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성탄절날 신촌에서 열린 고종석 팬클럽 오프모임에 참석했다. 고종석 선생님은 현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계신데 [오늘]란을 연재하시고, [이런생각]이라는 칼럼을 기고하신다. 고종석 선생님은 내게 개인주의를 당당히 말할 용기를 주셨고,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며 살 수 있도록 해주신 내 영혼의 스승이다. 언젠가 한 번 꼭 뵙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일찍 만나 뵐 수 있어서 크나큰 행운이었다. 성탄절에 오붓한 시간을 보냈을 그 어느 커플도 부럽지 않았었다.^^; 그 날 모임이 끝나고 고 선생님께 편지를 보냈다. 다음은 편지 전문이다.


[성탄절날 인사 드렸던 새우범생입니다^^]

안녕하세요. 고종석 선생님...

드디어 이렇게 전자우편 한 번 날려보게 되었네요. 저는 지난 성탄절에 있었던 고종석 팬클럽 오프 모임에 있었던 새우범생입니다. 지금은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이고요. 개인적으로 성탄절이 중요한 휴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선생님을 뵐 수 있어서 제 짧은 생애에 최고의 성탄 선물이 되었습니다. 산타할아버지께서 정말 귀한 선물을 주신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제게 개인주의를 당당히 말할 용기를 주셨고,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며 살 수 있도록 해주신 제 영혼의 스승이십니다. 사람 앞에서 막상 그 사람 칭찬을 못하는 성격 탓에 이 말씀을 못 드렸네요. 선생님께서 이런 치사(致謝)를 별로 좋아하시지 않는 것 같아 더 이상의 낯간지러운 말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냥 개인주의나 자유라는 소재로 이런저런 말씀을 드려보고 싶네요. 요즘 개인주의의 물결이 대학가를 휩쓸고 있다고들 합니다. 저 또한 진짜 개인주의의 물결이라면 더 거세져서 한국 사회에 너무 깊게 찌들은 집단주의와 획일적 문화를 걷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의미 있는 개인들이 부딪힐 때 우리 사회가 좀 더 빛날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저마다 개성, 개성하지만 획일화된 개인, 행복마저 유니폼이 되어버린 개인들이 되어가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도 지울 수 없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추구하는 개인주의자의 모습은 집단에 피신하지 않고 내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자세, 나의 생각과 판단에 책임을 지겠다는 마음, 남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진정한 개인주의자라면 타인과의 차이를 존중하지만 그것이 차별이 되는 것을 반대해야겠고요. 이는 모든 사람이 개성의 향연을 누리면서도 그런 개성들 사이에 현저하게 다른 가치가 부여되지 않도록 하는 세상이겠지요.


미국의 철학가, 소설가인 에인 랜드의 “난 결코 다른 사람을 위해 살거나 다른 사람더러 나를 위해 살아달라고 부탁하지 않겠다”는 말에 무릎을 쳤습니다. 저 또한 제 자신이 이기적 효용함수를 가졌으며, 이타주의적 희생 모델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집단의 이익에 복무하라는 전체주의적 억압에 불편함을 느끼고, 집단의 이름으로 저나 다른 개인의 이익이 심하게 훼손될 때 언짢아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싶습니다.


끝으로 중요한 것은 소수파가 되었을 때의 불편함과 두려움을 다수파가 되어서도 잃지 않는 양심적 기억력일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다수파일수 없다면 저는 언제나 소수파가 될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개인주의가 내세우는 똘레랑스는 일종의 보험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남과 다른 것에 마음을 열어야하는 보험료는 그리 싼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보험료의 부담쯤이야 마음 편히 소수파의 위치에 있을 수 있다는 보험금의 혜택에 비추어볼 때 확실히 남는 장사로 보입니다.^^: 이처럼 개인주의는 고립주의가 아니며, 궁극적 소수로서의 다른 개인과의 연대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겠지요.


대략 이런 생각들을 정립할 수 있는 데까지는 선생님의 영향력이 지대했습니다. 제가 괜히 영혼의 스승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니까요.^^ 정말 진짜배기 개인주의자가 되기는 너무 어렵네요. 정말 의미 있는 개인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고독도 견딜 수 있어야 하고, 용기도 제법 있어야 하겠고, 타인과 열린 마음으로 교류할 자세도 되어 있어야 하니까요.


지난 학기 과제물 작성을 위해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읽은 기억이 납니다. 그 때 과제물을 하면서 선생님 글의 다음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기독교 역사나 마르크시즘 역사는 사랑의 이름으로 이룩한 증오의 역사다. 그들이 내건 사랑이 그리 크지만 않았더라도, 그들이 역사 속에서 실천한 증오의 크기가 그렇게 엄청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나 마르크시즘을 포함한 모든 유토피아니즘이 그려온 유토피아는 먼 미래나 과거, 또는 외딴 섬에 설정돼 있다. 그들이 그리는 유토피아가 지금 이곳과는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리는 사랑, 우애는 무책임하게 클 수 있었고, 그 반동으로 그들이 실천한 증오도 덩달아 그리 클 수 있었다.

- 고종석, [자유의 무늬](2002), 개마고원 刊, 233~234쪽


지적 쾌락을 추구하는 풍족한 유토피아 사회의 주된 특징은 획일성이었습니다. 2년에 한 번씩 똑같은 모양/색의 옷을 주기 때문에 의복의 자유도 없고, 이혼도 의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고, 여행 허가증을 일일이 끊어야 해서 이동의 자유도 없었고 말입니다. 특히 각 가정에서의 식사보다는 공공 장소에서의 공동 식사를 하는 장면이 압권이었습니다. 모어는 그럴듯하게 묘사했지만 제가 보기에는 도덕적인 설교를 듣고, 연장자들의 평가를 상시적으로 받아야 하는 숨막히는 식탁 풍경이 그려졌습니다. 물론 종교적 관용이나 교육의 평등 같은 좋은 부분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통제사회라고 느껴졌습니다. 라파엘이 그렸던 유토피아는 엄격한 통제 메커니즘이 24시간 돌아가야지 겨우 실행되는 초라한 몰골이었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유토피아 사회는 사랑이 크기 때문에 더욱 엄격하게 감시하고 처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봅니다. 절대선의 경지에서의 이탈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유토피아 시민들을 안심하게 만들고, 반대에 대한 철저한 탄압이 유토피아 사회를 지탱하는 힘일지도 모릅니다. 결국 과제물을 쓰면서 유토피아는 개인의 행복을 최대화시켜줄 것처럼 보이지만, 그 행복은 집단의 위계질서 앞에 순응하고, 전체주의적 생활양식을 받아들이는 것에 불과하다고 혹평을 했습니다. 결국 사적 영역을 말소시키고 거대한 집단 속에서만 안온함을 느껴야 하는 것이라고 게거품 물고 손가락질했답니다. 어쩌면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와 종이 한 장의 차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유토피아의 열정이 지나쳐서 개인의 공간을 소멸 당하고, 순응 속에서만 자유를 느낄 수 있게 된다면 그런 디스토피아도 없겠지요.


선생님께서도 많이 지적하셨지만 청결과 순수에 대한 강박과 조급증 때문에 자신의 네모 반듯한 기준에 들어맞게 하기 위해 여분을 덜어내고, 부족함을 억지로 채우는 무리수를 두는 경우를 역사상 많이 보아 왔습니다. 십자군 전쟁도 이교도의 손아귀에서 성지를 수복하자는 거룩한 사명을 띠고 시작되었고, 마오쩌둥의 문화혁명도 혁명사상 고취를 통해 인민들에게 보다 나은 삶의 약속했으며, 최근 미국의 이라크 침공 또한 이라크에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주기 위해서라고 강변하고 있으니까요.


유토피아는 현실에 대한 불만을 극복하고 보다 나은 삶에 대한 열망에서 출발하고, 이를 위한 노력과 욕망이 인류를 진보시킨 원동력이었음을 부인하기 힘듭니다. 유토피아 사상은 여전히 살맛나는 세상을 향한 의지의 표상일 것입니다. 하지만 유토피아로 치장한 전체주의는 더 이상 등장해서는 안되는 비극의 씨앗입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동질성으로 무장하기보다는 다양성으로 흩어지는 사회를 건설해야겠지요. 특히 사회적, 문화적 소수파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진짜 유토피아로 가는 길목일 것입니다.


요즘 들어 추상적인 이상에 대한 합의는 참 어렵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특히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절대선과 절대악이란 사실상 거의 존재하지 않고, 선악이 복합적으로 존재하기 일쑤입니다. 미국의 네오콘 같은 사명감에 불타는 무식쟁이들만 있다면야 옥석을 가리기 쉽겠지만, 대개는 나름대로의 논리를 가지고 맞서게 마련이니까요. 가령 신자유주의 논쟁만 해도 WTO는 전세계 민중을 착취하는 미국식 세계화에 불과하다는 입장과 WTO가 실현할 자유무역과 다자통상체제로 말미암은 경제적 다극화가 우리가 살길이라는 입장과의 간극은 너무나 벌어져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악의 화신도 아닐 것이고, 그렇다고 만병통치약은 더더욱 아닐 것입니다.


이처럼 대립하는 사회 개혁의 방법론에 대해서는 숙고된 균형감각이 절실합니다. 제 아이디 새우범생은 이렇게 상반되는 두 상반되는 고래 같은 주장들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새우등 터져 가면서 배우자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부지런히 새우등이 터지다보면 가끔 콩고물도 떨어지고 그러겠지라는 희망을 안고 오늘도 싸움 구경에 눈이 둥그래지는 수 밖에요.^^;


자유는 본질적으로 차이를 낳고, 이 차이에는 여러 종류의 불평등이 포함됩니다. 진정한 유토피아를 꿈꾸는 이라면 차이가 차별이 되는 것을 막고, 불평등이 계속 고착화되는 것에도 고개를 가로 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와 상호 존중이라는 가치를 미래의 유토피아 건설을 위해 희생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개인의 자유와 숙고된 균형감각 위에 점진적으로 사회개혁을 추진해 나갈 때 유토피아는 현실로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사실 이 대목은 칼 포퍼의 점진적 사회공학을 수입했답니다^^;).


여하간 제 생각을 솔직히 드러냄으로써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티격태격하다가 생채기 나는 것도 기꺼이 감수하고 싶습니다. 또한 제 사상과 양심에 비춘 편들기하지 않는 편파적인 놈이 되고 싶습니다. 가끔은 오해받는 두려움에 몸서리를 쳐야할지도 모르지만,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상도덕을 준수해가며 열심히 살다보면 공자의 말씀대로 덕불고 필유린(德不孤必有隣)이 실현될 날이 오겠지요. “우리는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는 사르트르 말을 늘 가슴 한 구석에 품고 이 저주가 축복이 될 수 있도록,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하지 않는 녀석이 되는 것이 제가 꿈꾸는 저의 모습입니다.


그냥 선생님의 글들에서 깨우쳤던 내용들을 두서 없이 늘어 놓아봤습니다. 너무 횡설수설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네요.^^; 경영학도로서 손해보는 장사를 싫어하는 만큼, 제가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을 정도의 역량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겠지요. 아마 배우는 학생 입장에서는 이것이 가장 시급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제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배우고 생각해야 하는데 이 게으른 몸뚱이 때문에 근심만 한가득입니다.^^;


평소 흠모하고 사숙하던 선생님을 뵐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고, 더 듣고 싶은 이야기도 많았는데... 쑥스러움이 많은 성격이라 다 못한 것 같아 아쉽네요. 기회가 되면 또 뵙고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선생님 글 잘 챙겨 읽으며 치열하게, 자유롭게 살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아무쪼록 훈훈한 세밑 되시고 늘 건승, 건필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다시금 만나 뵙게 되어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 [憂弱]
Posted by 익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