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면 가볍다

잡록 2004. 11. 3. 04:34 |
37대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학생회장으로서의 생활도 이제 끝나간다. 38대 경영대 학생회장 선거가 끝나면 올리려고 했던 퇴임사를 완성해놓고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떠나는 마당에 무슨 말이 이렇게 많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고개를 몇 번 갸우뚱하고는 썼던 글들을 싹둑싹둑 잘라냈다. 버혀진 글 조각만큼 내 헛된 집착도 버릴 수 있기를 바랐다.


비단 학생회 일이 아니라 다소 손해본다는 느낌이 드는 일을 할 때면 늘상 도덕경 2장의 功成而弗居(공성이불거)란 구절을 떠올린다.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 속에서 살지 않는다, 즉, 공을 쌓아도 그 공을 주장해서 무언가를 얻으려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공을 쌓았다면 마땅히 보상을 주어야 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상도덕의 근간이다. 이타주의적 희생정신을 가질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이미 이래저래 충분한 보상을 받았는데도 마지막까지 단물을 빨아내려는 것은 추한 욕심에 불과하다.


내 임기가 시작되면서 거의 한해 내내 학사지원부와 씨름했던 사물함 교체와 자치공간 비품 확충은 썩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해결이 될 모양이다. 문제는 내 임기가 다 끝나고 11월 말이나 되어야 하나둘 실현될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한해 동안 얼굴 붉혀가며 이야기해서 겨우 실현한 것들인데 다음 대로 넘어가야 하는 것이 못내 섭섭했다. 어떻게든 내 임기 만료 전에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적잖이 들었다. 그 때 나는 공성이불거를 떠올렸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나는 앞으로 내 임기 중에 이룬 것들을 마치 나만의 공인 것처럼 자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한 여러 가지 실수와 부족했던 점에 대해서도 구구절절이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한 나란 녀석이 금세 잊혀지는 것에 너무 섭섭하게 생각지 말았으면 한다. 선배님, 동기들, 후배님들이 알콩달콩 재미나게 지내는 모습을 보며 괜히 침 흘리지 말고, 하나둘 나란 녀석을 잊어가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싶다.


37대 고려대학교 중앙운영위원회가 해소되고, 38대 고려대학교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꾸려질 때 나는 참여하지 않았다. 내심 중앙선거관리위원이라는 직함으로 한달 간 더 연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조금 맡다가 신임 학생회장에게 물려주는 식으로 해서 중선관위원이라는 그럴싸한 이력을 하나 더 추가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일개 잡일꾼이기는 했어도 36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열심히 일했었고, 2년 간 총학생회 선거 개표를 해봤으니 이제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중선관위원이 되어 선거본부들 간의 논쟁을 가늠하고, 징계 여부를 만지작거리는 행위의 유혹은 그렇게 수그러들었다.


며칠 뒤면 35대 총학생회, 36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36대 경영대 학생회, 37대 경영대 학생회, 38대 경영대 선거관리위원회로 이어진 지난 3년 간의 학생회 일꾼 생활을 접게 된다. 가슴 사무치게 느낀 것이 있다면 버리면 가볍다는 깨달음이다. 이제 가벼워서 자유로워진 모습으로, 좀 더 비워낸 모습으로 지인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자질구레한 감상에도 불구하고 잊혀진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학우들의 기대와 격려를 잠시잠깐 받은 것에 불과한데도 잊혀짐이 너무 아쉽다. 덧없는 짓임을 알면서도 안절부절못하는 것이야 인지상정이리라. 서서히 지워지는 나를 발견하며 고독 속에서 내 자신을 되돌아볼 여유를 가져야겠다. 다음 사람에게 넘기는 것으로 실현되는 의회 민주주의 이어달리기 선수로서의 내 역할이 끝났음을 가슴 아프게 긍정할 것이다.


요즘 들어 이형기의 [낙화] 1연을 주문처럼 외우고 있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주문에도 불구하고 가을밤을 제법 뒤척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몇 번의 뒤척임이면 충분하다. 축 늘어지는 것은 꼴사나운 짓이다. 한층 더 밝고 맑은 모습으로 그간 모자란 사람의 빈곳을 채우느라 고생했던 분들에게 참 고마웠다며 충심 어린 감사 인사를 나누고, 정을 담은 술 한잔을 건넬 것이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인생의 보람거리를 찾아 힘찬 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대학 새내기 시절의 첫마음은 아직도 뜨겁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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