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값비싼 교훈

사회 2004. 12. 1. 03:15 |
박정희 신드롬에 대한 상반된 평가

  우리 근현대사의 인물 중에서 박정희만큼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경우도 드물다. 한 쪽에서는 근대화의 기수, 고독한 혁명가, 청렴하고 강력한 지도자라는 찬사를 들으며 단군 이래 이 땅에서 가난을 몰아낸 지도자라며 추켜세움을 받는다. 그러나 다른 한 쪽에서는 만주군 장교 출신의 민족반역자이며, 민주주의를 파괴한 군사독재자, 인권유린의 원흉이라는 혹평이 내려진다.

  박정희는 역대 대통령 평가에서 1위를 놓치지 않고 있으며, 복제인간으로 만들고 싶은 인물로 거론될 정도로 여전히 국민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있다. 특히 IMF 사태 이후에 일부 언론사들의 부추김에 힘입어 박정희 신드롬이 확산되기도 했었다. 요즘 경기침체로 다시 박정희 향수가 일어날 조짐이 보이기는 하지만 5년 넘게 끌어온 박정희 기념관 사업이 사실상 무산되었다. 이를 볼 때 국민들이 박정희를 경제적 치적 등을 높게 보는 듯 하면서도 박정희에 대한 총체적 평가가 호의 일변도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인간 박정희와 그에 대한 공과를 논해보고 오늘날의 시사점을 살펴보겠다.


기회주의자 박정희

  박정희는 초등학교 교원을 하다가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해 황군 장교가 되었고, 만주군의 긴칼을 차다가 해방을 맞이한 바람에 슬그머니 광복군에 잠시 가담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 군대 내 남로당의 조직책으로 활약하다 여순 사건을 계기로 전향하여 군부 안의 좌익을 색출하는 숙군 수사에 적극 협력하여 본인은 처벌은 면하게 된다. 종국에는 반공투사가 되어 군국주의에 기반한 병영국가를 만든 독재자가 되었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박정희의 제3공화국을 기회주의 공화국으로 표현한다. 아마도 이러한 평가는 박정희 개인의 이력에서 드러나는 기회주의적 처신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친일파, 좌익활동, 반공투사로 이어지는 박정희의 숨가쁜 변신은 우리 현대사의 격변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박정희는 절대 대세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일생을 통해 단 한 번도 ‘정의로운 소수’에 참여하거나 동조한 적이 없었다. 사회적 약자의 편을 든 적도 없다. 대세에 편승하더라도 그냥 끼어드는 정도가 아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핵심부에 들어갔다.

- 최상천, [알몸 박정희](사람나라, 2001), 157쪽

  박정희의 기회주의적 처신의 끝은 5.16 군사쿠데타로 정점에 다다른다. [실록 군인 박정희]에서 그려진 5.16 쿠데타 이모저모를 살펴보면 고작 3400여명의 군인을 동원된 명백한 불법 쿠데타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정권 수뇌부나 군 수뇌부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 또한 기회주의의 발로였다. 결국 멋들어진 혁명 공약을 내세운 박정희 세력들은 강한 권력에 취해 부패하기 시작했고, 정경유착과 인권유린이 도처에서 자행되었다.


박정희의 통치철학

  박정희는 [우리 민족의 나갈 길]이라는 저서에서 5.16 쿠데타를 찬양하면서 서구적인 민주주의가 아니라 우리의 사회적, 정치적 현실에 맞는 민주주의를 해나가야 할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민주주의는 행정적 민주주의(administrative democracy)로서 민주주의를 정치적으로 달성할 것이 아니라 행정적으로 구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행정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가장 핵심인 ‘국민에 의한 통치’에 대한 유보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지니고 있다. 결국 박정권은 이 개념을 통해 자신들의 군정을 민주주의의 일종으로 포장하려 했다.

- 전재호,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책세상, 2000), 48쪽

  주권자인 국민을 배제하고 행정적 방법을 사용하겠다는 것이 행정적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박정희 정권은 시종일관 한국적 특색을 담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행정적 민주주의를 비롯해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한국적인 체질과 이념에 맞는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박정희는 자신들은 민족적 자주성과 주체성에 기반한 민주주의 사상을 지녔다고 주장하며 야당의 민주주의를 사대주의적이며 서구 민주주의에 경도된 것이라며 비판했다. 하지만 한일회담이 졸속으로 처리되면서 민족적이라는 수사는 공허한 것으로 전락한다. 이처럼 박정희는 경제 발전을 위한 행정의 능률성과 원만한 정치적 협조를 강조하면서 이를 발판으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을 추진하게 된다.

  행정적 민주주의를 위시한 박정희가 주창했던 통치철학들은 실상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무시한 처사였다. 국민 개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철저히 제한하면서도 주권자의 뜻에 따르는 민주주의를 운운한 것 자체가 모순이었다. 권력자가 자신이 국익이라고 믿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 행정적 수단을 총동원하고 국민들의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의 기회를 억압하는 것은 결코 민주주의가 아니라 전체주의에 불과하다. 박정희의 행정적 민주주의는 파시스트의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는다.


박정희의 경제 발전 공로 분석

  박정희식 한국적 민주주의는 가난에 허덕이는 국민들에게 민주주의는 무의미하며, 일단 경제 발전을 해야한다는 논리이다. 많은 이들의 박정희의 무수한 과오를 부정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경제 발전 공로는 인정해야한다고 말한다. 대다수 국민들이 절대빈곤을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가 빈곤 퇴치에 기여한 점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아무리 휘황찬란한 경제 발전과 근대화라고 해도 국민 개개인의 자유의지가 훼손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과오다. 장면 정부가 혼란을 수습하고 경제 발전에 박차를 가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장면 내각이 들어선 지 18일 만에 쿠데타 모의를 한 육사 8기생들의 기록으로 보아 박정희 일파의 쿠데타 이유가 장면 정부의 무능과 부패였는지도 의심스럽다. 5.16 쿠데타는 합법적인 정부를 통한 산업 근대화와 경제 발전의 가능성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이런 가능성 박탈에 대한 비판은 경제 발전의 공로가 아무리 커도 가릴 수 없는 허물임에 분명하다.

  물론 박정희가 당대의 시급한 과제였던 빈곤 퇴치에 기여했음을 인정한다. 잘 살고자 하는 국민들의 의지를 결집해서 대다수 국민들에게 믿음과 의욕을 가질 수 있도록 한 공로도 평가할만하다. 이렇게 군사 쿠데타로 인한 정통성 부재를 경제 발전으로 만회하려는 선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더라도 박정희의 업적은 상당 부분 세계 최악의 노동조건에 시달린 노동자들의 희생에 밑바탕을 두고 있다. 또한 박정희가 특출 난 능력이 있어서 국민들의 열망을 잘 조직해냈다고 하는 의견은 동감하기 어렵다. 그것은 결과지상주의라는 혐의를 벗어나기 힘들다.

  다만 박정희를 위한 변명을 할 점이 있다면 그의 성장전략이 빈부격차를 심화시켰다는 선성장 후분배 정책에 대한 비판이다. 미국이나 영국 같은 자본주의 국가들도 공업화 초기에는 분배의 편중이 심하여 노동자, 농민이 간신히 생계를 꾸려나갔고, 공산주의 국가였던 소련과 중국 또한 급속한 공업화를 추진하며 인민들의 소비 억제로 인해 굶주려야했다. 이 당시 대다수 국가들이 추진한 경제개발 전략의 폐해가 대략 비슷했던 것을 굳이 박정희 정권에게만 높은 잣대를 들이댈 필요는 없다.

  개발독재라는 미명 하에 이뤄진 박정희의 철권통치 없이도 민주정부를 통해 경제 발전을 제대로 수행해 나갈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확답을 내리기 힘들다. 혹자들은 박정희가 없었다면 국가역량을 경제 발전에 집중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그를 옹호한다. 물론 역사적으로 볼 때 사회발전이 모든 측면에서 골고루 이뤄지기 힘들고, 이상적 방안대로 실현되는 것도 아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하는 일에는 실수도 있고 다툼도 있게 마련이다. 60년대 당시 성숙한 민주의식을 가진 시민들과 집행력을 갖춘 정부관료들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합법적 민주정부가 통치한 기간은 너무 짧았기 때문에 섣불리 평가를 내리기 힘들다. 고작 1년 남짓의 혼란스러운 시절을 겪었다고 민주주의 싹을 잘라버린 것은 박정희와 쿠데타 세력이 자랑하는 경제 발전의 영원한 짐이 될 것이다.


박정희의 명백한 과오

  박정희의 경제 발전 업적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명확한 평가를 내리기 힘든 사안들이 많다. 하지만 박정희의 과오들은 비교적 명확하게 드러난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박정희의 유토피아는 인간성 개조를 통한 병영사회의 건설이었다.

그 사회는 무엇보다도 병영 사회였다. 지금까지도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향토예비군, 학도호국단, 민방위대, 학생 교련, 반상회라는 것을 통해 자신의 신민 전체를 군대식으로 편제한 것이 박정희였고, 긴급조치, 물고문, 전기고문, 야간통금, 장발단속, 치마단속을 통해 그 신민 전체를 ‘표준적 인간’으로 만든 것이 박정희였다. 어린아이들에게 ‘국민교육헌장’과 ‘국기에 대한 맹세’를 매일 외게 한 것도 박정희였다. 그 시절 애국가는 극장에서고 학교에서고 거리에서고 하루도 쉬임 없이 흘러나왔고, 신민들은 멈춰서고 기립하고 입다문 채 하루에도 몇 차례씩 경건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 고종석, [자유의 무늬](개마고원, 2002), 249쪽

  일사불란한 병영사회 건설을 위해 갖가지 인권유린이 다반사로 벌어졌다. 자신에 반대하고 민주화를 요구한 많은 이들을 혹독하게 처벌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며 문민정부 이후 당시 민주화 인사들이 국회를 비롯한 사회 각 분야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면서 복권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병영사회를 표방한 전체주의가 국민들을 세뇌하면서 국민들의 윤리의식 수준이 상당히 저하되었다. 군부독재가 장기화되면서 기업들은 상도덕 준수보다는 정권에의 밀착이 지상과제가 되었고, 일반 국민 사이에서도 금전만능주의가 심화되었다.

  일각에서는 인권탄압이 경제발전을 위한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항변하기도 한다. 이익집단 간의 다툼이 되기 쉬운 민주주의 제도의 맹점을 지적하며 강력한 사회통합이 경제발전을 위해 필요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권과 경제발전이 높은 상관관계가 있는지는 아직 규명된 바가 없다.

그런데 아직 개발독재로 인해 탄압받은 사람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데 그 독재자를 예찬하자고? 그건 인간의 길이 아니다. 일부 인간들이 부당하게 죽음을 당하고 고통받았다 해도 전체의 국부가 증대되었으면 그건 좋은 일이다고 말하는 건 극단적인 파시스트도 감히 공개적으론 하기를 꺼리는 말임을 알아야 한다. 그건 집에 들어가 이불 속에서 혼자 키득거리며 내뱉을 말이다. 그게 바로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니겠는가.

- 강준만, [인물과 사상] 2권(개마고원, 1997), 35, 36쪽

  오늘날 우리가 이만큼의 의회 민주주의를 비롯한 민주적 생활양식을 향유하고 있는 것은 군부독재에 저항한 민주인사들의 노고 덕분이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발전을 아무리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자유를 신장하기 위해 투쟁한 이들에 대한 평가도 이뤄져야 한다. 위의 글의 지적처럼 유신체제를 거치면서 부당하게 고통받은 사람들이 엄연히 남아있는데도 경제발전의 공로만을 찬양하는 것은 균형감각을 상실한 것이다.


박정희의 값비싼 교훈
  
  지금까지 살펴본 박정희에 대한 평가에서 경제발전 공로에는 상대적으로 박한 점수를 주고, 과오는 큰 것으로 본 것은 개인적인 편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이상 이 땅에 박정희 등장할 수 없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인권을 유린하며, 자유를 억압하면서 경제발전에 올인하는 것에 국민 대다수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잖은 국민들이 생존의 문제를 해결해보고자 박정희의 개발독재를 지지했더라고 하더라도 이제는 시대적 환경이 그 때와는 판이하다.

  경제침체를 빌미로 박정희 향수가 조금 피어나는 것까지는 너그러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박정희 추종자들이 과거 추억을 넘어 과거의 부활을 노리는 것에는 단호히 반대할 것이다.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말을 듣기보다는 서로 논쟁하고 협력하려는 개인 자유의지의 총합이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 사회 제반시스템을 정비해나가고 세계화 시대의 무한경쟁의 파고를 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하거나, 우리 손으로 뽑은 대표자들에게 맡길 것이다.

  결국 박정희의 가장 큰 업적은 역설적으로 이 땅에 박정희 같은 파시스트들의 등장을 다시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값비싼 교훈을 남겼다는 점이다. 아무쪼록 현재의 경제침체를 보란 듯이 극복해서 박정희의 망령을 잠재우는데 각 경제주체들의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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