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교황 선출에 부쳐

잡록 2005. 4. 21. 02:46 |
여기서 더 나아가 검은 피부의 교황을, 적어도 유럽 출신이 아닌 교황을 이번에 볼 수는 없을까? 그것은 가톨릭교가 바로 이름 그대로 보편적 종교라는 것을 처음으로 온 세상에 드러내는 길이기도 할 텐데 말이다.
- 고종석, "콘클라베 斷想.", 한국일보, 2005. 4. 13.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고 요한 바오로 2세에 이어 독일출신의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 로마 가톨릭 교회 새 교황으로 선출됐다. 그 어느 때보다 비유럽 출신의 교황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던 터라 다소 실망스럽다. 내심 자기 지역에서 교황이 나오기 바랐던 중남미와 아프리카 지역의 신도들이 아쉬운 표정인 것은 인지상정이다. 보편을 추구한다는 종교에도 민족과 국가가 엄존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대목이다.


고 요한 바오로 2세는 여성의 사제직 진출, 피임과 낙태, 동성애, 배아줄기세포 연구, 해방신학, 교회 개혁 등에 반대해왔다. 베네딕토 16세도 이와는 크게 다르지 않을 전망이다. 그러나 여성이 사제가 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하느님이라면 굳이 애써서 믿을 필요가 없을 듯하다. 또한 콘돔 사용을 철저히 반대하면서 에이즈가 횡행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은총을 부르짖는 것은 인간 존중의 종교라고 보기 힘들다. 자유와 구원을 외치면서 사슬과 차꼬로 동여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세계 곳곳에서 민족, 인종, 종교 등의 다툼으로 피눈물이 그치지 않고 있다. 가톨릭 교회는 본인들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세계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교황 장례식의 조문단을 보라!). 하느님이 부여하신 사랑의 힘을 많이 퍼뜨리기를 기대한다. "짐진 자여, 내게로 오라"는 성경 구절처럼 강한 사람에게는 한없이 높고, 약한 사람에게는 한없이 낮아지는 모습을 바라마지않는다. 하느님의 심판 이전에 종교의 자유시장이 가톨릭 교회를 지켜보고 있다.


이제 교황 선종(서거)에서 새 교황 선출 동안 요란했던 관심을 정리할 때다. 이런 종교적인 이슈가 터질 때면 먼저 떠올릴 것은 대한민국 헌법이 아닐까 싶다.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지며, 국교를 부인하고,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선언하고 있는 헌법 제20조는 늘 아슬아슬하다. 세속의 영역에서 종교를 이용하지 않는 성숙함이 좀 더 필요하다. 대한민국은 분명 세속주의 사회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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