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교섭 안건을 처리하기 위해 소집된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가 일부 노동자들의 물리력 행사로 또 무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착잡했다. 목소리 큰 소수가 한 표의 권리 이상을 행사하려 들 때의 광경은 대개 볼썽사납다. 유치한 원론 이야기지만, 민주주의는 소수파가 다수파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데 그 의의가 있다. 그런 룰 때문에 다수파는 소수파를 존중하고, 소수파는 다수파의 결정에 승복하는 것이다.


나는 민주노총 대의원 구성도 잘 모르고, 그들이 노조원 평균의 의사를 잘 대변하고 있는지도 미지수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의 대의민주주의가 가진 한계일 따름이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국회의원이 보통 국민들을 가장 잘 대변한다고 확신할 수 없으며, 4월에 있을 열린우리당 대의원대회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을 당의장으로 선출한다고 기대할 수도 없다. 나는 다만 한 표의 권리들이 모여 선출한 이들이 절차적 정당성을 가지고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을 뿐이다.


회의를 저지하려는 쪽에서는 절차적 민주주의보다 내용적 민주주의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내가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어 잘은 모르겠으나 절차적 민주주의 다음에 내용적 민주주의를 고려하는 것이 상식이다. 절차에 문제가 없어야 알찬 내용을 만들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의 절차가 큰 문제가 있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서 이렇게 절차를 깡그리 무시하는 이들이 내용적 민주주의를 들먹거릴 수 있는지 의문이다.


아무리 많은 토론과 대화를 한다고 해도 소수파가 100% 만족할만한 결론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다수파가 뜻하는 바가 많이 반영되는 것이 민주주의의 원리다. 그렇지 않고서야 다수파가 되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패자는 서글프고 소수파는 애달프게 마련이다. 어쩌면 의사결정 과정에서 소수의 의견이 적절하게 반영되지 않아 불가피하게 항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렇다고 보기에는 노동계와 대다수 국민의 시선이 너무 싸늘하다.


합당한 비판과 부당한 비판의 경계는 언제나 논란이 있기 마련이지만... 두 가지 기준 정도가 있다고 할 수 있겠죠. 과거에 어떻게 했는가와, 지금 현재 다른 존재에게는 어떻게 하는 가를요. 가령 언론의 비판에 대해서 따져보면 과연 김영삼에게 던졌던 비판의 수준과 동일한가, 또 현재 한나라당과 극우세력에게 던지는 화살과 비슷한가... 이런 것들을 따져보았을 때 ‘그들’에게는 너무 넉넉하고 노무현에게는 너무 매섭다고 충분히 느껴져서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것도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견해이지만...^^
- 대통령 탄핵 때 메신저 대화 中


내가 제시했던 비판의 기준 두 가지는 사실 매우 허약한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환경이 달라졌을 수도 있고, 현재 존재하는 존재들 간에 기대되는 수준도 다르기 때문이다. 좀 더 섬세한 비판을 위해서는 변수 몇 가지가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사례’와 ‘현재 다른 존재’에게 동일한 잣대를 썼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비판이 일관성을 잃으면 단순한 인신공격으로 전락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국가보안법 폐지안 상정을 막기 위해 필리버스터(Filibuster, 의사진행방해)를 할 때 게거품을 물며 질타하고, 행정도시특별법이 통과되었는데도 난리법석을 떠는 이들에게 의회주의의 적들이라고 일갈했다. 하지만 이번 민주노총 사태에 대해서는 비교적 말을 아낀 편이다. 괜히 건수 잡았다고 호들갑을 떠는 경향도 있는 것 같아 자제하려고 했다. 내 스스로의 비판에 대한 기준을 지키지 못한 것 같아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가 내키지 않는 쓴소리를 하는 까닭은 이번 갈등을 잘 치유하고 비 온 뒤에 땅이 굳는 모습을 보여주기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들 표현대로 신자유주의나 자본의 공세가 얼마나 거센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가장 큰 적은 내부에 있게 마련이다. 그럴 때일수록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노력을 해야한다.


끝으로 그렇게 노동자 계급의 단결을 외치던 민주노총이 내부 분열에 시달리는 모습에서 사람 모이는 곳은 어디든 비슷하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 [憂弱]
Posted by 익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