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KT 신춘문예에 수필 부문을 응모해 동상을 수상했다. 약 270편의 작품이 응모됐고, 대상 1명, 금/은/동상 각 4명씩 13명에게 수상했으니 대략 20대 1의 경쟁률인 셈이다. 내 졸작이 뽑힌 것은 무안하고 민망한 일이다.^^; 이번 행사를 주관하신 KT 관계자 분들께도 깊은 감사의 말씀드린다.

대상을 받으신 분은 시집도 내신 적이 있는 준 시인이셨고, 수상자 중에는 문학적으로 조예가 깊은 분도 적잖았다. 그런 쟁쟁한 어른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어린 녀석이 도전한 게 기특해서 배려해주신 것이 아닐까 싶다. 특히 주제가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짙은 애정을 드러낸 것이라 표현의 구질구질함도 어여삐 넘어간 것이 아닐까 싶다.

응모작 [황룡사터에 서다]는 지난 설 연휴 때 갔던 경주기행의 감회를 읊은 글로써 익구닷컴에 개재했던 글을 수정해서 올린 것이다. 중학교 논술대회나 백일장 대회에서 상을 받은 이후로 글짓기로는 무척 오랜만에 상을 받아서 감개무량하다. 글쓰기가 사치스러워진 시대에 이번 수상을 계기로 글 읽고 쓰기를 더욱 즐겁게 해봐야겠다. 모든 상은 앞으로 잘하라는 의미가 강하니까.^^

부끄럽지만 글 전문을 싣는다. 인터넷 상에서 보기 좋게 각 문단마다 한 줄씩 띄었다.



 

<황룡사터에 서다>

1.

다시 찾은 서라벌은 싱그러웠다. 경주 시내에 도착해 도로변 여러 왕릉과 탑 등의 유적지들을 스쳐 지나면서 천년 고도로 들어왔음을 실감했다. 긴 설 연휴를 틈타 초등학교 6학년 수학여행 이후 10년만의 경주 방문이었다. 문화유적을 끔찍이도 좋아하는 나이지만 초등학생 때까지 그런 것을 볼 줄 아는 혜안은 없었기에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체 기념사진에서 지루함과 피곤함이 쌓인 어린이의 모습이 그 증거다.

비록 반강제적 성격이기는 하지만 수학여행을 통해 어린이들이 우리 문화유산을 처음 접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체계적인 역사 교육까지는 필요 없지만 적어도 우리 문화유산이 보잘 것 없고 하찮은데다 따분하다는 생각을 심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중등학교 이후에 우리 문화유산을 찾아보는 관심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도 첫 단추를 잘못 꿴 잘못이 크지 않을까 싶다. 유치한 구호이지만 진정한 세계화는 한국적인 것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사랑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문화유산은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보존하는 것도 능력이다. 진정한 문화강국은 잘 만드는 것보다 잘 지켜내는 것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는 형편없는 축에 속한다. 훼손된 문화유산의 목록은 끝도 없지만 그 중에서 많은 이들을 애타게 하는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황룡사다. 황룡사는 4대왕 93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완공된 신라 최대 사찰이다. 동양 최대의 목탑인 9층목탑과 거대한 본존불 금동장륙상 및 성덕대왕신종보다 4배나 큰 황룡사종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238년(고려 고종 25년) 몽골군의 침입으로 불타버리고, 임진왜란 때도 왜놈들이 불타버린 황룡사의 유물들을 파헤쳐 갔다고 한다.

흔히들 우리의 문화유산이 볼품 없고 보잘것없다고 말할 때 나는 주로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는 편이다. 하지만 국권이 미약하여 우리의 문화유산의 수난을 막지 못했던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다. 이구열 선생의 [한국 문화재 수난사](돌베개, 1996)와 같은 문화재 훼손에 대한 기록들이 많이 알려지기를 바란다. 누구나 어려웠던 기억을 되돌리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하지만 구차하고 비루했던 우리 역사와 똑똑히 마주함으로써 현재를 다잡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2.

지금의 황룡사터는 금동장륙상을 올려놓았을 커다란 석조대좌 흔적과 9층목탑을 쌓았던 64개의 초석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잿더미가 되고 약탈도 당했지만 발굴 당시에 많은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경주국립박물관에서 볼 수 있었던 높이 182cm, 최대 폭 105cm인 대형 망새(궁궐, 절 전각의 용마루 양쪽 머리에 얹는 장식 기와)는 황룡사의 규모를 짐작케 해준다. 망새가 클수록 건물도 크게 마련이니 거대한 망새의 존재는 당시의 건물이 얼마나 웅장했는지 즐겁게 상상하게 만든다.

유명한 9층목탑 터에 서면 전율이 돋는다. 600년대에 세워진 높이 80m(225척)의 웅장한 목탑의 위용은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현존하는 목탑 중에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1056년 요나라 때 만들어진 응현5층탑을 능가하는 높이다. 많은 이들이 9층목탑 복원을 소망하는 것도 문헌상의 기록으로만 짐작하는 화려했던 목탑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리라. 너른 목탑 터에서 세계 최고의 목탑을 세운 것에 대한 자부심보다는 지켜내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 더 짙게 드리운다. 거대한 심초석을 어루만지며 어느 소설에 등장하는 세계적 석학 피터 버갓씨의 냉소를 떠올렸다. 그는 한국은 과거의 나라가 아닌 미래의 나라인 듯하다며 이 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빈약한 자연적 문화적 자원을 생각하면, 이 정도의 사회라도 만든 것이 대견하다(고종석, [엘리아의 제야](2003), 문학과 지성사, 89~90쪽)고 말한다. 그의 빈정거림이 따갑다.

우리가 풍요로운 전통문화를 자랑한다고는 하지만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의 문화유산을 보면 주눅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지켜내는 능력이 부족했던 우리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오늘날 우리가 세계에 알려지게 된다면 풍성한 문화유산보다는 첨단 기술력의 덕이 더 클 것이다.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에 세워질 높이 700m가 넘는 버즈 두바이 빌딩을 수주한 우리 기업의 쾌거나 초고속 인터넷망과 우수한 정보통신기술을 통한 IT강국으로서의 면모가 우리를 미래의 나라로 이끌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미래는 과거에 대한 존경과 애정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3.

문득 작년 중국 베이징 여행 때 들렀던 원명원이 생각났다. 본디 이화원을 능가하는 호화로운 이궁(離宮)이었으나 수 차례 외국군의 파괴로 폐허만 남게 되었다. 서양루 유적지를 둘러보니 여기저기 부서진 석재들이 그 자체로 매력이 있었다. 하지만 황룡사터 경우에는 목조 건축이다 보니 주춧돌만 덩그러니 남아 그런 감흥이 일지가 않는다. 남은 잔해가 거의 없으니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내도 제대로 느끼기가 힘든 것은 목조 건축의 치명적 단점인 셈이다. 폐허마저 흥미로운 볼거리였던 원명원은 2008년 올림픽을 대비한 대대적인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많은 외침과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우리의 문화유산은 어느 하나 성한 것이 없다. 목조 건축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적극적인 문화유산 복원(혹은 중건) 작업을 할 필요가 있다. 잘 지켜내지 못한 만큼 다시 세우려는 노력만은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이 마저 소홀히 한다면 볼 것 없는 나라라는 오명을 벗지 못할 것이다. 가능한 많은 문화유산을 복원하는 것은 관광수지 적자에 대처하는 장기적인 투자다. 설령 옛날의 그 솜씨만큼은 못하더라도 복원한 것이 훗날에는 또 하나의 문화유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미래로 치닫는 세상이지만 한편으로는 과거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문화유산은 국가 경쟁력의 중요한 요소로 부상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과감한 투자가 절실하다.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고 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을 보면 너무 빨리 잊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싶다. 전반적인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도 낮고,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도 날로 줄어들고 있다. 이미 수능시험에서 국사가 사회탐구 선택과목의 하나일 뿐이며, 행정고시, 외무고시 1차 시험에서 국사시험이 사라진다. 우리가 스스로 제 나라 역사를 팽개치고 있는 셈이다. 그 사이에 이 작은 나라를 놓고 여기저기 군침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며 망언을 내뱉고, 중국은 고구려사, 발해사를 제 것으로 만들려는 야욕을 실현해나가고 있다. 비극적 현실에 좌절하여 자기혐오에 빠지기보다는 스스로 존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이 난국에 대처할 수 있기를 바란다. 희망은 가난한 자의 빵이니까.

황량한 황룡사터에서 어깨도 쭈욱 펴고 입술도 질끈 깨물어보자. 잃어버린 역사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새로 만들어갈 희망을 노래하기 좋은 곳이다. 9층목탑터에서는 흐뭇한 표정도 지어볼 일이다. 절터에서 맞는 바람이 참 시원하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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