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근무를 시작하며

잡록 2005. 6. 11. 06:09 |
이제 곧 공익근무를 시작하게 된다. 생각보다 날짜가 늦게 나와서 노는 시간이 길어졌지만 어쨌든 내 삶의 전환점으로 삼을만한 변화가 찾아온다. 공익근무를 기다리며 놀았던 반년의 시간동안 딱히 무엇을 시작하지도 못하고 어딘가에 빠져보지도 못한 어정쩡한 시간이었다. 이제 나라의 녹(?)을 먹는 처지가 되어 일감(?)도 생긴 만큼 일도 열심히 하면서 좀 더 새로운 삶의 보람거리를 찾아봐야겠다.


또래친구 중에 빠른 경우는 벌써 제대를 해서 복학생 소리를 듣는 경우도 있다. 그들을 보면 제법 의젓한 풍모가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군대 가서 사람된다는 식의 말은 전혀 믿지 않는다. 다만 군복무를 마치면 여유도 많이 줄고, 마음도 급해지는 모양이다. 이제 제 살 길을 찾아야겠다는 절박한 심정들이 느껴진다. 그것이 정말 성숙해진 증거이든, 국가에 헌납한 시간이 아까워 손실을 메꿔야겠다는 본전의식의 발로이든 보고 배울 점은 많다.


한 학기 휴학을 하면서 이래저래 많은 약속도 잡아보고 생각지도 않게 05학번 후배들도 많이 만났다. 작년까지 학생회 일꾼 생활을 한답시고 정신 뺏겼던 것을 만회하기 위해 더 애썼는지도 모르겠다. 올해 들어 새로 알게된 사람들이 참 많았다. 더욱 친해진 사람도 많아졌다. 진작에 이렇게 교류 나누며 지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후회막심이다. 그리 사교적이지도 않고 무심한 편인 나이지만 모자란 나에게 마음을 열어주고, 시간을 할애해주고, 생각을 나눠준 이들과의 좋은 관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 시작하면 생각보다 그리 늦지 않은 경우가 많으니까.


도무지 바쁘다는 핑계를 댈 수 없는 휴학생인 만큼 내키는 대로 잡히는 대로 책을 봤다. 대학 4년 간 한해에 100권씩 읽어치우겠다는 다짐을 제대로 지킨 적이 없었다. 그것을 만회라도 할 요량으로 책을 달고 지냈다. 차분히 앉아서 독서할 분위기는 아닌지라 내가 빨리 읽을 수 있는 역사와 문화유산 분야 책들 위주로 빨리 읽어내려 갔다. 간만에 독서열에 불타면서 대학 1학년 때부터 이렇게 살았다면 내가 얼마나 달라졌을까 상상해봤다. 그러나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과거였고, 앞으로 공익근무를 하면서도 짬짬이 못다 읽은 책들로 메우면 되리라. 내게 독서는 취미가 아닌 생활의 일부가 되어야 하기에.


공익근무라서 정말 다행인 점은 훈련소 기간을 제외하고는 민간인 신분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정말 할 줄 아는 것도 별로 없고,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는 나이지만 천만다행으로 글 읽고 쓰는 것은 좋아해서 그나마 살아가는 재미에 보태고 있으니 말이다. 무언가 읽고 쓸 수 없는 세상은 나에게 암흑이다. 그 암흑기간이 남들에 비해 현저히 짧다는 것에 감사하며 덤으로 얻은 시간만큼이라도 남들을 위해 쓸 것을 서약한다.


일단은 무탈한 요원 생활이 지상과제지만 적당히 안정이 되면 본격적으로 내 진로에 대해 고심할 생각이다. 천성이 게으르고 아무리 굼뜨다고 해도 대학 4학년씩이나 돼서 번듯한 미래설계도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공익근무 기간을 진로 설정을 위한 숙고의 시간으로 삼은 만큼 머리를 쥐어짜 보겠다. 내 영혼이 기쁨에 겨워 파르르 떨릴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궁리하는 시간이 그간 너무 없었다. 당최 뭐해서 벌어먹고 살지를 좀 정해봐야겠다.


나는 대체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큰 관심이 없다. 내가 꼭 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에도 흥미가 없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만이 내 마음을 잡아끈다. 조금만 지루하거나 힘들어도 '왜 내가 이 일을 해야만 하는가?'는 의문이 솟구치는 일 따위에는 애당초 몰두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완전히 소진되고 나서도 조금 더 소진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주는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 견디면서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일,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2004). 마음산책. 67쪽


"견디면서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일"이라는 표현이 참 와닿는다. 청나라 때 장조(張潮)는 [유몽영(幽夢影)]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꽃에 나비가 없을 수 없고, 산에 샘이 없어서는 안 된다. 돌에는 이끼가 있어야 제격이고, 물에는 물풀이 없을 수 없다. 교목엔 덩굴이 없어서는 안 되고 사람은 벽이 없어서는 안 된다.
(花不可以無蝶 山不可以無泉 石不可以無苔 水不可以無藻 喬木不可以無藤蘿 人不可以無癖)



여기서 벽(癖)이란 어떤 것에 흠뻑 빠진 상태를 말한다. 무상한 인생에 그나마 벽(癖)이 변치 않고 나를 지켜줄 것이다. 不狂不及(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라는 말처럼 미친 듯이 몰두해야 남이 따라오지 못하는 독보적인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어떤 것에 미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마니아적 감수성이 현실과 부딪힐 때 끝까지 자신의 가치를 고수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다. 내 편벽됨이 하필이면 주류의 것이 아니라 비주류나 소수파의 것이라면 또 얼마나 번민해야 할까. 부와 권력과 명예와는 별 상관없는 것을 추구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물론 먹고사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세속적인 꿍꿍이를 외면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것을 하지 않고서는 온몸이 근질거려서 견딜 수 없는, 이것을 미친 듯이 할 때 따르는 아픔과 버림도 이겨낼 수 있을 것과 같은 일이 분명 있을 것이다. 남들 하는 대로 따라하기도 힘든 세상이지만 그렇게 해봤자 내 꿈은 백년하청(百年河淸)일 따름이다. 모든 걸 평균치만 하는 사람은 결국 평균 이하가 된다. 차라리 평균 이하가 몇 개 있더라도 평균 이상이 몇 개 있어서 상쇄시키는 편이 훨씬 낫다. 선택과 집중을 위한 진통이 필요하다.


나는 그다지 변화무쌍한 삶을 원치 않으니 일단 한번 정하면 큰 궤도 수정 없이 밀고 나가길 바란다. 힘들게 결정하고 우직하게 밀어붙이고 싶다. 신중을 거듭하되 너무 지체하지는 말자. 여하간 공익근무를 앞두고 심사가 복잡하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어떻게 뒹굴 거리더라도 최소한의 양심과 이상은 손에서 놓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너무 걱정근심에 휩싸이지 말고 씨익 웃어보자.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는 이럴 때 진가를 발휘해야 한다. 뚜벅뚜벅 신명나게 요원 생활을 시작하자.^^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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