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강정정해서 들어간 행정학개론 강의에서 당장 이틀 뒤까지 [유토피아]에 대한 과제물을 제출해야 하는 비보를 전해 들었다. 이상하게 과제가 너무 하기 싫어서 계속 잠만 자다가 새벽에 일어나 책도 대충 읽고, 그간 썼던 글조각들을 얼기설기 엮어서 대강 만들어서 냈다. 했던 이야기 또 하는 것이 자꾸 반복되어 내 자신이 태만해지지 않기를 경계하지만 가끔은 이런 호사를 부리는 재미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1. [유토피아] 내용 고찰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Utopia)는 산업자본주의가 싹트던 초기 자본주의 시대를 배경으로 쓰였다. 이 책은 저자가 이상향 ‘유토피아’를 방문한 라파엘에게서 들은 유토피아의 제도와 풍속을 기록하는 형식으로 구성된다. 현재의 유럽 사회는 흉년이 든 해의 연말에 부잣집 곡간을 낱낱이 뒤지면,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생명을 잃는 사람을 먹이고도 남을 만한 곡식을 찾아낼 수 있으면서도 참혹한 결과가 피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이 책 전반에 흐른다. 귀족 혹은 자본가들이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유토피아를 통한 대안 모색을 시도한다.

  유토피아에서는 여자들, 성직자/수도자들, 귀족/지주들과 그들의 가복들, 거지들 등을 모두 노동에 종사시킨다. 모든 인간이 노동을 함으로써 하루에 여섯 시간만 일을 해도 생활 필수품과 편의품을 충분히 공급할 수 있게 만들며, 나머지 시간은 교육을 더 받는 데 여가를 사용하는 등 기호에 따라 자유롭게 보낼 수 있다. 필요한 물건은 무엇이든 간에 그는 값을 치르지 않고 가져올 수 있는데, 모든 것이 공공소유로 되어 있기 때문에 공동 창고가 가득 차 있는 한, 결핍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누구나 공정한 분배를 받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나 거지가 있을 수 없으며, 재산을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이 모두 부자인 셈이다.

  유토피아의 주요 특징 중의 하나가 사유재산제의 폐지인데, 사유재산이야말로 만악의 근원이라는 사고가 바탕에 있다. 즉, 화폐가 없는 경제, 모든 것을 공유하고, 꼭 필요한 것만을 집중적으로 생산함으로써 불필요한 노동을 배제하려고 노력했다. 이를 통해 모든 시민의 경제적인 평등과 계급없는 사회가 이룩되고, 인간다운 활동을 위한 자유 시간을 최대한으로 확보해서 윤택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든다. 다소 단순하고 허황된 감이 있지만 유토피아는 평등주의적 이상에 기대어 자본주의적 현실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2. 유토피아의 한계
 
  지적 쾌락을 추구하는 풍족한 유토피아 사회의 주된 특징은 획일성이다. 시민들은 모두 똑같은 모양, 똑같은 색깔의 옷을 입고 사는데, 2년에 옷 한 벌 씩 받는다. 또한 결혼과 가정의 문제도 국가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는데, 부부가 이혼을 원하는 경우에도 의회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엄격한 통제사회의 단면은 공동 식사에 대한 묘사에서 엿볼 수 있는데 각 가정에서의 식사는 사실상 금지되어 있고, 모든 사람들은 마을회관 같은 공공 장소에서 공동 식사를 하게 되어 있다. 매일 마을회관에서 도덕적인 설교를 듣고, 노인들의 평가를 받아가며 식사를 해야한다. 한편, 여행을 할 때 일일이 허가증을 받아야 할 정도로 이동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 또한 사회를 문란하게 하는 사상과 사람들은 도시에서 영원히 추방되었고 비합법적인 집회도 엄격히 금지된다. 이 대목에서 ‘유토피아 전체주의’를 발견하게 된다.

  라파엘은 유토피아인들은 야심, 정치적 분쟁 등 모든 불상사의 근원을 제거해 버렸다고 찬사를 늘어놓지만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화폐를 없애고, 도덕교육을 강화한다고 해서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이 완전히 제거된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그 실현수단인 엄격한 통제 메커니즘이 24시간 돌아가야지 겨우 실행되는 초라한 몰골에 지나지 않는다. 내면의 성숙을 위한답시고 외면의 아름다움을 가꾸는 것은 제약하는 것은 또 다른 극단주의적 폭력의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 역사나 마르크시즘 역사는 사랑의 이름으로 이룩한 증오의 역사다. 그들이 내건 사랑이 그리 크지만 않았더라도, 그들이 역사 속에서 실천한 증오의 크기가 그렇게 엄청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나 마르크시즘을 포함한 모든 유토피아니즘이 그려온 유토피아는 먼 미래나 과거, 또는 외딴 섬에 설정돼 있다. 그들이 그리는 유토피아가 지금 이곳과는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리는 사랑, 우애는 무책임하게 클 수 있었고, 그 반동으로 그들이 실천한 증오도 덩달아 그리 클 수 있었다.

   - 고종석, [자유의 무늬](2002), 개마고원 刊, 233~234쪽

  유토피아 사회 또한 사랑의 이름으로 모든 일이 수행된다. 그 사랑이 크기 때문에 더욱 엄격하게 감시하고 처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절대선의 경지에서의 이탈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유토피아 시민들을 안심하게 만들고, 반대에 대한 철저한 탄압이 유토피아 사회를 지탱하는 힘인 것이다. 유토피아는 개인의 행복을 최대화시켜줄 것처럼 보이지만, 그 행복은 집단의 위계질서 앞에 순응하고, 전체주의적 생활양식을 받아들이는 것에 불과하다. 결국 사적 영역을 말소시키고 거대한 집단 속에서만 안온함을 느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유토피아는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보여주는 디스토피아(distopia)와 종이 한 장의 차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유토피아의 열정이 지나치면 개인의 공간을 소멸 당하고, 순응 속에서만 자유를 느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청결과 순수에 대한 강박과 조급증 때문에 자신의 네모 반듯한 기준에 들어 맞게 하기 위해 여분을 덜어내고, 부족함을 억지로 채우는 무리수를 두는 경우를 역사상 많이 보아 왔다. 십자군 전쟁도 이교도의 손아귀에서 성지를 수복하자는 거룩한 사명을 띠고 시작되었고, 마오쩌둥의 문화혁명도 혁명사상 고취를 통해 인민들에게 보다 나은 삶의 약속했으며, 최근 미국의 이라크 침공 또한 이라크에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주기 위해서라고 강변하고 있다.


3. 점진적 사회공학의 추구
  
  유토피아 논의와 관련하여 칼 포퍼의 점진적 사회공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칼 포퍼는 유토피아니즘과 전체주의를 비판하며 점진적 사회공학을 주창한다. 이것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다. 첫째는 추상적인 선의 실현을 위해 힘쓰지 말고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모든 악은 직접적인 수단에 의해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미래의 유토피아 건설로 악을 간접적으로 제거할 생각말고, 오늘의 희생을 쥐어 짜내기보다 지금의 고통을 덜어내는 데 힘쓰라는 것이다. 이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의 실현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하려 하기보다는, 존재하는 것이 명백한 악, 피할 수 있는 고통을 최소화하는 데 애쓰라는 것이며, 지금 여기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구해야한다는 뜻이다. 즉 누구도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칸트식의 목적의 왕국인 셈이다. 기쁨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더는 세상은 개개인을 조정하여 세상을 바르게 만들 수 있다는 ‘치명적 자만’을 버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추상적인 이상에 대한 합의는 참 어렵다. 특히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절대선과 절대악이란 사실상 거의 존재하지 않고, 선악이 복합적으로 존재하기 일쑤다. 미국의 네오콘같은 사명감에 불타는 무식쟁이들만 있다면야 옥석을 가리기 쉽겠지만, 대개는 나름대로의 논리를 가지고 맞서게 마련이다. 가령 신자유주의 논쟁만 해도 WTO는 전세계 민중을 착취하는 미국식 세계화에 불과하다는 입장과 WTO가 실현할 자유무역과 다자통상체제로 말미암은 경제적 다극화가 미국화로의 경도를 막고 우리가 살 길이라는 입장과의 간극은 너무나 벌어져 있다. 신자유주의는 악의 화신도 아닐 것이고, 그렇다고 만병통치약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이처럼 대립하는 사회 개혁의 방법론에 대해서는 숙고된 균형감각이 절실하다.

  이처럼 이 무지막지한 차이의 세계를 하나의 구호로 묶는 혁명의 단순명료함은 쉽사리 공감하기 힘들다. 또한 설혹 어찌어찌 해서 꾸려진 유토피아가 개개인의 효용을 극대화시켜 줄지도 매우 의심스럽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유토피아라는 미명하에 엄청난 비용이 지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향하는 바는 다르지만 악에 대한 인식이 같다면 이를 오늘의 시점에서 제거하려고 애쓰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혹자는 이는 너무 매끄럽지 못하고 두루뭉술한 수단이라고 비판할지 모르겠지만, 매끈함을 핑계로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날카로운 칼날을 자신 있게 휘두르기 보다는 무딘 칼날도 조심해서 쓰는 것이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한 점진적 사회공학의 요체이다. 백가쟁명 백화제방(百家爭鳴 百花齊放)의 시대에 사는 것은 확실히 정신없고 골치 아픈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하나의 소리와 하나의 꽃으로 통일할 권한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4. 진정한 유토피아란?

  유토피아는 현실에 대한 불만을 극복하고 보다 나은 삶에 대한 열망에서 출발한다. 이를 위한 노력과 욕망이 인류를 진보시킨 원동력이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아나톨 프랑스가 “다른 시대의 유토피아인들이 없었다면 인간은 아직도 동굴 속의 비참하고 발가벗은 상태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듯이 유토피아 사상은 여전히 살맛나는 세상을 향한 의지의 표상이다.

  하지만 유토피아는 강력한 현실 타파의 욕구와 이상에 대한 철저한 수호라는 특징 때문에 전체주의와 손을 잡기 십상이다. 유토피아로 치장한 전체주의는 더 이상 등장해서는 안되는 비극의 씨앗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동질성으로 무장하기보다는 다양성으로 흩어지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특히 사회적, 문화적 소수파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진짜 유토피아로 가는 길목일 것이다.

  자유는 본질적으로 차이를 낳고, 이 차이에는 여러 종류의 불평등이 포함된다. 진정한 유토피아를 꿈꾸는 이라면 차이가 차별이 되는 것을 막고, 불평등이 계속 고착화되는 것에도 고개를 가로 저어야 한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와 상호 존중이라는 가치를 미래의 유토피아 건설을 위해 희생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위기의 20년]에서 “건전한 정치이론이라는 것은 유토피아와 현실의 양 요소 위에 입각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외친 E.H 카의 지적은 앞으로도 유효하다. 개인의 자유와 숙고된 균형감각 위에 점진적으로 사회개혁을 추진해 나갈 때 유토피아는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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