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개인주의자다

문화 2003. 9. 22. 02:19 |
나는 개인주의자다. 이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정도는 구분하는 세상이 된 터라 이 말을 좀 더 편안하게 내뱉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집단주의 풍토가 강한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개인주의자를 외치는 것은 조금은 두려운 일이다. 그렇다보니 ‘도덕성을 기반으로 하는 올바른 개인주의’라는 수식어 치렁치렁 달린 상품을 내어놓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 당당히 ‘개인주의’라고만 말할 시기가 온 것만 같다. 내가 믿는 개인주의가 ‘도덕성을 기반으로 하는 올바른 것’이라면 구태여 경제성 없이 수식어를 앞에 늘어놓는 궁상을 떨 필요가 없다는 자각이다.



태생적 개인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어렸을 때부터 개인주의자의 소질(?)이 있었던 것 같다. 이를 증명할 두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의 나는 남을 위한 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면 참 고약한 심보다^^;) 선행이란 것은 자기자신만을 위해 쓰이기도 바쁜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나 좋은 일 하는 것을 지칭하는 단어가 善行이었던 것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던 중에 책도 좀 읽고, 학교 선생님들의 끊임없는 훈육을 접하면서 생각이 바뀌게 된다. ‘타인을 위해서 착한 일을 한다’는 것이 성립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나는 ‘일부 선행 개방’이라는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즉 나에게만 쓰던 선행을 남들에게도 좀 나누어주자는 정책이었다. 유치찬란한 어린 시절의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이런 과정을 거친 것이 오히려 남에게 좋은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게 해준 좋은 경험이 된 것 같다.



또 다른 하나는 ‘개인 소국가론’이다. 이는 말 그대로 개개인은 하나의 작은 국가라는 인식론이다. 아마 사회과목을 배우면서 정부나 국회의 존재도 알게 되면서 이 조직들을 개인에게도 적용시켜보자는 속셈에서 나온 생각인 것으로 추정된다. 한 때는 스토아 학파의 ‘개인은 소우주’라는 말을 주워들어 만든 것이 아닌가도 의심했지만, 그건 한참 뒤의 일인 것 같다. 스토아 학파의 그 이론을 나중에 듣고, “이건 내 것인데...”라며 2000여 년 전에 선수 당한 것에 대해 배 아파했던 기억이 선명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런 인식론을 기초로 해서 역사를 좋아했던 나는 혼자 생각하는 것을 일컫는 단어로 ‘조정 회의’라는 것을 만들어 쓰는 식으로 국가차원에서 쓸만한 용어들을 내 자신에게 끌어다 썼다. (나중에 ‘조정 회의’는 ‘국회 논의’로 변경된다^^;) 아직도 친구사이를 비롯한 인간관계를 ‘외교’라고 지칭하고, 나의 결심을 ‘정책’으로 표현하는 것이 이 때의 습관이 남아서이다.



칼 포퍼는 개인주의를 집단주의의 반대라는 의미로만 한정시켜서 사용하겠다며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a)개인주의는 (a')집단주의와 반대되고,
(b)이기주의는 (b')이타주의와 반대된다.
- 칼 포퍼 저/ 이한구 역, [열린사회와 그 적들1], 144쪽



이에 따르면 윗줄과 아랫줄의 짝짓기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형태가 나오게 된다.


(a) × (b) = 이기적 개인주의
(a) × (b') = 이타적 개인주의
(a') × (b) = 이기적 집단주의
(a') × (b') = 이타적 집단주의



포퍼는 플라톤을 비판하면서 이타주의를 집단주의와 동일시하고,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동일시함으로써 네 가지 형태로 짝지을 수 있는 것을 단 두 형태 밖에는 인식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결국 플라톤은 이기적 개인주의와 이타적 집단주의라는 두 가지 선택지를 놓고 찍으라고 윽박지르는 꼴이라는 것이다. 이는 도덕성의 기준이 국가의 이익이라고 주장하던, 전체주의적 정의론을 외친 플라톤의 아전인수격 해석이다. 포퍼는 플라톤이 범주 혼동의 오류를 저질렀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 오류는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하는 것을 같은 범주의 것으로 혼동하는 데서 생기는 오류다. 다시 말해, 포도와 당근을 같이 묶어 놓고, 참치와 닭고기를 같은 범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기실 이렇게 황당하지는 않고 북어와 황태를 놓고 헷갈리게 하는 식으로 물타기를 하고 있지만 말이다.^^; (황태와 북어는 모두 명태를 말린 것이나 북어는 바람 속에 급속히 건조시킨 것이고, 황태는 찬 공기 속에서 오랫동안 말린 것이라고 한다)



어쨌든 포퍼가 분류한 네 가지 형태 주에서 이타적 개인주의가 가장 좋다는 것에 토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일부 선행 개방’이라는 나의 경험이 ‘이기적 개인주의’에서 ‘이타적 개인주의’로 진화하는 쾌거라는 거창한 의미를 부여해버린다^^;) 혹자는 이타적 집단주의가 더 멋들어지지 않느냐며 기웃거리겠지만, 일단 이런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에서 그 빛이 바랜다. 남을 위하면서 집단의 이익을 우선하는 경우는 열성적인 종교집단이나 공산주의 실험 정도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사실상 이런 경우는 정말 착한 사람들이 아니고서야 정말 보기 힘든 일이다.




경제학 세계의 인간은 이기적으로 행동한다. 이것은 증명하지 않고 참으로 인정하는 명제, 즉 공리(公理, axiom)다. 경제학 이론은 이 공리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경제학을 이해하려면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 인간’을 인정하고, 그가 내리는 모든 자발적인 경제적 선택을 ‘합리적’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기독교도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처럼, 경제학도는 이 공리를 인정하지 않으면 신성한 경제학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 유시민, [합리적 경제인이란?] 中




유시민의 칼럼에서 ‘경제학’을 ‘경영학’으로 바꿔서 이해해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경제학이나 경영학이나 이타적 개인주의를 가진 인간상을 놓고 이야기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물론 경제학은 완전히 합리적인 인간을 가정하고, 경영학은 제한적인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을 가진 인간을 가정한다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여하간 이타적 개인주의보다는 이기적 개인주의, 이기적 집단주의가 더 많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여기서 이기적 개인주의는 흔히 말하는 ‘이기주의’, 이기적 집단주의는 ‘집단 이기주의’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이 둘 중에서 오해가 심한 것은 역시 이기적 개인주의다. ‘이기주의 + 개인주의’가 되어 있다보니 개인주의가 이기주의와 도매금으로 구박받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기적 개인주의에서 나쁜 것은 이기주의에 있는 것일 뿐, 개인주의까지 누명을 쓰는 것은 부당하다. 이걸 헷갈리지 말아야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포퍼의 입장과는 달리 단순하게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구분해 볼 수도 있다. 철학자 김용석의 다음과 같은 깔끔한 정리가 무척 유용하다.



개인주의individualism는 말 그대로 개인individual을 중시하는 입장이다. 반면에 이기주의egoism는 나ego를 중시하는 입장이다. 전자의 경우 개인은 여럿이므로 모든 개인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반면 후자의 경우 '나'라는 자기는 하나뿐이므로, 결국 자기'만'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개인주의에서는 말 뜻 그대로 개인이면 누구든 중요시한다.

'나'라는 개인만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나, 너, 그, 그녀 등 모든 개인을 중요시한다. 즉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의 가치와 존엄 그리고 권리를 前提하는 것이다. 따라서 타인에 대한 이해 및 타인의 권리 인정과 타인을 수용하는 자세는 개인주의의 본질이다. 반면 이기주의에서는―어원적으로도 쉽게 알 수 있듯이―자기 자신만을 중시하므로 타인을 이해하거나 수용할 자세가 되어있지 않다. 즉 '나'의 존재는 '나'만을 위한 것이다.
- 김용석, [우리 안의 이기주의, 우리 밖의 개인주의] 中, emerge 2002년 3월




이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가르는 관건은 나만 생각할 것인가, 나를 포함한 모든 개인을 생각할 것인가에 있다는 것이다. 이기주의에는 자기 존중밖에 없다면, 개인주의에는 이와 더불어 타인에 대한 배려가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개인을 집단에 종속시키는 집단주의 윤리가 구조적으로 합리적 토론과정을 가로막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것은 우선 진정한 개인주의자는 이기주의자가 되지 않는 반면 집단 윤리를 강조하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이기주의에 빠질 수 있다는 점에 의해 방증된다. 진정한 개인주의자는 ‘남의 개인’도 ‘나의 개인’만큼 생각하고 배려할 줄 알지만, 개인을 사회집단에 종속시켜야 한다는 의식이나 관념, 또는 일상에 젖어 있는 집단 구성원들은 집단의 헤게모니에 기대거나 숨은 이기주의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율적인 개인을 포기하고 패거리에 몸을 담는 것이다.
- 홍세화, [숨은 이기주의자들] 中, 2002년12월11일 한겨레21 제438호




그렇다. 집단에 피신하지 않고 내 삶은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자세, 나의 생각과 판단에 책임을 지겠다는 마음, 남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개인주의자가 되는 길이다. 내 주변의 착하고 순박한 벗들을 사랑하고 나쁜 놈들보다는 착한 사람들이 많았고, 앞으로도 많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이 점에서 개인주의는 의외로 낙천적인 모습을 보이고, 이상주의와도 만난다. 게다가 이탈리아의 정치사상가인 노르베르토 보비오는 “개인주의 없이 자유주의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내가 추구하고 탐구하는 자유주의는 개인주의의 가장 친한 친구쯤 되니 이 또한 일석이조의 효과가 아닌가.^^




개인주의자들은 김철수가 장애자라는 이유로, 박미란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로이 워싱턴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카르멘 차베스가 세번째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압둘라이 알리가 이슬람교도라는 이유로, 이영순이 전라도 출신이라는 이유로, 최경철이 게이라는 이유로 그녀들과 그들에게 시민적 정치적 권리가 제한되는 것에 결사 반대한다. 개인주의자들은 리처드 윌리엄즈가 백인 남자라는 이유로, 캐럴라인 샌더즈가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로, 정미자가 이혼경력이 없다는 이유로, 권순철이 경상도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들과 그녀들에게 시민적 정치적 권리가 덤으로 주어지는 것에 결사 반대한다. 개인주의는 시민사회의 버팀목이다. 그것은 집단주의 사회에서 목격되는 강요된 연대가 아닌,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정신 사이의 자발적 연대, 느슨하지만 깊숙한 연대, 참다운 연대로 트여있는 길이다.
- 고종석, [개인주의여 영원하라] 中, ‘지성과 패기’ 95.9.10., 산문집 ‘책읽기 책일기’, 문학동네, 1997.



고종석이 말한 그 아름다운 연대에 내가 낄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남이 뭐라 하든 나의 길을 고집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내 편이 아닌 이들에게도 따뜻할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소수파가 되었을 때 느꼈던 불편함과 두려움을 다수파가 되어서도 잃지 않을 수만 있다면, 올챙이적 생각을 해낼 수 있는 양심적 기억력이 내게 존재한다면... 나는 앞으로도 꽤 그럴듯한 개인주의자로 남을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과 자부심이 생긴다. 아 글쎄... 개인주의자는 낙관론자라니깐... 6(^.^)9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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