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지향적이라는 말은 대개 부정적 뜻빛깔을 나타낸다. 미래로 치닫기도 바빠 죽겠고, 지금 현재의 행복을 누리기도 정신이 없는데 한가하게 과거 타령한다고 꾸지람을 듣기 일쑤다. 하지만 나는 무척 과거지향적인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다. 역사에 대한 관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 일개인의 역사에도 꽤 의미를 부여하는 편이다. 과거의 잘잘못을 가려보고 취할 것과 버릴 것을 선별해낸다면 지난날을 들쑤시는 작업이 마냥 백해무익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어쩌다가 흐뭇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부끄러운 마음에 후회가 한가득이다. 회상이 시작되기 전에 부디 자족하자고 스스로에게 신신당부를 해봐도 별로 소용이 없다. 이렇게 보면 나란 녀석이 은근히 욕심이 많은 것 같다.^^; 결벽증도 적잖이 있어서 뒷마무리가 깔끔하지 못한 일이 있으면 얼마나 제 자신을 타박하는지 모른다. 게으르고 굼뜨게 사는 주제에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에 몸서리치다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공익근무 시작을 기점으로 내 대학생활 전반기를 마쳤다. 공익근무 기간과 남은 2학기 기간을 대학생활 후반기로 명명(命名)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부쩍 지나간 3년 반의 대학 전반기를 돌아보는 일이 많아졌다. 헛되이 살지 않았다는 확신이 쉽사리 들지 않는다. 훌쩍 지나가 버린 내 대학생활에 대한 회한이 짙게 드리운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 시작하면 생각보다 그리 늦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점이 거의 유일한 위안이다.


[유몽영(幽夢影)]에서 "부끄럽다는 한 글자는 군자를 다스리는 까닭이 된다(恥之一字, 所以治君子)"고 했다. 문제는 한 글자로 그치지 않고 "부끄럽고, 부끄럽고 또 부끄럽고"가 된다는 데 있다. 무언가 동분서주한 느낌은 드는데 딱히 제대로 한 건 없다는 자괴감이 나를 짓누른다. 지나친 위악(僞惡)과 과도한 자기비하는 겸손도 아니고 제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들뿐이지만 한없는 부끄러움을 통해 통절한 반성을 하고 싶다. [중용(中庸)]에서 위로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들을 탓하지 않는다(上不怨天 下不尤人)"는 구절을 꺼내본다. 지난날의 과오들이 죄다 내 탓인 양 가슴이 저린다.


대학생활 후반기를 맞이하면서 "꽤 그럴듯한 자유인"이 되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그 전에는"꽤 그럴듯한 자유주의자"라고 칭했으나 무슨무슨 주의자보다는 그냥 자유인이라는 표현이 좀 더 그윽한 거 같다. 행동상의 제약이 있는 공익근무 생활에다가 진로에 대한 고심으로 뒤척일 4학년 생활 속에서 자유인 운운하는 것이 일견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본디 자유인이라는 것은 끊임없는 긴장과 자기절제, 성장통을 달고 다녀야 하는 것이리라. 어디론가 떠나고 옮겨 다니기보다 내가 맺은 인연 속에서 깨달음을 얻고 보람을 찾아야 한다. 침잠(沈潛)하되 얽매이지 않고, 견결(堅決)하되 열려있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서도.


제 몸뚱아리 건사하며 사는 것조차 만만치 않다. 대충 살기도 힘든 세상에 열심히, 재미나게 살기로 결심한 이상 그에 따르는 고통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최치원이 당나라 유학 시절 남들이 백 번의 노력을 할 때 천 번의 노력을 기울이는 인백기천(人百己千)으로 유명을 떨쳤듯이 나도 인백기천하며 치열하게 살아야겠다. 또 이런 멋들어진 말을 쓰려니 대학 전반기 동안 내가 내뱉었던 번지르르한 구두선(口頭禪)들이 떠오른다. 허영에 들떠 실수한 점도 많지만, 실천이 좀 더뎠다고 해서 살맛나는 세상을 꿈꿨던 풋풋한 이상들을 함부로 박대하지는 말기를.


얼마 전 "역시 고대생은 다르구만!"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낯간지럽기도 했지만 하루 종일 싱글벙글했다. 내 자신이 칭찬 받은 것도 기쁘지만 내가 보고 배우고 느꼈던 곳까지 추켜세워지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나로 인해 내가 딛고 있는 곳, 나와 교류하는 사람들까지 믿을 수 있게 할 수 있다니 개인주의자도 손뼉치며 뿌듯해할 일이다. 지금이야 일신의 영달에 전전긍긍하는 처지지만 내 마음의 고향 고려대학교의 하해와 같은 은덕에 이런 식으로나마 보답할 수 있다면 참 고마운 일이다. 여하간 대학 후반기를 가슴 뛰게 살고 나서 내 유식찬란(有識燦爛)에 놀라고, 인자무적(仁者無敵)을 실감하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본다. 대책 없는 낙관주의는 나의 힘!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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