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론의 틈새시장

사회 2004. 6. 29. 04:18 |
유물론(唯物論)은 물질을 제1차적, 근본적인 실재로 생각하고, 마음이나 정신을 부차적, 파생적으로 보는 철학설을 말한다. 가령 mannerist 선배님의 들어주신 예를 보면 20세기 후반 여권의 신장은 여권 운동의 결실이 아니라 양차 세계대전 이후 모자른 남성 인력을 메우기 위해 여성 인력이 많이 투입되었고, 그 결과 돈을 만지게 된 여성이 그 물질적 기반을 통해 권리 향상을 이룰 수 있었다는 식이다. 물질이 주(主)고 의지나 의식은 물질의 소산으로서 종(從)이기 때문에 유물론은 팍팍하다고 느껴질 소지가 크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총 경제활동 인구 중 군대에 간 비율은 대체로 약 20퍼센트였다. 덧붙여 말하자면, 수년 동안 지속된 그러한 대중동원 수준은 현대적이고 생산성 높은 산업화된 경제와-또는 그러한 경제 대신에-주로 비전투원 인구 부문에게 맡겨진 경제가 없었더라면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다. 전통적인 농업경제-적어도 온대지역에서의-는 모든 일손이 필요할 때 (이를테면 수확기)가 1년에 여러 번 있으므로 특정한 계절을 제외하고는 보통 그렇게 큰 비율의 노동력을 동원할 수 없다. 산업사회에서조차 그렇게 큰 인력동원은 노동력에 막대한 부담을 주며, 바로 그러한 사정이 현대의 대량전이, 조직된 노동자층의 힘을 강화한 동시에 가정 밖에서의 여성고용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던 -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일시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영구적으로-이유이다.

- 에릭 홉스봄, [극단의 시대], 1장 총력전의 시대 중 부분, 69 ~70쪽


경험론자들보다는 합리론자인 스피노자나 라이프니츠에 호감을 느끼고, 촘촘한 감각보다는 번뜩이는 직관을 통해 의사결정을 하는 편이 잦고, 인간의 자유의지에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는 나로서는 유물론을 그다지 흡족하게 여기지는 않은 것 같다. (다만 종교란 인간의 행복 추구 욕구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신’이란 결국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기 위해 인간이 창조해 낸 것이라는 포이어바흐의 입장을 지지한다. 하지만 숱한 종교인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신 혹은 정령의 존재는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낫겠다 싶으니 이마저 완전한 유물론은 아닌 셈이다^^;)


특히 사적 유물론 같은 것에는 넌더리가 난다. 마르크스는 자유란 필연성의 인식이라고 말했다고 한다(좀 더 근사한 표현으로 “자유의 왕국은 오직 필연의 왕국에 기초하여 건설될 수 있다”는 말이다). 어떠한 법칙성의 기술적 이용을 인간의 자유로 볼 수 있으나 어디까지나 법칙에 따르는 자유라는 결정론적 사고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신뢰로 먹고사는 자유주의자가 필연성 어쩌고 하는 것을 달갑게 여길 리가 없지 않는가.^^;


요즘 지인들과 추가 파병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눠보았다. 대개는 소극적 반대와 소극적 찬성 사이에서 헤매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도 이것이 국민들의 평균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좋아서 파병에 찬성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렇다고 대놓고 반대하기는 꺼림칙하다는 것이 대개의 생각들이었다. 이 꺼림칙함을 다소 크게 본 사람은 소극적 찬성 쪽에, 작게 본 사람은 소극적 반대의 입장을 보였다고나 할까. mannerist 선배님은 그 둘은 별로 차이가 없다고 하셨다. 게다가 아가리 닫고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선배님께서는 근조 리본 떼고 거리로 나올 것을 종용하는 입장인 셈이다). 나는 일면 동의하면서도 괜스레 너무 유물론적 해석이 아니냐고 너스레를 늘어놓았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수강신청 잘했냐는 둥, 여행계획이 뭐냐는 둥, 주말 드라마가 어떻고, 토익 점수가 어떻고, 엊그제 했던 소개팅이 어쩌고, 내일 먹으러 갈 음식이 저쩌고 하는 숱한 소재가 있다. 그 중에서 추가 파병 꺼내드는 것도 사실 쉽지 않다. 자칫했다가는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를 무거운 공기로 갈아치우는 위험도 있다. 그러나 한바탕 다투든, 합의점을 찾든, 미국과 부시를 진탕 욕하건 간에 적당히 결론을 맺고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과정 자체는 무척 소중하다. 나는 일단 여기서부터 시작을 해야한다고 본다. 일단 대화의 소재를 바꾸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논쟁을 벌이는 것 자체는 그 성과물의 생산성 여부를 떠나서 선행되어야 할 과업이다.


물론 실천이 중요하고, 움직여야 무언가 바뀌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전의 과정을 충분히 거쳐야 할 것이다. 서로의 차이점만 발견하고 영양가 없는 공방을 주고받더라도 일단 그 논의의 마당을 여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오히려 친할 사이일수록 이런 마당을 불편하게 여기고 그냥 넘어가려고 한다. 친하게 지내고 싶으면 껄끄러운 이야길랑 접어두는 것이 불문율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비판적 언어를 통한 갈등과 혼란의 공유는 아둔한 짓으로 치부된다. 하지만 나는 논의의 마당을 후닥닥 지나치고서 합의의 도장을 냉큼 찍고, 얼른 실천의 광장에 뛰쳐나오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일단 논의의 마당에 마주 서게 하는 것부터가 나를 허덕이게 만들고, 따가운 눈초리를 받게 만든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살가운 분위기가 가득한 물 잔에 한 방울의 쪽빛 잉크를 떨어뜨리는 것만으로도 참 어렵고 힘들다. 그런데 그 물 잔을 온통 푸른빛으로 물들이고, 거기다가 끓어오르게까지 하는 것은 아직 언감생심이다. 나는 다만 유물론이 간과하는 빙산 아래 거대한 논의의 마당에 좀 더 애정과 역량을 쏟을 참이다. 이 누추한 틈새시장에서 장사가 얼마나 될라나 모르겠지만 말이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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