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하고 싶다면

잡록 2004. 9. 22. 03:52 |
시름시름 앓던 컴퓨터가 그에 하드디스크가 통째로 날아갈 위험에 처했다. 그간 틈틈이 작업했던 수많은 글조각들이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질 위기라 여간 찜찜한 것이 아니었다. 다행히 컴퓨터가 간간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부리나케 백업들을 해서 주요한 문서들을 천만다행으로 보전할 수 있었다.


A4 수 백장 분량의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글과 수 십장 분량의 내가 적어 둔 숱한 글조각들을 가까스로 살리면서 “실존(實存)”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실존이라는 개념을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학원 국어시간이었다. 당시에 어떤 지문에서 실존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는데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해주셨다.


“지금 뒤를 돌아보지 말고 생각해봐. 이 교실 뒤의 창문에 붙여진 글씨가 무슨 색깔이고, 크기는 얼마나 되지? 늘 자주 보는 것이지만 무심코 지나가 버린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실존한다고 볼 수 없지.”


대강 이런 식이었다. 실존이라는 말은 매우 다양하게 쓰이므로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본질에 대응되는 개념으로 이해하면 편할 것 같다. 창문에 붙여진 글씨의 색깔과 크기는 본질을 형성한다면, 그 창문에 글씨가 붙여져 있는지, 검은 색깔인지, 크기는 어떤지 하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 실존인 셈이다.


문득 컴퓨터가 말썽을 일으켜서 그간의 자료들이 다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안절부절못했던 내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그 수많은 텍스트 중에서 내게 실존하고 있는 것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말이다. 점점 많은 양의 정보만을 수집하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지나친 경계(hyper-vigilance)’에 빠진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내게 실존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세세한 부분까지는 기억할 수 없는 노릇이다. 또한 불현듯 떠오르는 상념들은 일단 붙잡아 두고 볼 일이지, 실존할 가능성을 따져가며 선별하는 것은 배우는 학생 입장에서 할 짓은 아니다. 내게 실존하는 부분은 쥐꼬리만할지 몰라도 그 실존의 영역을 추출해내기 위해서는 바닷물과 같은 너른 모집단이 있어야 한다. 우물에서 건진 쥐꼬리보다는 바닷물에서 건진 쥐꼬리가 더 통통하고 빛깔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아직은 좀 더 텍스트의 바다를 항해해도 무방할 듯 하다.


실존의 고독은 사람 사이에서 더 두렵게 다가온다. 스쳐 가는 많은 인연 중에서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나란 녀석이 실존하고 있는 것일까? 이렇게 남을 시험하고 싶은 유혹일랑 뿌리치고 그저 딛고 있는 자리에서 진정함과 성실함으로 대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일 것이다. 실존은 대개 양(量)이라기보다는 질(質)의 문제이기 때문에 너무 조바심 낼 필요가 없다.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실존하고 싶다는 욕심을 채우고 싶다면 절차탁마하며 내 자신을 가꾸는 느긋함을 가져야한다.


살아가면서 내 안에 실존하고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내게 익숙한 것에 식상함이라는 멍에를 씌우기보다는 감사의 월계관을 선사해야 한다. 익숙함의 축복, 실존한다는 것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인생을 함부로 대충 살지 못한다. 좀 더 꼭꼭 씹어서 충분히 소화된 것만을 나누려는 치열한 영혼들이니까 말이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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