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문화 2005. 2. 26. 07:52 |
어느 인터뷰의 한 꼭지를 보다가 얼마 전 내가 고민했던 “알고 보면”이라는 주제를 떠올렸다.


▼ 지승호 - 변화를 추구하다보니까 생기는 일인 것 같은데요. ‘성격이 좋게 말하면 쿨한 거고, 잔정이 없어 보인다’는 평도 있고, 잘 아는 분들은 ‘냉정한 듯 하지만 따뜻하다’는 평가를 하기도 하는데요.

▲ 유시민 - 잘 알아서 따뜻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어요?(웃음)
- http://www.freechal.com/sibi , 2005-02-25, 지승호의 유시민 인터뷰 中


유시민의 말은 “알고 보면”이라는 내 고민거리와 비슷한 면이 있다. 알고 보면 그렇게 각박하고 쌀쌀맞은 사람에게도 풋풋하고 낭만적인 구석이 조금은 있게 마련이다. 알고 보면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이 답답한 사람에게도 소탈하고 진솔한 면을 만날 수 있게 마련이다. 알고 보면 저마다 아픈 구석을 간직한 좋은 사람이다. 알고 보면 그 사람을 이해하지는 못해도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거친 말과 손가락질이 먼저 튀어나오는 것은 내가 관계맺음에서 진정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런 성찰과는 반대로 대인관계에 나는 대개 무심한 편이다. 제 자신을 가꾸는 노력을 하는 것만으로도 허덕이다 보니 지인들의 근황이나 요즘 생각들을 챙기는 것을 잘 못하는 편이다. 또한 내 개인주의적(혹은 자유주의적) 성향 탓에 타인의 인생에 어지간하면 개입하지 않기 때문에 좀처럼 친하기 힘들다는 인상이 강하다. 결국 “알고 보면”이라는 화두를 실현해볼 여지가 별로 없는 셈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인들의 삶 구석구석을 꿰뚫어 볼 의지와 능력이 없다는 뜻일 뿐, 지인들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이 아예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한편, 상대방을 대충 훑어보고 다 좋은 사람이라며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서도 안 된다. 정이 많다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엄정한 평가를 내리고 보상과 문책을 해야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타인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비판하는 것도 잘 못하는 것 같다. 이렇게 무심한 데다가 제대로 비판도 못하고, 더군다나 재미나지도 않은 녀석을 좋아할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을 사귀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제 깜냥 이상의 성과는 늘 위태롭게 마련이다. 그래서 지금의 내 인복은 너무 과분한 것이 아닐까 싶어 늘 전전긍긍이다.^^;


관계맺음이 제법 깊어지면 서로간에 개입을 하려는 하는 욕망이 싹튼다. 상대방이 내가 하는 일에 조언도 해줬으면 좋겠고, 나도 상대방의 언행에 왈가왈부하고 싶어진다. 칼 포퍼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것은 가까운 사이에 한정된 하나의 특권이다. 하지만 나는 이 특권을 쓰는 것을 자제하는 편이다. 특권의 의미는 그것의 행사 여부가 자유의사에 맡겨진 것이니 크게 나무랄 일은 아니다. 내가 이 특권을 쓴다면 “그렇게 하지 마라, 이렇게 해라”는 식보다는 “이런 장단점이 있을테니 알아서 잘 생각해 보라”는 정도가 될 것이다.


혹자는 무책임하다고 불평할지 모르겠으나 나는 개개인의 자유와 책임의 영역에 들어가지 않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런 무심함을 사무적인 관계라고 느끼고, 가까이 하기 힘들다고 착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의견이 소중한 만큼 상대방의 의견이 소중하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개개인의 삶을 최대한 존중하고 싶다. 나의 무심함은 그 사람에 대한 최대한의 존경이다.


기우인지 모르겠지만 상대방의 삶에 하나둘 개입하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내 의견에 따르지 않았다고 섭섭해하는 독선적 인간이 될까봐 두렵다. 내 인격적 미성숙을 어느 정도 극복해서 이 우려를 씻어냈을 때 그 때는 조금 활발한 개입을 통해 특권을 쓸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특권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내 나름의 방법으로 나같이 모자란 사람과 교류하는 이들에게 책임을 다할 것이다. 사실 나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다. 푸하하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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