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한 날의 상념

잡록 2005. 4. 5. 19:10 |
정민 교수님의 책을 읽다가 “미로득한방시한(未老得閑方是閑)”이라는 구절을 만났다. 젊었을 때 얻는 한가로움이라야 진정한 한가로움이라는 뜻이다. 이번 휴학시기가 내 삶에서 다시 찾아오지 않을 한가로움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비장한 각오를 했지만 또 무뎌지는 것 같다. 그래도 술술 읽히는 책 위주로 독서도 제법 하면서 허송세월이 안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졸다가 남은 시간이 있으면 책을 보고, 책을 보다가 또 졸아도 아무도 깨우는 사람이 없어서 어떤 때는 하루 종일을 푹 자버리기도 한다. 때로는 어쩌다가 글을 지어 나의 뜻을 펴 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싫증이 나면 새로 배운 철현소금(鐵絃小琴)으로 두어 곡조를 뜯기도 한다. 어떤 친구가 술을 보내 주면 기쁘게 퍼마신다. 취한 뒤에는 나 자신을 스스로 예찬해보기도 한다.
- 박지원, 수소완정하야방우기(酬素玩亭夏夜訪友記) 中


책을 좀 보다가 컴퓨터를 틀어 글을 읽고 쓰고, 그러다가 한잠 늘어지게 자는 것이 박지원 선생이 누렸던 여유와 별반 다를 바 없다며 피식 웃었다. 여기에 덧붙여 지난날의 미숙함을 돌아보고 나의 말글이 비루했음을 반성한다면, 관계맺음에 대한 욕심에 미치지 못하는 내 자신의 부박함을 마주본다면 금상첨화이리라. 세속적인 꿍꿍이에서 벗어난 내면으로의 침잠이 그간 너무 부족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물음에 “그냥 놀고있죠 뭐”라고 대답하는 것보다는 “이래저래 글 읽고 쓰는 재미로 지내요”라고 말하는 것이 더 그럴 듯 하다며 권유를 받았다. 괜찮은 둘러대기인 것 같다.^^; 그 대신 내가 읽고 쓴 글이 스스로에게 가장 먼저 생채기를 내고, 오랫동안 앓도록 해야겠다. 집착과 원망의 고름을 짜내고, 독선과 편견의 가시를 빼낼 수 있는 성찰의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문득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22세의 일기에 적혀있는 말이 생각났다. “온 천하가 다 무너지더라도 내가 이것만은 꽉 붙들고 놓을 수 없다. 내가 이것을 위해 살고 이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나의 사명을 발견해야 한다”는 구절이다. 비슷한 나이 또래의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어서 노자의 “큰 모습을 잡으면 세상이 다가온다(執大象 天下往)”를 읊조려본다. 집대상은 내 꿈을 어딘가에 투자하는 것이라고 풀어볼 수 있을 것이다. 집대상을 위해 지금은 우선 내 자신에 대한 분석과 시장조사를 할 시점인 것 같다. 나는 요즘 마냥 무위도식하지는 않고 딴에는 누운 용과 봉황의 새끼(臥龍鳳雛) 흉내를 내고 있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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