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긴 쳇구멍

잡록 2004. 5. 13. 02:33 |
사람은 보는 것을 믿는 것일까, 믿는 것을 보는 것일까라는 의문은 생각보다 꽤 철학적인 주제다. 아마 두 가지 측면이 골고루 있을 것이고, 또한 이 둘의 가치우위를 따지는 것도 무의미할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좀 더 보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는 것이다.


제 나름의 체로 한 번 걸러 입맛에 맞는 데로 아전인수로 해석하는 선택적 사고의 함정은 언제나 우리를 유혹한다. 어느 정도의 선택적 사고는 개개인의 당연한 권리이지만 객관적 사실마저 외면하는 순간 선택적 사고는 그 빛깔을 바래고 만다. 진중권 선생은 [당파와 파벌로 찢긴 대한민국은 미쳤다]는 글에서 이러한 맛간 선택적 사고를 강하게 비판한다. 우리 사회가 논리적 성격이 아닌 정치적 성격의 일관성이 팽배해있다는 것이다. 당파와 파별로 찢어진 사회에서 제일 먼저 사라지는 것이 합리적 소통이라면서 당파의 차이를 떠난 합의의 장이 설자리를 잃게 된다고 경고한다.


기실 모든 사안마다 모두 의견이 일치해야만 내편이라고 보는 것은 최대주의(maximalism)의 폭거일 따름이다. 최대주의는 자유주의의 미감을 심하게 거스른다. 모든 사안에서 몇 치의 어긋남조차 허용하지 않아야만 안심하는 것은 파시스트의 미감일 뿐이다.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너가 그럴 줄 몰랐다”라면서 호들갑을 떠는 모양새에서 파시즘의 잔재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 반대자들에게 쓴소리를 내뱉는 것은 쉬운 일이고 때로는 재미나고 희열이 나기까지 한다. 하지만 우군에게 화살을 날리려고 하면 활시위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나의 당파성이 자유주의 미감을 구현하는 것에 있다면 집단주의의 횡행에 민감해질 필요가 있다. 그것은 조직의 생리에 저항하고 미시 파시즘의 발호를 경계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피아의 구분이나, 내편 네편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아마 그러기 위해서는 때때로 꾀죄죄한 소수파의 서러움을 느낄 각오가 되어야 한다.


나는 내가 딛고 있는 곳이 절대선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악을 제거하는 데 일조하고 작은 선이나마 실현해낼 수 있는 힘이 있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실을 왜곡하지 않겠다는 마음과 우군이 잘못한 것이 명백하다면 함께 책임을 통감하고 반성하겠다는 겸허한 자세가 필요하다. 상대방의 해석을 존중하면서도 저들이 사실을 건드리려고 하면 기꺼이 비판의 칼을 들이대야 하듯이 나 또한 해석의 자유에 취해서 사실을 조작하는 오만을 부리지는 않나 끊임없이 감시해야 한다. 저들과 마찬가지로 내게도 사실 자체를 건드릴 자유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해석이냐는 무척 어려운 과제이다. 두부 자르듯이 사실과 해석의 경계가 갈리기를 기대하는 것은 억지다.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사실과 해석의 교집합처럼 느껴져 분간하기 힘든 부분은 과감히 해석의 영역에 포함시키는 것이 보다 더 적절할 듯 하다. 사실의 영역은 신성하지만 쓸데없이 확장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해석의 여지를 늘이는 것도 자유주의자가 노력해야 할 부분이다. ‘사실’이 ‘당위’라는 사탕옷을 입기 시작하면 근심거리가 생기게 마련이니까.^^;


내 잣대로 만든 체의 구멍크기를 조금 크게 하는 여유를 가져야겠다. 돌멩이 같은 잡물들도 더러 섞이겠지만 미쳐 보지 못한 몇 톨의 진리를 더 건질 수 있는 가능성도 함께 얻으니 결코 손해보는 장사는 아닐 것이다. 촘촘한 쳇구멍으로 나를 안락하게 만들기보다는 조금 성겨 보이는 쳇구멍이 나를 조금 불편하게 해도 결국은 나를 더 살찌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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