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경주 답사 중에서 흥덕왕릉, 석불사, 황룡사터만 뽑아 이에 대한 감상을 적어본다)

수학여행의 추억

설 연휴에 경주 관람을 간단하게 했다. 초등학교 6학년 수학여행 이후 10년만의 경주 방문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때 서울시 노원구로 전학을 온 관계로 한달 사이로 경주 수학여행을 두 번 다녀왔다. 두 번의 경주 답사는 거의 비슷한 코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불국사, 석불사(석굴암), 첨성대, 천마총, 안압지(임해전지), 반월성, 무열왕릉, 김유신묘, 경주국립박물관 등을 둘러봤던 것으로 기억한다(이번 답사에서는 분황사와 황룡사터를 새롭게 가봤다). 문화유적을 끔찍이도 좋아하는 나이지만 초등학생 때까지 그런 것을 볼 줄 아는 혜안은 없었던지라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체 기념사진에서 지루함과 피곤함이 쌓인 어린이의 모습이 그 증거다.


그러나 연달아 있은 두 번의 경주 답사에서 인연을 끌어다 썼는지 중고등학교 때는 경주로 향할 일이 없었다. 중학교 때는 아이엠에프 사태로 인해 졸업여행이 취소되는 바람에, 고등학교 때는 강원도 설악산 등지로 떠나는 바람에 들를 기회가 없었다(다음해에는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다고 한다). 수학여행 하니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공주, 부여로 수학여행을 갔던 것이 떠오른다. 낙화암을 오르고 무령왕릉을 들어가 본 것이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특히 심각한 훼손으로 97년 영구폐쇄가 되기 전에 들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으리라.


비록 반강제적 성격이기는 하지만 수학여행을 통해 어린이들이 우리 문화유산을 처음 접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체계적인 역사 교육까지는 필요 없지만 적어도 우리 문화유산이 보잘 것 없고 하찮은데다 따분하다는 생각을 심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중등학교 이후에 우리 문화유산을 찾아보는 관심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도 첫단추를 잘못 꿰는 잘못이 크지 않을까 싶다. 유치한 구호이지만 진정한 세계화는 한국적인 것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사랑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외로운 흥덕왕릉이여!

본격적인 경주 탐방에 앞서 경북 경주군 안강읍에 위치한 할머니댁에서 머지 않은 곳에 위치한 흥덕왕릉을 찾았다. 다른 신라 고분들이 경주 시내나 근처에 포진되어 있는 것에 반해 흥덕왕릉은 농가 밀집지역에 외롭게 자리잡고 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하다가 표지판이 놓인 입구에 당도하면 휘어진 소나무들이 왕릉을 호위하듯이 빼곡이 들어서 있어 그제서야 왕릉이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지리상 떨어져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기는 하지만 흥덕왕릉은 신라 역대 왕릉 가운데서 규모가 크고 형식이 갖추어진 대표적인 왕릉의 하나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완비된 능묘제도를 나타내준다는 괘릉(원성왕릉으로 추정)과 비견될만하다.


큼직한 봉분 둘레 호석에는 십이지신상이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어 눈을 즐겁게 했다. 두 쌍의 돌사자와 한 쌍의 문인석과 무인석도 온전히 남아 있었다. 돌이끼가 좀 피었을지언정 천년도 넘는 세월을 지키고 서있었다. 근처에 이래저래 꺼이진 귀부(龜趺,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가 보였다. 비신(탑신)은 온데 간데 없고, 이수(螭首, 용의 형체를 새겨 장식한 비석의 머릿돌)도 보이지 않는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마다 비신도 깨어지고, 이수도 날라가고, 귀부도 쪼임을 당했을 것이다. 목 잘린 불상들마냥 온전한 것이 거의 없는 우리나라의 능비(혹은 탑비)는 수난의 한국사를 말없이 증언해주고 있는 셈이다.


흥덕왕릉은 귀부마저 많이 훼손되었음에도 천망다행으로 흥덕(興德)이라고 새겨진 비석의 파편이 발견되어 제 이름이나 찾을 수 있었다. 사실 신라 고분 중에서 무열왕릉과 흥덕왕릉 이외에는 확실하다고 알려진 왕릉이 거의 없다. 신라의 전성기를 열었던 진흥왕의 릉이 초라하기 이를 데 없어 많은 이들의 의심을 받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흥덕왕릉은 이런 면에서는 복을 받은 셈이다.


흥덕왕은 신라의 제42대 왕(재위 826~836)으로 청해진에 장보고를 두어 방비케 하고, 당나라에서 가져온 차 종자를 지리산 자락에 심게 해 우리나라 차 문화를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흥덕왕은 임금이 된 첫해에 왕비인 장화부인이 죽었는데, 11년 동안 죽은 장화부인만을 그리며 홀로 살았다고 한다. 그 후 소원대로 아내의 무덤에 합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질펀한 밤의 황제(?)가 있었던가 하면 이런 순애보도 있었다.


저승에서 달콤한 사랑을 나누고 있을 이들 부부의 무덤은 수 차례나 도굴 당할 정도로 관리가 소홀한 편이다. 봉분 주위의 호석을 보아도 도굴의 여파로 깨진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또 언제 신라 고분의 사슴뿔 모양 금관과 불꽃 모양 금관을 기대하며 장비를 챙기는 검은 손들이 나타날지 모를 일이다. 흥덕왕릉도 제대로 발굴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고, 신라의 상당수 고분들이 발굴되지 않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문화재 보호는 더욱 철저하게 할 필요가 있다. 수도권에 조선의 왕릉이 많이 남아있지만 별로 대단치 않은 부장품이 약간 들어가 있을 뿐이다. 이에 반해 삼국시대 왕릉은 규모도 규모지만 그 안에 부장품이 무궁무진하다. 비록 고대 사회의 특수성에 기인한 것이지만 후손들은 그것을 잘 지켜낼 의무가 있다.


가까이 볼 수 없어 더 그리운 석불사

다시 찾은 서라벌은 싱그러웠다. 경주 시내에 도착해 도로변에 여러 왕릉과 탑 등의 유적지들을 스쳐 지나면서 천년 고도로 들어왔음을 실감했다. 이런저런 유혹을 뿌리치고 곧장 토함산 석불사(石佛寺)로 향했다. 흔히 석굴암이라 부르지만 본래 그 이름은 석불사였다. 말 그대로 돌부처가 있는 절이다. 1910년경부터 일본인들이 석불암 대신 석굴암(石窟庵)으로 불렀다고 하는데 경운궁(慶運宮)이 황위에서 물러난 상황(당시의 고종황제)을 가리키는 칭호인 덕수궁(德壽宮)이 널리 쓰이는 것처럼 맞지 않는 명칭인 셈이다.


일제가 석굴암을 완전 해체하고 잘못 조립하여 지금은 불상들의 온전한 위치와 정확한 구조를 알 길이 없게 되었다. 수리하는 와중에 슬쩍해간 것도 적지 않으니 분통이 터지는 일이다. 일제는 석굴 전체를 해체하여 일본으로 가져갈 계획까지 세웠으나 한일합방으로 굳이 반출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고 하니 섬뜩한 일이다. 일제는 보수를 하면서 당시 신소재로 각광을 받던 시멘트를 사용함으로써 석굴 내부에 습기가 차는 중 각종 문제점을 낳았다. 결국 1961년 복원 때 목조 전실과 석굴암 사이에 유리벽을 설치하여 일반 답사객은 유리로 막아놓은 벽 너머로 석굴암의 내부를 들여다 볼 수밖에 없어 제대로 된 감상이 힘들다. 애를 써도 십일면 관음보살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손꼽히는 석굴법당을 보고 실망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우선 유리벽 너머로 제대로 감상을 할 수 없으니 그 진가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요인일 것이다. 또한 생각보다 규모가 너무 적다는 것에 불만이 쏟아진다. 그러나 석굴암의 재료는 화강석이다. 가령 경천사터 10층석탑과 원각사터 10층석탑은 석회암의 일종인 대리석으로 조각되었다. 이런 경도가 낮은 재질은 제작하기가 화강석에 비해 쉽기 때문에 화려한 조각을 뽐낼 수 있다. 하지만 조각하기 힘든 딱딱한 화강석을 아름답고 섬세하게 조각한 데서 찬란한 우수성을 깨달을 수 있다. 이 독창성에서 우리는 세계화의 파고를 어떻게 해쳐 나갈지에 대한 혜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유리벽 너머의 감상은 어쩔 수 없이 가장 크고 중앙에 자리잡은 본존불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깊은 명상에 잠긴 듯한 표정은 위엄이 넘친다. 웃는 것은 아니지만 온화한 미소가 느껴지고, 화내지는 않지만 나지막이 꾸짖는 것 같다.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그 표정을 담을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워 마음 깊이 새기고자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대로 볼 수 없어 이토록 많은 답사객들의 애를 태우는 석굴암이지만 습기가 차는 것을 비롯해 이런저런 잔병치레가 심하다고 한다. 영구폐쇄된 무령왕릉처럼 석굴암도 폐쇄를 해야한다는 의견도 들려온다. 천년을 견뎌온 이 위대한 역사가 부끄러운 후손들에 의해 암흑에 쌓일지도 모른다니 안타깝다.


석굴암의 본래 구조와 앞으로의 보존 방법 등을 둘러싸고 많은 치열한 논쟁이 있다. 그만큼 이 문화유산의 가치를 방증하고 있는 셈이다. 전문적인 내용들은 잘 알아들을 수 없어서 어느 말이 맞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권에서 60년대의 복원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며 목조 전실은 있을 필요가 없으며, 팔부신중의 배열이 잘못되었으며, 햇빛이 비치는 광창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반면 성낙주는 [인물과 사상] 7권에서 미미한 피해를 침소봉대하여 60년대의 보수공사를 전면 부정하는 것은 최악의 상태에 있던 일제 때의 석굴암으로 되돌아가자는 우를 범할 것이라며 비판한다. 실제 복원 공사에 참여했던 신영훈도 [(천상이 천하에 내려 깃든) 석굴암] 등의 저서를 통해 최선의 복원이었다며 옹호하는 입장이다. 유홍준의 글이 엄밀한 학술논물이 아니지만 성낙주와 신영훈의 글이 비교적 많은 반박논거를 제시하고 있어 뒤쪽의 의견에 더 공감하는 편이다. 사실 이렇게 티격태격하게 만든 원흉은 일제의 엉터리 복원이었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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