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스타크래프트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이 요구됩니다. 벙커에 마린이 없는 광경이 우습지 않은 분, 오버로드 한 부대로 공격을 떠났다는 에피소드에 별다른 감흥을 못 느끼시는 분들은 이해하기 힘드실 겁니다^^;)

가끔은 대체 무슨 재미로 사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웬만한 컴퓨터 게임들은 거의 못하고, 잘하거나 좋아하는 운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노래방에서 한 곡 뽑는 흥겨움을 즐길 줄도 모르고, 영화, 콘서트, 문화행사 등을 크게 즐기는 것도 아니며, 당구, 카드 같은 잡기에도 젬병이다. 이렇다 보니 사람 만나 노는 것의 대부분이 마실 거리 나누며 담소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궁궐 답사 같은 것도 다녀봤으나 번번이 파트너 구하기가 힘들었다.^^;


내가 대중성 확보에 아무리 혈안이 되어 있다고 한들 사교 수단이 변변치 않으니 진전이 있을 리가 없다. 고작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책이나 붙잡고 있는 녀석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퍼진 것도 도무지 나머지 활동들이 전혀 안 보이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일 것이다. 물론 나는 삼국지 게임을 열성적으로 즐기기도 했고, 만화책도 어지간히 읽었으며, 체스는 둘 줄 안다며 같잖은 변명을 둘러 대보겠지만 별무신통이다. 게다가 담소를 즐긴다면서 적당히 맞장구 치기보다는 괜히 시비 걸고 어줍잖은 독설을 내뱉어 분위기 깨는 경우도 다반사다. 이렇다 보니 무슨 재미로 나 같은 놈과 놀아줄까라는 역지사지도 충분히 해볼 수 있다.^^;


내가 중3 때 PC방이 등장해서 지반을 꾸준히 넓혀가더니 1시간에 2000원에서 1000원으로 떨어지자 급속도로 확산이 되었다. 단연 스타크래프트(이하 스타)의 인기는 PC방의 전파와 함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고등학교 입학 후에 남학우들의 태반은 틈만 나면 창동 근처 PC방을 애용하며 스타로 울고 웃었다. 그 나이 또래가 대개 그랬듯이 남학우들끼리 나누는 대화는 대학이나 공부 관련한 내용을 제외하고는 스타에 관한 전략과 순위 싸움, 누구누구가 사귄다고 하던 연애담이 가장 뜨거운 감자였다.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두 뜨거운 감자를 거의 거들 떠도 보지 않았다.


고등학교 학기초의 어수선함도 잦아들었지만 남학우들의 스타 사랑은 식지 않고 유지되었다. 2학기 들어 강원도 설악산 등지로 수학여행을 가는 버스 안에서 남학우들은 차창 밖의 군부대를 지나치며 벙커가 어쩌니, 마린이 어쩌니 하는 이야기를 나누며 박장대소할 때 무슨 소리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어 답답했다. 그야말로 소외감이란 것을 절실히 체험했다고나 할까. 결국 그 소외감을 극복하고 대중성을 확보하겠다는 일념 하에 11월 어느 날 PC방 무리에 섞여 낯선 곳으로 향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나의 모범생적 감수성 오락실을 꺼리는 것에 모자라 거의 죄악시했다. 100원짜리 동전을 넣는 투입구가 마치 지옥의 문인 것처럼 착각을 할 정도였다. 그런 내게는 크나큰 도전이었던 셈이다.


사실 PC방행이라는 거사를 치르기 전에 철저한 사전 준비를 해놨다. CD를 구해 게임을 집 컴퓨터에 깔아서 기초적인 것을 미리 익혀둔 것이다. 매뉴얼을 보며 각 유닛과 건물의 특징들을 외우고 익혔다. 책을 보며 게임을 습득하는 나를 보며 대다수 친구들이 세상에 게임은 하면서 배우는 거라며 애정 어린 충고를 해주었지만 일단 내 식대로 했다. 여하간 나름의 준비를 갖추고 PC방의 한자리를 꿰차고 앉아 전투 준비를 했다. 어디서 주워들었던지 처음 하는 사람은 프로토스가 괜찮다는 말에 프로토스를 선택해서 첫 대전을 펼쳤다. 아마 4대 4 팀플레이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전력이 0인 내가 끼어 들어 균형을 맞추려면 4대 4 팀플 정도는 해야했다.


(당시에 대규모 인원이 함께 다니는 경우가 많아서 심할 때는 4대 4 팀플을 두 개 동시에 진행하고도 사람이 남아 기다리면서 교체하기도 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서울외고 6기 중국어과 남학우가 두 반 통틀어 45명 남짓인데 그 절반이 한 PC방에서 하나의 게임을 주고받고 하는 진풍경이 한 동안 벌어졌던 것이다. 스타의 광풍이 조금 사그라지고서야 참전용사(?)들이 10여명 전후로 줄어들어 나중에는 4대 4보다는 3대 3이나 2대 2 정도의 팀플을 즐기게 된 것으로 기억한다)


주워들은 빌드오더를 구사해서 일곱 번째 프로브로 파일런을 짓고 아홉 번째 프로브로 게이트웨이를 지어 마침내 질럿을 한 기 생산해냈을 때 왠지 모를 흥분에 휩싸였던 것이 생생하다. 아 드디어 공격유닛이 나왔으니 나도 공격을 갈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흐뭇했던 것 같다. 질럿이 차곡차곡 쌓였고 저글링 몇 마리가 정탐을 왔으나 질럿으로 가볍게 해치우니 의기양양해졌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무탈리스크 몇 마리가 내 진영으로 날라 오는 것이 아닌가. 나름대로 공부한다고는 했는데 질럿은 대공능력이 없다는 것을 깜빡했던 것이다. 결국 프로브는 몰살당하고 넥서스가 파괴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내 첫 참전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이 났다.


대공능력의 부재라는 패인 분석을 통해 대공 능력을 위해 내가 꺼내든 방안은 포톤캐논이었다. 드래군을 뽑으려면 가스도 채취하는 등의 번거러움이 있다보니 초심자가 취약한 초반 러쉬를 막기 위해서도 포톤캐논은 유효한 수단이었다. 캐논에 맛들인 나는 그 이후 포톤캐논 꽃밭을 즐겨 썼는데 상대편에는 곤욕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깍두기 신세이니 불쌍해서 차마 초반에 쳐들어가지는 못하겠는데 시간만 좀 주면 포톤캐논 꽃밭을 만들어서 괴롭히니 계륵인 셈이다. 특히 무한맵에서는 자원 걱정이 없기 때문에 혼란스러움을 틈타 중앙에 포톤캐논 꽃밭을 가꾸어 놓으니 얼마나 얄밉겠는가.^^


나의 이 너무 단조롭고 예측 가능한 게임 진행을 바꿔보라는 많은 권유에도 불구하고 나의 포톤캐논 사랑은 변할 줄 몰랐다. 포톤캐논으로 충분히 방어하고 질럿, 드래군만 열심히 뽑아 아군의 병력에 보탬이 되는 것 정도로 2년여를 버텼다. 한 번은 내 자신도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스를 연상시키는 똑같은 플레이에 지겨워진 나머지 전략을 바꿔 다크템플러 기습을 했는데 대성공을 거둬 상대편 일꾼들을 상당수 잡는 쾌거를 거두기도 했다. 아마 그 때가 스타를 하면서 거의 유일하게 칭찬을 들었던 것 같다. 대개는 포톤캐논 그만 좀 쓰라고 질타를 받았으니 말이다.^^;


가끔 기회가 되면 스타를 했지만 내 스타 실력은 전혀 늘지 않았고 나 또한 스타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유한맵에서는 멀티를 해야하는데 타이밍 잡아 하기가 너무 힘들었고, 단축키를 별로 못 익혀 마우스로만 사용하려니 한계에 부딪혔다. 게다가 유닛 컨트롤 같은 것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인공지능을 신뢰하는 자유방임주의를 펼쳤으니 잘 될 리가 없다. 자신이 못하는 것을 재미나게 오래도록 하기란 힘든 것이 인지상정이라. 대학에 와서는 어쩌다가 팀플을 몇 번 했을 뿐 스타를 할 일이 별로 없었다. 대신 다른 사교 수단으로 위닝을 배웠고, 고스톱을 한 번 배워 보고 싶어서 스스로 세이 고스톱에 빠져보기도 했다.^^;


올해 들어서는 PC방에서 스타를 한 것이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내 손에서 멀어졌다. 그런데 손에서는 멀어진 스타가 최근에 눈에서는 떠나지 않는다. 지난 3월 중랑구 묵동으로 이사온 집에 케이블 방송 몇 개가 나오는데 그 중에 온게임넷이 있다. 여름방학 끝날 무렵 시간 때우기용으로 몇 번 봤는데 캐스터와 해설자들의 구수한 입담과 프로게이머들의 기발한 전략과 재치 있는 컨트롤을 접하면서 재미를 느꼈다. 스타리그, 프로리그, 듀얼 토너먼트, 챌린지리그 등의 대회들이 쉴새 없이 이어지고 희비가 엇갈리는 프로게이머들의 모습도 흥미롭다.  


한 친구는 스타가 이제는 어른들의 바둑이나 장기처럼 부담 없이 즐기는 대중적 놀이가 되었다며 의미를 부여했다. 화려한 그래픽과 매혹적인 스토리로 자극하는 게임들이 쏟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타의 위세가 이처럼 대단한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나의 스타 중계방송 애청이 한 때의 유행으로 끝날지 모르겠지만 무척 흥겨웠던 킬링타임으로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처음 스타를 배우려고 했던 대중성 확보를 위한 사교 수단으로서의 목적은 거의 실패한 셈이지만 쓸데없는 비용 지출이라서 아깝지는 않다. 가끔 아직 집에 남아 있는 스타 미션 게임을 치트키 쳐서 격파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E-SPORTS라고 불리는 스타가 우민화 정책의 일환인 3S(스포츠, 스크린, 섹스)의 그늘을 답습할지도 모른다. 지난 이라크 침략 전쟁에서 탱크를 위에서 진군 속도를 과시하던 종군 기자의 모습에서 고작 시즈 탱크를 타고 가는 테란의 병사를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하지만 현실세계의 다양한 이슈들에 침묵하지 않고, 도피하지 않는다면 게임은 게임으로 즐기면 그만이다. 예전에는 소설 읽기를 즐기던 내가 요즘에는 문학작품을 도통 손에 못 잡고 있다. 사진 찍히는 것을 피하던 내가 요즘은 사진광 소리를 듣는다. 온게임넷 애청자로서 틈만 나면 채널을 그 쪽에 고정시키는 나를 주위 친구들은 놀란 듯이 바라본다. 인생은 무상하고, 무상한 덕분에 사람은 늘 변한다. 그 재미에 이 무료한 삶이 그나마 살아 볼만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세 가지 유형의 우정을 있다고 말했다. 첫째로 서로를 사귀는데서 비롯되는 즐거움에 바탕을 둔 쾌락을 위한 우정, 둘째로 교제의 유용성에서 비롯되는 우정, 셋째로 서로의 존경에서 비롯되는 우정인 덕성을 위한 우정이 그것이다. 어떤 곳에서는 세 번째 우정만이 참된 우정으로서 가장 가치 있다고 말하고, 어디선가는 좋은 우정을 위해서는 이 세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원전을 확인해보지 않아서 어느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내가 어느 책에서 언뜻 봤을 때는 앞의 해석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뒤의 해석이 더 타당하다고 본다.


얼굴 보며 담소 나누는 것이 즐거운 사람과 사귈수록 이득이 있고, 배우는 점도 많아 유익한 사람과 서로가 존경하기 때문에 경애하며 만나는 사람을 두부 자르듯이 나눌 수 없는 것 같다. 결국 지인들과 사귈 때 이 세 가지 우정이 다 깃들어 있어야 만남마다 설레고 흥겨울 수 있을 것이다. 한바탕 술자리가 지나면 허무해지고 다음날 숙취가 가시자마자 전날 밤의 죽네 마네 한 이야기도 치기로 취급된다. 땀흘린 밤샘 작업이 끝나면 흩어지게 되고 다음날 새로운 동업자를 찾아 새로운 계약을 맺기 위해 헤매야 한다. 상호간의 존경만 가득하면 무미건조할 따름이고 다음날 살 궁리를 하다 보면 알맹이 없는 한담은 잊혀지고 번드르르한 칭찬도 퇴색한다.


스타를 하며 우정을 키워나갔던 상당수 고등학교 친구들의 경우에서 보듯이 이 세 가지 우정의 유형은 특히 어느 한 쪽이 더 강할 수는 있어도 어느 하나 빠진다면 관계는 지속되기 힘들다. 내키지 않았던 술자리에서 제법 진지한 이야기로 인생 고민과 세상 한탄을 나눌 수도 있고, 일 때문에 만난 사람에게서 의외의 매력을 느끼고 정신적인 교감을 나눌 수도 있다. 세상에 무조건 안 되는 일이란 거의 없다. 스타에 영원히 관심 없을 줄 알았던 내가 스타 중계 방송에 푹 빠져 있듯이 세상만사 함부로 가름하고 제한해서는 안되겠다. 사람을 만날 때도 편견을 버리고 열린 자세로 대해야 한다. 모든 가능성을 함부로 부정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겠다. 끝으로 더 이상 재미없는 놈으로 낙인찍히기 전에 나란 놈에게도 무언가 유머러스한 구석이 있음을, 나랑 더불어 즐길 거리가 있음을 개발하고 소개해야겠다. - [憂弱]


추신 - 요즘 프로토스 유저들이 죽을 쑤고 있는 것 같다. 엄연히 프로토스 유저인 나로서는 프로토스의 선전을 기원한다. 엄혹한 시절이 끝나고 찾아드는 서광은 아름다울 것이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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