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속의 일본어

잡록 2005. 5. 3. 07:47 |
얼마 전에야 쇼부란 단어가 승부(勝負, しょうぶ)의 일본어 발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뭐 일본어의 잔재이겠거니 짐작은 했지만 막상 알고 보니 이물감이 더 커진다. 승부, 흥정, 결판, (뒷)거래 등의 우리말이 즐비한데도 쇼부란 단어가 득세하고 있는 현실이 마뜩잖다. 본래 즐겨 쓰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더욱 멀리해야겠다.


나는 국어 순화에 애를 쓰거나 고운 말, 바른 말에 집착하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국어 순화를 쓸데없는 짓거리라며 백안시할 일도 아니라고 본다. 우리가 모국어를 사랑하고 아끼지 않는다면 누가 거들떠보겠는가. 고종석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어는 내가 자유롭게 다루어 쓸 수 있는 유일한 언어이고,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유일한 언어"이며 한국어와 나와의 인연을 가슴에 사무치게 고마워하고 있다.


일본식 한자말 중에서도 고수부지(高水敷地,しきち)를 둔치, 강턱으로, 노견(路肩,ろかた)을 갓길로, 십팔번(十八番,じゆうはちばん)을 장기, 애창곡으로, 촌지(寸志,すんし)를 돈봉투로, 할증료(割增料,ねりましりよう)를 웃돈, 추가금으로 고치는 등의 노력이 있어왔다. 그러나 각서(覺書,おぼえがきね), 견적(見積,みつもり), 고참(古參,こさん), 납기(納期,のうき), 납득(納得,なつとく), 매립(埋立,うめたて), 사물함(私物函,しぶつかん), 생애(生涯,しようかい), 수순(手順,じゅじゅん), 식상(食傷,しよくよう), 역할(役割,やくわり), 잔고(殘高,ざんだか), 전향적(轉向的,まえきてきむ), 지분(持分,もちふん), 체념(諦念,てりねん), 추월(追越,おいこし), 축제(祝祭,まつり) 같이 이미 너무나 익숙하게 쓰고 있는 단어들을 일일이 손질하는 것은 지나친 강박증이 아닐까 싶다. 기왕이면 우리식 한자말을 찾아 쓰는 것이 좋겠지만 일본식 한자말을 무조건적으로 배격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앞서 말한 일본식 한자말은 주로 와고(和語)를 의미한다. 와고는 한자어도 아니고, 서양 외래어도 아닌 일본 고유의 말이라고 생각되는 단어를 말한다. 한자를 이용해서 일본에서 만들어진 말인 칸고(漢語, 넓은 의미의 중국계 외래어)의 경우는 사실상 논외라고 해야한다. 강의, 건축, 경쟁, 경험, 고전, 공산, 과학, 관념, 교통, 교환, 국제, 권리, 금융, 논리, 대통령, 독점, 명제, 문명, 미술, 민족, 민주, 박사, 법정, 봉건, 분자, 사회, 선거, 예술, 원소, 원칙, 윤리, 의무, 의식, 의지, 의회, 이성, 자료, 자본, 저축, 전통, 정당, 정부, 정치, 종교, 집단, 철학, 추상, 판결, 현실과 같은 어휘들은 중국 고전에서 비슷한 뜻의 어휘를 찾기도 했지만 대부분 한자를 결합해 일본인들 스스로 새로 만들어낸 말들이다. 일본어로 번역된 서구 어휘들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으로 역수출된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한자를 음독하기도 하지만, 훈독하기도 하는 일본어의 특수성에 따라 일본어에서는 훈독을 하지만 한국어는 음독을 하는 와고의 경우는 조금 고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와고식 한자말(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다)"들은 한자를 매개로 삼아 수입되어, 그 한자를 한국음으로 읽는 이상 한국인들에게 그 단어들은 이미 한국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고종석, [감염된 언어](1999), 개마고원, 91~104쪽 참조). 다만 고수부지, 노견, 십팔번 같이 비교적 다른 한국어 어휘를 쓰는 것이 좋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많은 와고식 한자말을 다 제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고참을 선임으로, 백묵을 분필로, 사물함을 개인 보관함으로, 세모(歲暮)를 세밑으로, 망년회를 송년회로, 흑판을 칠판으로 바꾸어 쓰는 등의 노력을 굳이 그만둘 까닭도 없다. 와고식 한자말을 배격하지 않으면서도 대응되는 한국식 한자말이나 토박이말을 찾아 쓰는 것은 우리의 언어생활을 풍요롭게 해줄 것이다.


보다 큰 문제는 순일본말(일본음으로 읽는 말)과 일본식 외래말을 경계하는 것이다. 짬뽕(ちゃんぽん)을 뒤섞음, 초마면으로, 우동(うどん)을 가락국수로, 돈까스(とんかつ)를 돼지고기튀김이나 포크 커틀릿(pork-cutlet)으로 바꾸려는 것처럼 다소 억지스러운 것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쓰지 않아도 될 말을 굳어진 버릇 때문에 못 버리는 실정이다. 일본어와 한국어의 교류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를 통해 반강제적으로 이뤄진 것이 많다. 특히 순일본말과 일본식 외래말은 충분히 고쳐 쓸 명분과 실리가 존재한다. 미싱, 사라, 오뎅, 와사비를 재봉틀, 접시, 생선묵, 고추냉이로 바꿔 쓰는 것이 편협한 민족주의의 발로는 아닐 것이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내 미감을 심하게 거스르는 순일본말과 일본식 외래말 스무 개를 들어보겠다. 유일한 기준은 내 주관적 느낌이지만 비교적 대화 속에서 많이 들었던 말이기도 하다.


가라(から) -> 가짜, 헛것
겐세이(けんせい) -> 견제, 방해, 훼방
기스(きず) -> 흠, 흠집, 생채기, 티
낑깡(きんかん) -> 금귤(金橘), 동귤(童橘)
나가리(ながれ) -> (약속 등이) 깨짐, 허사, 헛일, 무효
노가다(どかた) -> 노동자, 막노동꾼
다라이(たらい) -> 큰 대야, 함지박
뗑깡(てんかん) -> 생떼, 억지, 투정, 행패
똔똔(とんとん) -> 득실 없음, 본전
레자(レザ-, leather) -> 인조가죽
무데뽀(むてっぼう) -> 막무가내, 무턱대고, 무모한
세꼬시(せごし) -> 뼈째썰기
스끼다시(つきだし) -> 기본안주(반찬), 곁들이 안주(반찬), 딸림 반찬, 밑반찬
싸바싸바(さばさば) -> 편법으로, 아첨하여, 대충 넘어가다
앗싸리(あっさり) -> 차라리, 아예, 깨끗하게, 간단히
요지(ようじ) -> 이쑤시개
이빠이(いっぱい), 만땅(まんタン) -> 가득(히), 한껏
찌라시(ちらし) -> 선전지, 광고전단지, 광고 쪽지
쿠사리(くさり) -> 꾸중, 야단, 핀잔, 나무람, 지청구, 구박, 면박
후까시(ふかし) -> 허세, 힘, 티내다/ 부풀머리


여담이지만 선조의 영향인지 나는 고3 수험시절에 틈틈이 한자공부를 해서 한자능력검정 2급 자격증을 딸 정도로 한자를 좋아한다.^^; 한자어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적정 수준의 한자 학습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물론 아무리 한자의 매력에 빠진 나라고 해도 한글 전용의 대원칙은 건드리지 않으며 우리 말글살이가 한글만으로 충분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1997년 유네스코에서 문자로서는 유일하게 한글을 세계 기록 문화유산으로 지정할 정도로 세계적 평가를 받는 한글이 정작 종주국에서는 갖은 생채기를 앓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스스로를 아끼는 자만이 남의 존중을 받는 법이다. 일본어 찌꺼기들과는 쇼부(!)를 보지 말자.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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