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3학년(1992년) 가을 어느 날 읽었던 정몽주/성삼문 위인전은 내 인생을 크게 바꿨다. 이 얄팍한 책을 읽고 또 읽으며 충의와 절개의 화신인 두 사람의 삶에 흠뻑 빠져버린 나는 이렇게 살아야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이 문고판 책과의 인연을 어찌나 소중히 여겼는지 이 책의 초판 발행일인 9월 10일을 '독서의 날'로 지정하여 기리고 있을 정도다. 내가 책을 본격적으로 좋아하게 된 계기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된 계기도 바로 이 책에서 비롯됐다. 뜬금없이 위인전 타령을 하는 까닭은 얼마 전 다녀온 동구릉(東九陵) 답사에서 어릴 적의 비분강개가 아스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동구릉 중에 태조의 건원릉(健元陵)과 문종의 현릉(顯陵)에서 감회가 남달랐다. 건원릉의 능상을 바라보며 이성계에게서 고려말 모순을 극복한 혁명가를 그려보려 했다. 그러나 오히려 시호조차 못 받고 원통하게 간 우왕과 창왕, 결국 고려의 찬란한 최후를 장식해야했던 공양왕, 그리고 충절의 대명사 정몽주의 넋을 기리고 말았다. 현릉은 더했다. 사육신이 사형 당하면서도 꿈에서 그린 현릉을 보며 나도 모르게 목이 멨다. 속으로 성삼문의 시조인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를 읊으며 안타까워할 정도였으니 어린 시절 읽었던 작은 책이 아직도 내 뇌리를 지배하고 있는지 모른다.^^; 사육신 이개는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우정(禹鼎)같이 무거울 때는 삶도 또한 큰 일이나
홍모(鴻毛)처럼 가벼운 곳에서는 죽음이 도리어 빛나더라
날 밝도록 잠 못 자고 문 밖에 나서니
현릉의 송백이 꿈속에 푸르구나.


禹鼎重時生亦大(우정중시생역대)
鴻毛輕處死有榮(홍모경처사유영)
明發不寐出門去(명발불매출문거)
顯陵松柏夢中靑(현릉송백몽중청)


우정(禹鼎)은 우임금이 만든 아홉 개의 솥(九鼎)으로 나라와 왕권을 상징하며 제대로 된 정사가 펼쳐짐을 의미한다. 강상(綱常)이 무너진 참혹한 시대에는 목숨도 초개같이 버려야 한다는 그 기백이 헌걸차다. 충의지사를 추억하며 논어에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는 구절을 떠올렸다. 어려울 때 그 사람의 됨됨이가 드러난다는 뜻이다. 세상에 버릴 사람은 하나도 없지만 시세의 흐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늦게까지 제 자리를 지키는 한결같은 사람에게 더 애착이 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그 이전에 지성이면 감인(感人)이다. 지극한 정성이 사람의 마음을 바꾼다.


이런 참 선비가 있는가 하면 정반대의 소인배도 있다. 아니 오히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을사오적 중에 한 놈인 이근택은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날 퇴궐하여 집안 사람들에게 이제 죽음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며 득의양양하게 말한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몸종이 "나라가 위태로운데 죽지 아니하고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말하는 너는 참으로 개돼지로다. 내 비록 천인이라 하더라도 어찌 개돼지의 종이 되겠는가"라고 일갈하며 집을 뛰쳐나갔다는 일화가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전해진다. 남 위에 있으려면 그만한 책임감으로 무장해야 하는데 이 도둑놈은 부끄러움조차 없었다.


현릉을 나서며 단종이 스스로 정사를 펼 수 있을 때까지 문종이 살아 있었더라면, 수양대군의 역사가 아닌 단종의 역사가 펼쳐졌다면 하는 부질없는 상상을 해봤다. 하지만 현실의 승자는 계유정난과 사육신 사건에 연루된 부녀들을 나눠 가지며 희희낙락했던 수양과 공신들이었다. 끝내 단종이 수양대군에 의해 살해되고 시신이 강물에 던져졌다. 역적의 시신에 손을 대면 삼족을 멸한다는 위협 때문에 아무도 시신에 손을 대지 못했다. 그런데 영월 호장이라는 미관말직의 엄홍도가 관을 마련하여 선산에 장사 지냈다. 주위에서 만류했으나 이를 뿌리치며 시신을 수습한 그는 "의롭고 착한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하면 나는 달게 받겠다(爲善被禍 吾所甘心)"고 의연히 말한다. 너무 아름다워 몇 번을 되뇌었다.


김남주의 시구처럼 불의와의 싸움에서 정의가 졌다고 해서 정의가 정의 아닌 것은 아니다. 정조대왕은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만들어 단종조의 충신들을 제향하는 것으로 잘못된 역사 바로잡기를 마무리했다(노산군으로 강등되었던 단종은 1698년(숙종 24)에 복위되고 단종이라는 묘호도 이 때에 비로소 추증된다). 정조 15년인 이 때는 계유정난이 발생한 지 338년, 사육신 등의 상왕복위기도사건이 일어난 지 335년, 단종이 비명횡사한지 334년만이다. 그릇된 역사를 다잡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똑똑히 보여주는 사례다. 역사는 결국 올곧게 산 자의 편인지 모르나 이렇게 맨날 뒷북만 쳐서는 안 될 것이다. 신숙주 등 남은 자들의 업적이 클수록 국가권력의 정통성에 목숨을 바쳤던 갸륵한 충절이 더 아쉽다.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사람들은 그리 오래 기억하지 않을지 모른다. 좋은 일을 해도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은 아니냐며 오해를 살지도 모른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느냐이다. "착한 것을 보거든 목마를 때 물 본 듯 주저하지 말라(見善如渴)"는 말처럼 살도록 노력하자. 현실 세계의 승리도 중요하지만 장구한 역사는 지킬 만한 가치를 지킨 사람을 마냥 외면하지 않음을 믿자. 어느 정도 물들고 타협해서 살다가도 마지막에 양보 못할 부분에서는 "No"라고 외치며 돌아설 수 있는 내가 되자. 힘들 때는 맹자의 "스스로 반성해서 정직하다면 천만인이 가로막더라도 나는 갈 것이다(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라는 구절을 주문처럼 외우면서 말이다.


나는 손해보는 장사는 정말 싫어하는 경영학도로서 비용-편익 분석을 꼼꼼히 하며 살 것이다. 그러나 가끔 남 좋은 일 하다가 손해보는 것도 유쾌한 경험으로 간직할 수 있는 넉넉함을 가졌으면 좋겠다. 내가 어쩌다가 좋은 일 하나 해서 그 덕분에 남들이 알콩달콩 재미나게 지내는 모습을 본다면 괜히 침 흘리지 말기를, 하나둘 나란 녀석을 모른 체 해도 잊혀지는 것에 너무 몸서리치지 말기를 다짐한다. 부귀할 때는 따르는 자가 많고, 빈천할 때는 벗조차 떠나가는 것이 세상 인심일지라도 爲善被禍 吾所甘心 여덟 자를 마음 한 구석에 새기고 있다면 외롭지 않으리라.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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