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선생의 국궁진췌

문화 2004. 10. 16. 01:03 |
凡事如是 難可逆見 臣鞠躬盡瘁 死而後已. 至於成敗利鈍 非臣之明所能逆覩也.
범사여시 난가역견 신국궁진췌 사이후이 지어성패이둔 비신지명소능역도야

모든 일이 이와 같이 미리 헤아려 살피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신은 다만 엎드려 몸을 돌보지 않고 죽을 때까지 애쓸 뿐입니다. 일을 이루고 못 이룸, 이롭고 해로움에 대해서는 미리 내다보는데 밝지 못합니다.



유명한 공명선생의 후출사표(後出師表)의 마지막 구절이다. 촉한이 위나라에 비해 영토, 인구, 군사력 모든 측면에서 열세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후출사표에서 “지금 백성들이 궁핍하고 군사들은 지쳐 있지만 할 일을 그만둘 수 없다”는 구절(今民窮兵疲 而事不可息)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해 보였던 북벌을 거듭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제갈공명의 안타까움이 묻어 나온다.


별 볼일 없는 나라였던 촉한을 위해 공명선생은 국궁진췌(鞠躬盡瘁)하겠다고 다짐한다. 국궁은 존경하는 마음으로 몸을 굽힌다는 뜻이며, 진췌는 몸이 부서지도록 노력한다는 뜻이다. 결국 국궁진췌는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는 뜻이다. 어리석은 황제 유선을 향한 그의 변함 없는 충절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준다.


인민과 동고동락했다는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죽었을 때 중국인들은 국궁진력이라는 글을 바쳤다고 한다. 인민들을 위해 전심전력했던 그의 국궁진췌한 삶을 애도한 것이다. 여기서 영감을 얻은 나는 고등학교 2학년 학급회장 선거 정견 발표 때 나는 국궁진췌의 심정으로 반을 위해 노력하겠다며 자못 비장하게 읊조렸다.^^; 자유주의자에 개인주의자를 자처하는 내가 이렇게 국가주의 혹은 전체주의 냄새가 짙게 풍기는 국궁진췌에 열광한 까닭은 무엇일까?


어쩌면 나는 불확실성에 기꺼이 투자했던 그의 모습에서 감동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삼국지를 펴들 때마다 당대의 귀재 공명선생이 힘들고 어려운 길임을 알면서도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에서 어지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실력 있는 사람이 자신의 이상을 위해 한결같이 열정을 쏟는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꼈다. 링컨이 “한 인간의 됨됨이를 정말 시험해보려거든 그에게 권력을 주어보라”고 말했듯이, 권력의 단맛에 취하지 않기란 참 힘든데도 그 유혹을 뿌리친 공명선생에게서 서늘함을 느꼈다. 한 사람에게 느낀 어지러움, 아름다움, 서늘함이 내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공명선생은 일의 성패와 유불리는 따지지 않고 묵묵히 노력할 뿐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부지런히 대보고 따져서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에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국궁진췌하기보다는 안전을 위해 분산투자(포트폴리오)에 더 열중할 것이다. 그러나 내 자신의 효용극대화를 위해 살다가도 가끔은 내 신념을 지키기 위해 최적선택(optimal choice)을 포기할 줄도 알고, 손해보면서 남 좋은 일을 잠시라도 해보는 것을 유쾌한 경험으로 추억할 수 있는 넉넉함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공명선생을 끔찍이도 흠모하지만 내가 꿈꾸는 세상은 굳이 국궁진췌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다. 누군가의 희생을 먹고 진보하는 사회, 착한 사람들의 손해를 먹고 지탱되는 사회가 아닌 보통 사람들의 제 몫 챙기기로도 꾸려지는 사회가 그것이다. 여기서 제 몫 챙기기란 남의 자유와 권리를 침범하지 않는 한에서 내 소신껏 살면서 내 이익 도모하는 것을 말한다. 상도덕을 지켜가며 내 것을 쟁취하는 것이 내가 꿈꾸는 유토피아인 ‘보통선(普通善)’의 세상이다.


어릴적 보통선이라는 개념을 꺼내면서 대단한 것을 발견한 듯 좋아했으나 경제학에서 말하는 파레토 최적(Pareto optimum)과 매우 유사함을 발견했다. 결국 나의 뜬구름 잡는 소리는 참신하지도 못하고 그저 메마른 사회가 착한 사람들의 눈물로 적셔지는 것이 못내 불편한 ‘보통 사람’의 투정이 되어버린 것 같다. 하지만 전통적 의미의 적극적 선량함에 의존하기보다는 소극적 의미의 보통선이 큰 힘을 발휘하는 사회가 더욱 합리적이라는 문제의식은 유효하다.


내가 궁극적으로 국궁진췌 없는 세상을 꿈꾸지만 어쩔 수 없이 국궁진췌가 필요한 때가 있다. 사실 모든 시대는 보기에 따라 과도기이기 때문이다. 공명선생도 위나라가 떡 하니 버티고 있지 않았다면 시문이나 읊으며 한담을 즐기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핑계의 과도기에서 내게 국궁진췌의 과제가 주어진다면 반가운 마음에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성을 가질 것이다. 특히나 자유의 적들과는 국궁진췌해서 싸우는 것이 내 나름대로 공명선생을 따르는 일일 것이다. - [憂弱]


추신 - 고등학교 때 공명선생에게 바쳤던 헌사를 옮긴다.^^;

[공명선생을 좇다]
- 대륙의 구석에서 채 피지 못한 웅지여...

혹자는 선생의 공을 논하고
혹자는 선생의 과를 논할 제
나는 한 인간이 영원히 사는 것을 본다.

신선의 꿈은 접어두고
세진에 뒤덮이고
잡인과 어울리며
피를 토해내셨지만
선생의 터럭 좇지 못함을 탄식하니.

질퍽한 형극의 길을
기꺼이 필마단기(匹馬單騎)함은
썩어빠진 서생의 가련한 업이로다!
<2001/01/12>
Posted by 익구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