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오전 10시에 고대하던 창덕궁 특별관람코스를 다녀왔다. 2004년 5월 1일부터 기존의 창덕궁 일반관람코스에서 후원의 관람정, 존덕정, 옥류천 지역을 추가로 개방하는 특별관람코스가 만들어졌다. 옥류천 지역은 1976년 출입이 금지된 이래 28년 만에 개방되는 곳인데 관람 횟수와 인원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어 관람하기가 녹록지는 않다. 작년에 인터넷 예매와 현장 예매를 도합 세 번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매진되어 근 반년을 기다렸다가 올해 새롭게 개방을 시작하는 첫날 예매하여 들어갈 수 있었다.


창덕궁 후원(後苑)은 궁궐의 북쪽에 있다하여 북원(北苑), 왕족을 비롯한 제한된 사람들만 드나들 수 있다하여 금원(禁苑)이라 불리기도 했다. 흔히 비원(秘苑)이라고도 하는데 비원이라는 명칭이 창덕궁까지 통칭하는 것으로 잘못 쓰여지기도 한다. 이는 창덕궁을 폄하하는 말로써 창경궁을 창경원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지므로 삼가야 한다. 비원은 원래 창덕궁 후원을 관리하는 기관의 이름 비원(秘院)에서 시작되었으나 1904년부터 秘院을 秘苑으로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비원이 기관(院)과 장소(苑)를 두루 지칭한다고도 하고, 왜놈들이 갖다 붙인 것이라고도 하니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창덕궁 홈페이지를 보면 후원은 뒤뜰이라는 뜻으로 일반민가에도 적용되는 만큼 왕궁의 원유를 후원이라고 부르는 것은 격에 맞지 않아 후원의 명칭에 대해 여러모로 검토 중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후원의 빼어난 경치 열 가지를 꼽아 상림십경(上林十景)이라고 하는 만큼 옛 명칭 중에 하나인 상림원(上林苑)도 괜찮을 것 같다. 여하간 조만 간에 얼른 결판내서 명칭에 대한 혼란을 줄여야 할 것이다.


창덕궁 특별관람코스의 관람료는 5000원인데 언뜻 비싸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본래는 10000원으로 책정할 예정이었는데 문화재청과 재경부와 협의하는 과정에서 5000원으로 조정된 것이라고 한다. 우리의 고궁 관람료가 외국과 비교해 저렴하다거나, 관람료가 싸면 고궁이 가볍게 보인다는 문화재 당국의 주장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너무나 파괴되어 중건(혹은 복원)이 지속적으로 요구되는 우리 궁궐을 위해 약간의 투자를 해달라고 홍보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이 정도의 인상이 아깝다고 생각할 만큼 쩨쩨하지 않았으면 한다.


세종대왕은 후원을 두고 "내 천성이 화초를 좋아하지 아니한다. 뽕나무, 닥나무, 과실나무는 모두 일상생활에 요긴한 것이니, 이제부터 이것으로 직책을 삼음이 옳을 것이다"며 명했다고 한다. 나는 보는 눈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후원에 기화요초보다 과실수가 더 많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창덕궁 후원에 정자들은 규모가 소박한 편인데 이는 자연 경관을 해치지 않으면서 최소한의 인공미를 가미하려는 우리 전통 조경의 산물이다. 좋게 말해 사치를 멀리하고 검박함을 추구한 왕실의 정신이 투영된 것이지만 그렇게 평하기에는 대부분의 시기 조선 왕국의 백성들은 빈궁했고 고달팠다.


새로 개방된 후원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관람지와 관람정이다. 관람지는 한반도 지형을 닮아 반도지(半島池)라 불리기도 했다. 동궐도(창덕궁, 창경궁을 그린 19세기 초의 지도)에는 네모난 모양에 둥근 모양이 합쳐져 나타나는 것과 판이하다. 아마도 이는 일제가 우리 영토를 한반도로 국한시키려는 의도에서 조작한 것이라는 설이 그럴 듯하다. 또한 궁궐에는 하나밖에 없는 부채꼴 모양의 정자도 생성 시기가 애매하지만 보기에 나쁘지는 않았다.


관람정 주변에는 존덕정, 승재정, 폄우사가 자리잡고 있다. 아(亞)자살 창호가 화려한 승재정이나 효명세자가 독서를 했다는 폄우사도 둘러봤다. 급한 마음에 봄꽃이 피기도 전의 행차라 새싹도 돋아나지 않은 황량한 풍경이 적지 않았다. 아직 잔디가 자라지 않아 존덕정에서 폄우사로 오르는 언덕에 있는 팔자 걸음 연습용 화강암 판석이 그리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보기 드문 6각 지붕에 2층 처마를 한 존덕정은 단연 일품이었다. 한 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고 기교가 많이 들어간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존덕정에서 가파른 길을 오르다가 쉬어가라고 있는 취규정을 스치듯이 지나치고 옥류천 영역에 당도했다. 창덕궁의 후원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왕이 길러먹던 샘물인 어정에서 한 바가지 들이키니 물맛이 참 달았다. 옥류천 바위에는 잔이 돌아오기 전에 시를 한 수 짓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할 수 있는 홈이 있지만 그 길이가 짧아서 시 한 수 읊을 여유가 안 될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떨어봤다. 개인적으로 매우 싫어하는 임금인 인조의 옥류천(玉流川)이라는 글씨만 없었더라면 완벽했을 것이다.^^


상림삼정(上林三亭)이라 불리는 소요정, 청의정, 태극정은 저마다의 매력을 뽐내고 있다. 특히 유일한 초가 지붕인 청의정에 눈길이 갔다. 동궐도에 보면 약 열여섯 채의 초가가 보이는데 지금은 청의정 하나만 남아 있다. 청의정 주변에 벼를 심어 추수로 나온 짚으로 지붕을 다시 만들곤 했다고 하니 자력갱생이 가능한 정자인 셈이다. 초가 지붕으로 겸양을 떨었지만 바로 아래 화사한 단청이 허허로움을 보완해주는 것 같다. 아쉽게도 청의정 앞 논은 진흙더미에 불과했다. 아직 모내기를 안 한 모양이다.^^


일제가 서울시내 5대 궁궐을 어느 하나 멀쩡히 둔 것이 없지만 창덕궁은 그나마 피해가 적어 아름다운 옛 모습을 제법 간직하고 있다. 이 덕분에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록될 수 있었다. 전통 문화유산은 분명 가꾸면 가꿀수록 부가가치가 창출되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가 먼저 외면하고 소홀히 여기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자중자애(自重自愛)라는 말처럼 스스로 무겁게 여기고 사랑하는 자만이 남의 존경과 신뢰를 받게 되어 있다. 이래저래 잘리고 상처 입은 우리 궁궐을 바라보며 일제의 만행만 곱씹기보다는 우리 스스로의 부박함을 반성해야겠다. 후원의 아름다움이 눈부신 만큼 회한도 짙게 드리운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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