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光化門)은 실로 우리 근현대사의 비극을 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일제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 위해 경복궁 흥례문을 헐고 광화문마저 철거하기로 하였으나 이를 비판한 일본문예운동가 야나기 무네요시 등의 도움으로 1926년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정문 자리에 옮겨지게 된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광화문은 한국전쟁 당시의 폭격으로 파괴되어 문루가 소실되고 석축만 남게 된다. 1968년 박정희가 복원을 했을 때는 문루를 콘크리트로 처발라버렸다. 이렇게 광화문에는 외세침탈과 동족상잔, 개발독재의 그늘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1968년 복원 때 석축 자재들은 조각난 채 콘크리트 자재와 뒤섞이게 되고, 목조 건축물을 문루는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 단청을 입혀 완전히 바꿔 버렸다. 재정 상황 등으로 인해 비싼 목재보다는 가격이 저렴한 콘크리트를 사용했다는 항변을 인정한다고 해도 너무나 어이없는 복원이다. 영구보존이라는 명분이 무색할 정도로 고유의 옛 정취는 사라져버렸다. 이 때문에 광화문을 원래의 목조 건물로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이미 문이 앉아 있는 방향도 틀어져 있고 위치도 뒤로 물러나 있으며, 서십자각 없이 동십자각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등 전체적으로 흐트러진 모습도 바로잡아야 한다는 의견이 높다.


그런데 박정희의 친필인 현재의 광화문 현판을 교체하겠다는 문화재청의 발표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박정희가 쓴 현판을 그대로 두자, 목조 건물로 복원할 때까지는 놔두자, 바꾸더라도 한글 현판을 쓰자, 옛 모습을 살려 한자 현판을 써야 한다까지 다양한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현판에 대한 폭넓은 의견 수렴이 있어야겠지만 현판 교체는 적절하다고 본다. 독재자의 글씨를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에 떡 하니 걸어놓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목조 건물로 복원할 때까지 놔두자는 것은 시간 끌기에 불과하다. 실현 가능한 것부터 차근차근 해나가면 된다. 사실 박정희가 엉망으로 복원해놔서 제대로 복원하려면 천문학적 비용이 든다. 비용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닌 현판 교체까지 정색을 하고 반대할 이유는 없다.


어두웠던 과거의 진실을 밝혀내자는 법안 통과에도 게거품 물던 이들이 이제는 현판 하나에도 무슨 미련이 남아 난리법석을 치고 있다. 역사라는 것은 과오를 반성하고 오늘날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것인데도, 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의 더러운 과거만을 옹호하는 이들이 현판 하나까지도 손대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들 눈에는 최근 공개된 한일협정 관련 문서들에서 일제 피해자들의 청구권을 사실상 포기하고 경제발전이랍시고 가로챈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경복궁의 각종 전각들이 일제의 손에 어떻게 훼손되었는지 모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독립운동의 성지인 탑골공원 정문에 박정희가 쓴 ‘삼일문’ 현판이 어색했듯이 광화문 현판도 박정희의 글씨가 있을 곳이 아니다.


철저한 파괴로 인해 본래의 10~15% 정도밖에 남지 않은 경복궁은 앞으로도 지속적인 보수, 복원이 있어야 한다. 문화유산 복원은 정치논리가 아니라 문화적 안목에서 이뤄져야 한다. 광화문 현판 교체는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이 논의해서 판단할 문제다. 우선은 문화재 전문가들의 역할을 존중하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 광화문 현판만 부라리지 말고 차분히 경복궁을 들어가서 우리 선조들의 문화의 향기를 맡고, 일제의 파괴 흔적을 곱씹어보자. 그리고 덧붙여 턱없이 부족한 문화재 관련 예산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곳곳에 방치된 우리의 문화 유산을 도두보자. 박정희 일개인에 대한 집착(?)은 스르르 녹아 없어졌음을 발견할 것이다.


한편 현판 교체 시에 한자를 쓸 것인지, 한글을 쓸 것인지의 문제가 남는다. 궁궐의 전각이나 사찰 등의 문화유산을 복원할 때 한자를 쓰는 것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으나 유독 광화문은 선뜻 망설여지는 것은 그만큼 광화문이 우리 문화유산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방증한다. 외국인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우리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 보니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한글 현판을 고집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한자 현판을 절대시할 필요도 없다. 한글 현판이 과거의 원형과 가치를 훼손할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또 한자 현판이 한글을 경시한다는 것도 억지스러운 주장이다. 하지만 적어도 광화문만큼은 한글 현판을 썼으면 한다는 명분도 만만치 않다. 세종로 쪽에는 한글 현판을 달고 경복궁 안쪽에다가는 한자 현판을 다는 등의 대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해 볼만하며 보다 많은 접점을 찾아야 한다.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우리의 문화유산은 어느 하나 성한 것이 없다. 경복궁뿐만 아니라 각종 문화유산들을 보수, 복원하는데 아낌없는 투자가 있어야 한다. 설령 옛날의 그 솜씨만큼은 못하더라도 보수하고 복원한 것이 훗날에는 또 하나의 문화유산이 될 수 있다. 이 마저 게을리 한다면 볼 것 없는 나라라는 오명을 벗지 못할 것이다. 이제 문화유산은 국가 경쟁력의 중요한 요소로 부상하고 있음을 깨닫고 전국민적인 사랑이 절실하다. 일본은 허구한 날 자신의 만행을 가리기 바쁘고, 중국은 호시탐탐 고구려사를 넘보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 역사와 문화는 우리가 챙겨야 한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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