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 앞서 "한나절 이상 투자한 글"이란 글을 먼저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스크롤의 압박이 다소 있으니 어여삐 봐주세요.^^


1. 연호란 무엇인가?

우리가 자랑스레 배워왔던 세계적인 발명품 측우기는 1441년(세종 23년)에 발명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측우기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770년(영조 46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건륭경인오월조(乾隆庚寅五月造)라는 문구가 새겨져있다. 건륭은 청나라 건륭제의 연호(年號)이다. 조선시대 때 중국의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을 모르는 대부분의 국제 학계(한국사를 잘 모르는 중국인들도 포함해서)는 측우기가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연호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당수 중국 학계는 중국의 어떤 역사서에도 측우기 발명과 사용에 대한 기록이 없고, 현존하는 측우기 유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 연호 하나 때문에 측우기가 중국에서 만들어져 조선에 전해졌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연호란 왕조시대에 어떤 임금의 통치시기를 나타낼 때 붙이는 칭호이다. 한 명의 임금이 하나의 연호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때로는 여러 개를 사용하기도 한다. 일본은 왜곡된 역사 교과서에서 645년 다이카개신(大化改新) 이후 중국과 다른 연호를 계속해서 사용한 나라는 동아시아에서 일본밖에 없었다며 호들갑을 떤다. 그러면서 한국을 중국의 연호를 쓴 속국이라며 건방지게 군다. 동북공정으로 열을 올리는 중국도 은연중에 한국이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박성래 한국외대 교수는 "한국사의 年號사용에 대한 오해(한국경제신문. 2004. 09. 30.)"라는 글에서 "한국 역사가 일본과 달리 독립된 연호를 사용하지 않은 것을 그리 부정적으로만 볼 이유는 없다"면서 "일본은 중국과 교류가 원활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름의 연호를 만들 수밖에 없었지만 한국은 중국과 끊임없이 교류했기 때문에 독립된 연호를 쓰기 어려웠을 뿐"이라고 말한다.


흥미로운 해석에 관련 자료를 찾아보던 중 박 교수가 쓴 "고려초의 역과 연호"라는 논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박 교수는 고려 초기의 연호 문제를 집어 보면서 고려가 933년 천수(天授)라는 독자연호를 버리고 중국 후당(後唐)의 연호를 쓴 것은 자주성의 상실과는 관계가 없는 "일대 외교적 승리 때문"이라고 말한다. 역법의 실질적 필요성에 덧붙여 중국의 외교적 승인도 중요한 요인이며, 중국으로부터 사역(賜曆)을 받고 그 연호를 사용한다는 것은 불명예가 아니라 삼국 혹은 후삼국이 다투어 원하던 것이라는 주장한다.


그는 "연호=독립"이라는 등식은 근대역사학의 해석으로 조선시대 내내 연호는 황제국인 중국에서나 쓰는 것으로 각인되면서 나타나게된 것이라고 말한다. 하기야 지독한 모화(慕華)국가였던 조선은 망한 명나라의 연호인 숭정(崇禎)을 청나라가 거의 망할 때까지 붙들고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고려 초에는 그런 조선시대의 양상과는 달리 "연호를 얼마나 대수롭지 않게 대륙에서 송과 요가 쟁패하고 있을 때는 그때그때 적당히 양쪽 연호를 썼다"고 말한다.


박 교수는 "중국 연호를 쓰던 시절의 한국이 중국식민지가 아니었음은 '서기'를 쓰는 지금 의 한국이 서양 식민지가 아님과 같은 이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단기(檀紀)와 서기(西紀)에 대한 논쟁을 바라볼 때 서기가 완전히 가치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시간측정 수단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물론 단기를 고집하는 것이 자주독립을 실현하는 것도 아니다. 요즘 같은 세계화 시대에 역법을 함께 쓰는 것이야 편의 수준이 아닌 생촌 차원의 문제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날의 서기보다는 과거에 쓰인 중국 연호가 훨씬 더 정치적 함의가 크고 깊었다.


중국 연호가 단순히 연도 계산의 의미를 벗어나 약소국이 강대국을 따른다는 외교적인 표현임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조선시대만큼은 아니라도 고려시대나 삼국시대에 이러한 관념이 어느 정도는 존재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아도 중국 대륙은 극복하기 힘든 거대한 존재였고, 기왕이면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상책이었을 테니 말이다. 송나라,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연호를 그 때마다 바꾸어 쓴 것은 단순히 편의주의, 기능주의의 소산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조선과 명나라와의 관계만큼은 아니었다. 한족(漢族)에 올인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소중화(小中華) 의식에 빠져 청나라를 배격하고 명나라 연호를 몰래 고집하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2. 한국사의 독자연호1 - 고구려, 백제, 신라

혹시나 조선시대만을 생각해서 우리 역사에 독자연호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오해를 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기록의 멸실로 인해 확신하기는 힘들지만 삼국시대에 적잖은 독자연호가 쓰여졌을 것으로 사료된다. 여러 자료를 종합해볼 때 고구려, 백제, 신라는 자신들이 천하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이런 점에서 고려나 조선의 사대주의는 냉혹한 자기 인식이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신라의 연호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문헌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고구려와 백제는 문헌 기록은 없고 금석문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국내 역사서에 고구려나 백제의 연호를 볼 수 없는 것은 신라 중심의 사관이 작용했다는 점도 있겠지만, 나라가 망한 후 자료들이 전해지지 않아 몰라서 못 쓴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김부식 등이 일부러 빼먹었다면 비난받아 마땅하겠지만 말이다.


흔치 않은 것은 괜히 애틋하게 보이기 마련이다. 고구려는 광개토호태왕비에서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썼음을 알 수 있다. 서길수 고구려연구회 회장은 광개토대왕이라 부르는 것은 식민사관의 영향이며 중국의 황제, 일본의 천황처럼 고구려인들은 자신의 왕을 태왕(太王)이라 불렀다고 말한다. 태왕이란 왕중왕이란 뜻으로 고구려가 당시 동아시아에서 독자적인 질서를 구축하며 그 패자임을 나타낸다. 따라서 광개토태왕, 영락태왕이라는 호칭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또한 불상 등의 금석문을 통해 연수(延壽), 연가(延嘉), 영강(永康), 건흥(建興) 등의 연호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연수는 신라, 건흥은 백제 연호라는 설도 있다).


백제의 경우 일본에 하사한 칠지도(七支刀)의 명문에서 태화(泰和)라는 연호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판독상의 이견과 함께 중국과 관련된 연호라는 주장도 있는 만큼 조금은 신중해야겠다. 이도학 교수는 무녕왕릉매지권 등의 백제 금석문에서 연호가 발견되지 않는 점을 들어 백제는 6갑 간지만 사용해서 기년(紀年)을 표시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이도학, [살아있는 백제사](2003), 휴머니스트, 351쪽 참조). 그러나 칠지도에 나타나는 "널리 후왕(侯王)들에게 공급할 만하다"는 구절에서 후왕은 제후국의 왕을 뜻하므로 백제왕도 후왕들을 거느린 황제 수준의 위치였음을 미루어볼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 근초고왕이 군사를 사열할 때 깃발을 모두 노란색으로 썼다는 기록에서 중국의 천자만이 쓰는 빛깔을 사용했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신라의 경우에는 그나마 다행으로 많은 연호가 비교적 상세하게 전해지고 있다. 법흥왕의 건원(建元), 진흥태왕(진흥왕순수비문에 고구려처럼 태왕 칭호가 나온다)의 개국(開國), 대창(大昌), 홍제(弘濟), 진평왕의 건복(建福), 선덕왕의 인평(仁平), 진덕왕의 태화(太和)가 그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독자연호를 버리는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신라사신 한질허가 당태종에게 "신라는 신하로서 대국(大國) 조정을 섬기면서 어찌하여 따로 연호를 칭하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한질허는 "일찍이 대국 조정에서 정삭(正朔)을 반포하지 않았으므로, 선조 법흥왕 이래 우리 나름대로의 연호를 사용한 것입니다. 만약 대국 조정의 명령이 있었다면, 작은 나라가 어찌 감히 다른 연호를 사용하겠습니까?"라고 답한다(삼국사기 진덕왕 2년(648년) 기사 참조).


결국 650년에 당나라의 영휘(永徽)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고 독자연호를 버리게 된다. 정삭이란 곧 역법을 의미한다. 박 교수는 당시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 역법을 완성해 갖고 있던 나라는 중국뿐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신라가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한 것이 단순히 역법을 계산할 줄 몰라서였다고 단정하기는 미심쩍다. 독자연호를 포기하고 난 후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사료의 부실로 속단하기는 힘들지만 자주성의 시련이라고 평가할 만 하다. 신라가 외교적인 승리를 거둔 것인지는 모르나 우리 민족 전체에는 불행한 결과였다.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민족의식의 부재를 탓하기는 힘들겠지만 말이다.


통일신라 헌덕왕 14년(822)에 김헌창이 군사를 일으켜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한 것은 주목할 만 하다. 아버지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이 한이 맺힌 것이 주된 이유겠지만 독자연호를 사용한 것은 대당관계에 있어서 자주성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김헌창의 난이 신라의 사대성에 대한 반발이라는 측면을 가진 것도 이 때문이다. 헌덕왕 11년(819) 이사도의 군대를 제거하기 위해 당나라가 원군을 청하자 신라는 3만명의 군사를 파견한다. 드라마 해신(海神)에서 등장했듯이 이사도 집안이 고구려 유민인 것을 감안하면 조금은 당혹스럽다(이사도 집안의 제(齊)나라가 이사도 대에 내려오면 고구려의 색채가 희박해진다는 이견도 있다). 여하간 단순한 왕위쟁탈전으로 볼 수 없을 듯하다.


3. 한국사의 독자연호2 - 발해와 후삼국시대, 고려시대

독자연호와 관계되어서 가장 눈길을 끄는 나라는 단연 대진국(大震國) 발해이다. 발해는 우리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던 나라였다. 문헌상으로 볼 때 거의 전 기간 연호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가령 2대 무왕이 인안(仁安), 3대 문왕이 대흥(大興), 보력(寶曆), 10대 선왕이 건흥(建興) 등의 연호를 쓴 것이 그 예이다. 그러나 발해는 당나라에 대해서는 황제가 아닌, 왕국으로서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왕이 사망한 후에는 황제의 칭호가 아닌, 왕의 칭호를 올렸다. 정효공주 묘지에는 황상(皇上)이란 표현과 함께 대왕이란 용어도 섞어 쓰인 것도 이런 고민의 산물이다. 발해는 강대국의 이웃으로 살아가는 지혜를 후손들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담이지만 희귀한 발해의 유물들은 일제시대에 빼돌려져 일본에 많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후삼국시대에 들어 후백제를 세운 진훤(甄萱)은 정개(正開)라는 독자연호를 사용하며 일세를 풍미했다. 이 연호는 전북 남원의 실상사 조계암 터에 있는 편운화상부도에 새겨져 있다(이도학 교수의 [진훤이라 불러다오](푸른역사, 1998) 참조). 이는 진훤의 백제국이 단순히 반란자 집단이 아닌 새 왕조를 개창한 것임을 분명히 해준다. 또한 궁예는 무태(武泰), 성책(聖冊), 수덕만세(水德萬歲), 정개(政開)라는 무려 네 개의 연호를 사용했다. 국호도 고려, 마진(摩震), 태봉(泰封)으로 여러 번 고쳤는데 여기서 마진은 "대동방국"을 의미한다. 후백제와 쟁투를 벌이는 것도 정신이 없는데 북벌의 의지를 피력한 것은 다소 허황된 감이 있다. 그러나 대륙 회복의 기상만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


고려시대는 발해의 방법을 본받아 밖으로는 왕국이면서도 안으로는 황제의 제도를 꾸리는 외왕내제(外王內帝) 방식을 이어간다. 하지만 발해처럼 모든 왕이 독자연호를 쓰지는 않았다. 태조가 천수(天授), 광종이 광덕(光德), 준풍(峻豊)이라는 독자연호를 사용한 것을 제외하고는 송, 요, 금, 원, 명의 연호를 번갈아 썼다. 여기서 단재 신채호 선생이 묘청(妙淸)의 서경천도운동을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으로 평가한 것이 떠오른다. 묘청 일파는 1135년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켜 나라 이름을 대위(大爲)라고 부르고 연호를 천개(天開)라고 했다. 묘청의 칭제건원론(稱帝建元論)이나 금국정벌론은 상당부분 자주적인 요소가 있었기에 신채호 선생의 탄식은 깊었다.


그러나 묘청의 난이 전략적으로 치밀하지 못해서 개경에 머물던 정지상, 백수한 같은 서경파들이 앉아서 죽게 만들어 버린 점과 도참설 같은 비합리적 사고에 기대려했던 점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 또한 김부식 일파가 칭제건원을 반대한 것도 나름의 이유가 충분했다. 금나라에게 사대하기로 한지 몇 년만에 칭제건원을 할 경우 금의 반발이 예상되며 외교적, 군사적 혼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더군다나 사대하려는 대상이 중화가 아니라 금나라였다는 점에서 신채호 선생의 "사대주의의 괴(魁.괴수)"란 표현은 지나친 감이 있다. 적어도 김부식의 현실론은 조선시대에 연호 사용 자체를 반대하는 입장과는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김부식의 사대성은 그의 저서 삼국사기에서 짙게 드리워진다. 그가 쓴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에서 중국의 경전과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면서 "우리나라의 사실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망연(茫然)하여 그 시말(始末)을 알지 못하니 매우 유감스럽다"고 밝힌 그의 충정은 인정할 만 하다. 그러나 진덕왕 4년(650) 당나라의 연호를 쓰기 시작하자 "옛날에 법흥왕이 연호를 스스로 썼는데, 아, 편방의 소국으로서 왜 연호를 쓰나? 당 태종이 꾸지람을 했는데도 연호를 고치지 않다가, 650년에 고종의 연호를 갖다 쓰니, 허물을 능히 잘 고쳤다고 할 수 있다"라며 주석을 단 것을 비롯해 사대주의에 찌든 편견도 적잖이 보인다. 또한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 없고, 가야를 제대로 다루지 않았고, 발해의 역사도 애써 외면했다.


고대사를 둘러싼 논쟁을 접할 때마다 삼국이 스스로 편찬한 역사서가 전해지지 않는 것이 늘 안타깝다. 고구려의 유기(留記), 백제의 서기(書記), 신라의 국사(國史) 같은 삼국이 스스로 편찬한 역사서가 전해지지 않는 것은 정말 비극적인 일이다(덧붙여 향가모음집 삼대목(三代目)까지 어디서 뚝 떨어질 수 없을까?^^;). 기껏해야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 목을 매달고 있는 우리 고대사 연구의 현실이 너무 비극적이다(삼국유사라도 없었으면 완전 초상집이었을 것이다). 물론 삼국사기의 존재는 너무나 고마운 일이지만, 삼국사기'만' 존재한다는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다.


4. 한국사의 독자연호3 - 조선시대 그리고 대한민국

조선시대로 오면 고려시대에서 그나마 보이던 이중적인 체제나 실리적 고민은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오로지 사대주의에 올인하며 성리학에 빠져 살았다. 명나라의 제후국으로 굽실거리느라 독자연호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다. 인조 쿠데타로 집권한 서인 정권의 고루한 숭명배금정책으로 비추어볼 때 조선의 사대는 고려의 사대에 비해 훨씬 저속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고종 말기에 비로소 건양(建陽)이라는 독자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이듬해 대한제국을 건립하며 광무(光武), 융희(隆熙)라는 연호를 썼다. 조선시대 전반을 흐르던 사대주의에 대한 반작용인 셈이지만 이미 독자생존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묘청도 지하에서 이런 칭제건원은 원치 않았으리라.


조선 중기 시인인 백호 임제가 숨막히는 사대에 일침을 놓았던 유언은 들을수록 따갑다. "천하의 여러 나라가 제왕을 일컫지 않은 나라가 없었는데 오직 우리나라만은 끝내 제왕을 일컫지 못했으니 이 같이 못난 나라에 태어났다 죽는 것을 애석히 여길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四海諸國 未有不稱帝 獨我邦 終古不能 生於高此陋邦 其死安足惜)"는 사자후가 못내 애처롭다. 또한 병자호란 당시 청 태종이 백마산성을 피해 우회하여 서울로 진격할 만큼 출중한 장수였던 임경업이 "내가 천지 정기를 받아 가지고 났는데 물건이 아니 되고 사내가 되었는데, 요 조그마한 나라에서 나서 기운을 펴보지 못하고 일생을 보내게 되니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라며 개탄한 것도 사대에 찌든 우울한 왕국의 초상이었다.


해방 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단군기원, 즉 단기가 국가의 공용연호로 채택되었다. 이후 1961년 12월 공용연호에 관한 개정법률을 공포하여 연호를 단기에서 서기로 변경하였다. 이전까지는 국내 문서는 단기를, 외교문서 같은 국외용 문서에는 서기연호를 사용했으나 1962년 1월 1일부터는 공식적으로 단기연호 사용이 사라지게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97년 생뚱맞게 김일성이 태어난 1912년을 원년으로 하는 주체(主體)라는 연호를 제정한다. 이는 대놓고 봉건전제국가임을 자인하는 것이다. 주체는커녕 주책 맞을 따름이다.ㅡ.ㅡ;


오늘날 서력기원 연호 사용은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것이다. 다만 일부 국가의 경우 서력기원과 자국의 고유연호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에 눈길이 간다. 과거에는 자주성의 상징으로 독자연호가 제정되었다면, 이제는 특수성의 표현으로 고유연호를 제정해봄직하다. 일본은 일왕의 연호를 아직도 사용하고 있고, 중화민국(타이완)에서는 1912년을 원년으로 하는 민국기원(民國紀元)을 사용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이슬람 국가에서는 622년을 원년으로 하는 헤지라기원(Hegira紀元)이 쓰고 있으며, 태국 같은 불교 국가에서는 부처가 열반한 해를 기준으로 하는 불멸기원(佛滅紀元), 즉 불기를 쓰고 있다. 단기가 부담스러우면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이나 1945년 광복을 기원으로 하는 고유연호를 생각해 봄직하다. 머지않아 통일이 되어 남북이 새로운 연호를 제창하는 것도 참 기분 좋은 상상이다.


5. 세계화시대의 한국사

강만길 교수는 "건망증이 심한 민족일수록 역사 실패를 거듭하기 마련이며 그것을 경계하기 위해 오욕과 고난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강만길, [역사를 위하여](1996), 한길사, 71쪽)"고 했다. 연호로 읽는 한국사도 이래저래 수난과 오욕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의 과거가 보잘것없다고 해서 내팽개칠 수는 없다. 박은식 선생이 [한국통사]의 서언에서 "국학과 국사가 망하지 않는다면 그 나라도 망하지 않는다"고 외쳤던 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전통을 지키는 것은 비싸기 마련이다. 세계의 선진국들이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어떻게 가르치고 전하는지를 보고 배워야 한다. 미국이 200여 년에 불과한 역사를 어떻게 가르치는지만 봐도 부끄럽기 그지없다.


팔은 안으로 굽게 마련이고 자국의 역사를 좀 더 그럴듯하게 기술하고 싶은 욕심은 누구나 있다. 그러나 이웃나라의 역사를 일방적으로 헐뜯고 깎아 내리는 식의 역사 교육은 무례하고 무참하다. 우리의 경우 이웃 강대국들이 먼저 시비를 건다는 점에서 저들의 쩨쩨함만 타박하고 있기에는 너무 위태롭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이나 중국의 동북공정 같은 역사제국주의가 터지자 여기저기서 국사 교육을 강화해야한다며 아우성이다. 역사 분야를 끔찍이도 좋아하는 나이지만 솔직히 말해 국사교육 강화와 역사왜곡 방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차라리 역사전문가, 외교전문가들에 대한 지원을 늘리고 그들의 밥줄을 많이 만들어 보다 적극적인 대응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다만 국사과목이 필요 이상으로 천대를 받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한국사와 세계사가 유기적인 관련을 맺고 교육되지 않는다면 노상 암기과목의 오명을 벗기는 힘들 것이다.


연호를 통해 한국사를 읽으면서 재야사학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었다. 재야사학계의 국수주의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나 이에 대한 과민반응도 지나친 처사다. 이웃나라들이 옹졸한 역사왜곡을 일삼는 것에 비하면 우리 재야사학이 하는 일은 애교 수준이다. 고종석 선생은 "공격적 민족주의에 대한 올바른 처방은 해방적 민족주의가 아니다"고 말한다. "민족주의가 타인에 대한 증오라면, 애국심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므로 "민족주의 없는 애국심"을 바라며 "남을 증오하지 않고도 자신을 존중할 수 있다"고 설파한다(고종석, [책읽기 책일기](문학동네, 1997) 참조). 하지만 해방적 민족주의라고 표현하든 아니든 어떠한 대응이 없다면 우리 역사는 중국과 일본의 입 속으로 들어가고 말 것이다. 국제사회는 비정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국수주의나 민족주의는 아무리 날카롭다고 해도 대부분 중국와 일본의 공세를 방어하는 수준이었다고 본다. 우리가 임진왜란이나 일제의 만행에 분개하는 것은 편협한 민족주의 때문이 아니라 평화와 문명을 짓밟은 것에 대한 정당한 분노일 따름이다.


백범 김구 선생 [나의 소원]에서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이런 문화강국의 이상은 아름답지만 이것 또한 상당 수준의 경제력과 과학기술력을 갖춰야만 가능한 목표일 것이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이 그 진실과는 상관없이 그 나라의 국력이 뒷받침되어 설득력을 얻는 것처럼 말이다. 분명 우리를 둘러싼 현실은 엄혹하다. 호방하게 큰소리도 좀 해보고 싶지만 주변 강대국들은 만만치 않다. 발해와 같은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강대국에 치이면서도 주체성을 가지고 우리의 이익을 최대한 도모하려는 날쌘 자세가 필요하다.


독자연호를 마음껏 쓰지 못하고 중국의 억압에 시달리던 시대는 지났다. 바야흐로 세계화 담론이 요란하지만 진정한 세계화, 진짜 세계시민이란 자기 것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역사상 세계는 어느 하나의 가치와 문화로 통일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저마다의 개성을 죽이지 않고 살려나가는 사회, 서로의 다른 점을 존중하고 내 것을 강제하지 않는 사회, 인간 존엄성을 으뜸으로 하는 사회를 지향해야한다. 이를 위해 무시 못할 국가적 역량과 깊은 문화의 향기로 무장한 나라를 만들도록 노력해야한다. 몇몇 연예인이 이룩한 한류(韓流)에 만족하지 말고 진지하고 그윽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애호하고 알려나가자. 스스로 사랑하는 자만이 남에게 존경을 받는다. 이제 자중자애(自重自愛)하자. - [憂弱]


추신1.
甄萱은 견훤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이도학 교수는 甄萱을 지렁이의 아들로 적고 있는 삼국유사의 출생설화 등을 들어 진훤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도 그에 따르는 편이다. 한편 견자가 성으로 쓰일 적에는 진으로 발음된다고 한다. 甄萱의 앞 자를 성씨로 보느냐, 그냥 이름으로 보느냐에 따라 발음이 달라진다고도 한다. 또한 아들이 아버지의 성을 사용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견씨가 아닌 견훤 자체가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기도 한다. 알쏭달쏭할 뿐이다. 일국의 제왕 이름을 어떻게 읽어야할지 혼란스러워 해야하는 것은 참 부끄러운 일이다.

추신2.
이 글을 다 쓰고 중국 당나라 문학가 한유(韓愈)가 시를 향한 자신의 병적인 몰두를 두고 "유익함도 없는 일에 정신을 낭비하니 슬프다(可憐無益費精神)(정민, [한시미학산책](2004), 솔, 188쪽)"라고 한 것을 떠올렸다.


참고문헌
박성래. 1978. "高麗初의 曆과 年號." 『한국학보』 4권 1호. 135~155
정운용. 1998. "金石文에 보이는 高句麗의 年號." 『한국사학보』 5권. 48~84
"[천자칼럼] 연호." 한국경제신문. 1997. 07. 10.
이덕일. "독자 연호 사용 ‘천하’를 꿈꿨다." 주간 동아. 제251호(2000. 09. 14).
김한종. "고구려의 자주성 내세운 연호." 한겨레신문. 2004. 08. 29.
박성래. "한국사의 年號사용에 대한 오해." 한국경제신문. 2004. 09. 30.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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