久而敬之를 꿈꾸며

문화 2005. 2. 12. 04:35 |
1.
사람을 가늠하는 잣대는 저마다 다르다. 이러한 개인적 좋고싫음은 큰 합리성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개인적 기준으로 사회적 차별의 근거로 삼거나 폭력적으로 교정하려 한다면 문제가 될 것이다.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개개인의 미감은 존중받아야 한다.


가령 나는 포커페이스보다는 생긋 웃는 얼굴에 더 호감을 느낀다고 하자. 여기까지는 내 자유겠지만 포커페이스가 하는 말은 믿을 수 없다고 공언하고, 포커페이스에게 입꼬리가 귀에 걸리도록 웃는 훈련을 강제하는 것은 비합리성을 넘어 폭력성을 띄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내 옆의 사람은 포커페이스가 진중함이 있고, 카리스마 넘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살아가며 많은 사람을 만날 때 제 나름의 기준조차 없다면 늘어만 가는 인간관계는 범속에 빠지게 될 것이다. 옛사람의 신언서판(身言書判)처럼 꼼꼼히 따질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름대로의 합리성을 갖추려고 노력한 개인적 잣대는 가질 필요가 있다. 박노해는 다음과 같은 잣대를 제시한다.


인간성을 평가하는 잣대, 그 사람됨과 인간의 격(格)을 판단하는 단 하나의 잣대를 고른다면 나는 약자에 대한 태도를 들겠다. 자기보다 힘있는 사람들을 섬기고 자신과 같은 수준의 사람들과 서로 주고받는 것은 누구나 한다. 그런 ‘연줄 잡기’와 ‘패거리 짓기’가 너무도 심각하여 부패와 비리의 온상이 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문제는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이다. 노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 가난한 이웃에 대한 태도, 여성과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태도, 그것이 가치관의 핵심이고 인간다움의 중심 잣대가 아니겠는가.
- 박노해, [오늘은 다르게](1999), 해냄, 45~46쪽


한동안은 박노해의 잣대를 받아들여 써왔다. 도덕경 77장의 “하늘의 도는 남는 데서 덜어내어 모자라는 데에 보태지만, 사람의 도는 그렇지 않아 모자라는 데서 덜어내어 남는 데에 바친다(天之道, 損有餘而補不足, 人之道, 則不然, 損不足以奉有餘)”라는 구절이나 고종석의 “강자에게 고분고분한 사람이 약자에게 휘두르는 주먹만큼 보기 흉한 것도 없다(고종석, [참여정부의 抑弱扶强], 한국일보, 2003/11/26)”는 말씀도 새기고 있었다.


2.
그러던 중에 최근에 사람을 바라보는 새로운 잣대를 세워봤다. 강유원의 다음과 같은 독백에 영감을 얻었다.


사람이 사람인 까닭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과 '옳은 것/ 그른 것'을
구별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의 그른 점을 지적하면,
아니 그에 관한 사실을 밝혀 보이면
내가 그를 싫어하는건가?

- 강유원 블로그( http://armarius.net ) Kommentar 20 Nov. 2004


자신의 그른 점을 지적하는데 자신을 싫어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은 미성숙하다. 건설적인 토론을 인신공격으로 제멋대로 오해하고 물타기를 하는 사람은 비겁하다. 칼 포퍼는 말에 대한 비판과 사람에 대한 비판을 구분해야한다고 설파한다.


포퍼는 물질의 세계(세계1), 주관적 마음(정신, 의식)의 세계(세계2)와 구별되는 객관적 사상의 세계, 마음의 산물이면서도 그 인식주체와 독립해 존재하는 세계3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상, 언어, 윤리, 제도, 과학, 예술 등을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어떤 이론이나 지식을 말하는 사람과 그가 내놓은 이론, 지식은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FTA 체결에 찬성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누군가 그 사람이 내놓는 찬성 논거를 살펴보지는 않고 그는 농민들을 다 죽이려는 나쁜 놈이라고 손가락질한다고 치자. 이는 인식의 세계를 잘못 짚어 세계2와 세계3을 분간하지 못한 것이다. 그 사람의 주장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기보다는 인간 됨됨이를 걸고넘어지는 것, “사람=그 사람의 말과 글”이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보면 지식의 생산자를 그 지식과 동일시하여 어떤 사상이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경우, 그 사상의 산출자를 없애버렸다. 이는 정치적 해결은 될 수 있어도 학문적 해결은 될 수 없다. 이러한 방식의 정치적 해결은 항상 폭력을 수반한다. 열린 사회는 이러한 정치적 해결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 신중섭,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1999), 자유기업센터, 114쪽


친구가 어떤 상황에서는 부적절한 판단을 내렸다고 생각된다면 그 견해의 부적절함을 지적하고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 친구 된 도리다. 혹시 내가 괜히 듣기 싫은 소리를 해서 감점이나 당할까봐 그냥 입에 발린 소리나 해주는 것이나 애정 어린 쓴소리를 경청할 줄 모르고 이 사람이 나를 싫어한다며 멀리하는 것이나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내가 생각하는 바를 분명히 밝히지 못하는 것은 친구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배반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물론 타인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비판하는 것(혹은 미감을 거스르지 않게 하는 것)과의 균형을 잡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진정성이 담긴 내 선의를 인정받기란 늘 힘든 일이지만 맹자가 말했듯이 “선을 권장함은 벗의 도리(責善 朋友之道也)”일 것이고, 칼 포퍼의 제언처럼 “타인의 행복을 보살펴 줄 권리는 그들의 가까운 친구에게 한정된 하나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이 “도리”와 “특권”은 때로는 쓴소리도 할 수 있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3.
앨빈 토플러는 [미래의 충격]에서 미래사회가 영속성보다는 일시성이 두드러진 사회가 될 것임을 설파한다. 인간관계도 예외가 될 수 없어 총체적인 인간과 관련을 맺기보다는 그 사람의 한 부분에만 관련을 맺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 인간들도 빨리 스쳐가기 때문이다. 그는 급속히 변화하는 사회에서 개인의 이해관계가 끊임없이 변화하지 않는 것이 이상스러운 일이라며 인간관계의 단편화(파편화와 유사한 의미인 듯)와 자유는 병행한다고 주장한다(앨빈 토플러 著 장을병 譯, [미래의 충격](1986), 범우사, 88~108쪽 참조).


토플러는 개인의 사회적 활동을 “이제는 만나지도 않고 이해도 달리하는 친구들 대신에, 새로운 친구들을 탐색하는 사회적 발견의 냉혹한 과정”이라고 표한다. 효용가치가 없는 옛친구들은 빨리 버리거나 잊고 살림살이에 보탬이 될만한 새 친구를 찾아야한다는 그의 주장은 유한책임을 바탕으로 한 계약관계가 자유롭고 경제적(?)이라는 사고에서 기인한다. 그의 탁견에 일정부분 동감을 하면서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풋풋함만큼이나 세월의 무게가 가져다 주는 푸근함을 좋아하는 나는 앞으로도 “貧賤之交 不可忘(가난하고 천할 때의 친구를 잊어서는 안된다, [후한서(後漢書)] 송홍전(宋弘傳)의 고사)”을 주문처럼 외울 것 같다.


관계맺음의 길고 짧음에 대한 논의를 넘어 내가 맺는 관계가 논어에 나오는 久而敬之(구이경지)와 같았으면 좋겠다. “오래되어도 여전히 공경한다”라고 해석하면 친해지더라도 존경심을 잃지 않고 범속에 빠지지 않는다는 뜻이 되고, “오래 사귈수록 공경하게 된다”라고 해석하면 오래 사귀어도 그 사람의 약점이 드러나기보다는 강점이 더욱 커진다는 뜻이 된다. 어느 것으로 해석하든 관계맺음의 이상향을 잘 나타내준 말이 아닐까 싶다.


久而敬之하고 싶다면 나와 다른 의견을 기꺼이 긍정적으로 검토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단지 자신의 의견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섭섭해하고 토라지는 것은 제 그릇의 작음을 선전할 뿐이다. 자신의 의견이 소중한 만큼 남의 의견이 소중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과의 교제는 생선비린내를 면치 못할 것이다.


나란 녀석을 인간적으로 끔찍이 좋아하면서도 생각이 다를 때 함께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자기와 다른 의견을 말하는 이를 적대시하기보다는 서로간의 차이에 감사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가진 사람,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선의의 경쟁을 펼칠 마음이 있는 사람과는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꿔도 좋을 것이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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