 그 정도의 넘침을 타박할 수 있을지언정 합리성에의 애착은 누구에게나 권장할 일이다. 특히 정, 의리, 연고주의 같은 비합리적이라 지칭할 수 있는 요인들이 강하게 작용하는 한국사회에서는 더욱더 유의미하다.

4.
일단 많이 배우면 세상의 다양함을 받아들이게 된다. 많이 말하면 오히려 말을 조심하게 된다. 그리고 많은 글을 쓰면 세상에 대해 너그러워진다. - 전여옥


이런 꽤 맛깔스런 말을 전여옥이 했다는 것이 떨떠름해서 인용을 몇 번이고 망설였다. 전여옥이 과연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최대한 선의로 받아들일 요량이다. (이 문장은 유시민 의원과의 토론회 후기의 일부로서 전여옥은 이 모든 과정을 역행한 인물로 유 의원을 지목한다. 그러면서 서글프다고 읊조린다^^;)

과거에는 많이 배우면 어떠한 사안에 대한 판단력이 좀더 분명하고 신속해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배우는 학생 입장에서는 이것저것 배우는 것이 본업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자꾸만 배우면 배울수록 판단력이 흐려지고 더욱 느려지고 있다는 회의가 들었다. 그것이 여러 견해의 타당성을 비교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으로 좋게 해석하고 싶다. 이는 세상의 다양함을 받아들인다는 것과 상통할 것이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말을 많이 하면 쓸데없는 말이 많아지게 마련이라는 알 수 없는(?) 믿음에 사로잡혔던 나는 자연스레 말조심을 하는 축에 속한다. 하지만 말 대신 글로써 매섭게 몰아붙이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글조심이 더 시급한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최근에는 새로운 근거 없는 미신이 나를 지배하려고 하고 있다. 말을 많이 하면 헛소리도 많이 하겠지만 좋은 말, 쓸모 있는 말도 비례해서 많이 할 수 있다는 것이라는 믿음이다. 많은 사람들과 많은 말을 나누며 배우고 느끼고 싶은 욕구가 더 강하기 때문에 나의 우상(?)도 교체되고 있는 셈이다.^^;

이런저런 잡글을 끄적이면서 내가 조금 더 여유로워졌음을 느낀다. 내 정파적 이해를 대변하고, 내 잣대로 남을 비판하는 경우가 태반인 나의 잡글쓰기는 오히려 나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 모자람이 이렇게 크게 있는데 이러한 이유로 남을 재단하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 것인지도 절실히 느끼고 있다. 무엇보다도 문자로 된 텍스트에 대한 부담감이 나를 좀 더 성찰하게 만드는 것 같다. 문자로 된 텍스트는 머릿속의 관념 몇 조각이나 대화 중의 말 몇 마디와는 달리 기록으로 남기 때문이다. 전여옥이 말한 너그러움의 이면에는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세상과의 적절한 타협이라는 의미도 강하게 내포되어 있지는 않을까?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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