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일 고종석 팬카페 정모를 안암골에서 가졌다. 구청 사무실에서 있는 내내 일이 손에 안 잡히고, 마냥 안절부절못했다. 간신히 6시까지 버티다가 칼퇴근을 하고 학교로 향했다. 이런 즐거운 모임이 안암골에서 열리다니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때마침 경영C반 개강총회가 있는 날이어서 04학번 후배들 몇 명이랑 인사나 나눌 겸 잠깐 들렀다. 1학기에 비해 많이 조촐해진 2학기 모임들을 보면 늘 아쉽다. 시간이라는 필터링이 얄미울 따름이다. 안 그래도 모임 시간에 늦은 터라 서둘렀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일단 앉으면 여간 일어나기가 힘들다. 급하게 소주 몇 잔을 나눈 뒤 총총걸음으로 길을 나섰다.


길치인 나이지만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살려 약속 장소인 참살이길 끝의 어느 화실을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서두른다고 했지만 9시가 되어서야 도착했다.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 있었고, 많은 분들이 있어서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일단 자리 잡고 앉으니 어찌나 편한지 모르겠다. 고종석 선생님의 전작주의자인 박강님의 화려한 수집담을 듣다 보니 정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고 선생님의 글이 언론매체 등에 나오기 시작한 게 90년대 초반이니 나는 그 때 고작 초등학교 저학년에 불과했으니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세계였다고나 할까. 그래서 박강님의 초청을 받아 전격적으로 박강님네 탐방 혹은 답사를 떠날 참이다.^^


한참 환담을 나누고 있던 차에 테이블 저 쪽에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홍세화 선생님이 떡 하니 자리잡고 계신 것이 아닌가. 고종석 팬클럽 모임이기도 했지만 고 선생님의 지인들도 많이 초청되어 오신 것 같았다. 홍세화 선생님, 황인숙 시인님을 비롯해 방송작가, 시인, 변호사, 치과의사, 기자분까지 사회적 명사들이 줄줄이 포진해 있었다. 이 분들의 실명을 거론하면 이 모임의 위상이 더 오를 것 같다는 세속적 꿍꿍이를 꾹 누르고 말씀을 나눠보지 못한 분들은 그냥 밝히지 않는 것으로 하겠다. 익히 알려진 바대로 홍 선생님이 한겨레 구독신청서를 돌리는 모습이 참 대단하면서도 조금은 안쓰럽기도 했다. 또한 고 선생님의 [자유의 무늬] 99~ 102쪽에 나오는 ‘나’를 베끼는 것을 감시하는 세 사람의 독자 중에 한 분인 "스물일곱 먹은 스웨덴어 학도"분도 참석하셨는데 아쉽게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박강님, lee856님 등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영어공용화가 튀어나왔다. 일동은 과연 저자의 생각은 어떤 것인지 궁금한 마음에 고 선생님의 의견을 청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스포트라이트에 선생님은 적잖이 당황하셨다. 그냥 뭐 영어를 많이 쓰게 되는 것을 억지로 막지도 말자는 거라며 대강 얼버무리시는 것으로 볼 때 술자리는 될 수 있으면 가볍게 즐기자는 주의이신 것 같다. 나는 적극적 영어공용화론자인 복거일 선생님과 함께 엮이는 것이 조금 아쉽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영어로 벌어먹고 사시는 young님이 반대하시고, 한국어로 벌어먹고 사시는 박강님이 찬성하시는 것도 어색한 듯 재미났다.


문득 대학 1학년 교양국어 시간이 떠올랐다. 영어공용화라는 주제를 놓고 복거일 선생님의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를 게거품을 물 듯이 통박했던 기억이 난다. "만일 막 태어난 당신의 자식에게 영어와 한국어 가운데 하나를 모국어로 고를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신은 자식에게 어느 것을 권하겠는가?"라는 식의 거친 사고실험이 영 마뜩잖았던 것이다. 고 선생님은 복 선생님을 자신의 스승이라고 스스럼없이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복 선생님은 네게는 지적으로 할아버지뻘(?) 되는 셈인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아주 인연이 없지는 않았던지 복 선생님의 다음 문구가 내 가슴을 시리게 만든다. 이 문구를 중얼거리며 내 스승의 스승을 찬하는 우스꽝스러움이란.^^;


보다 일반적으로, 지금 우리 사회에서 '대안'이란 말은 너무 가볍게 쓰인다. 현존하는 관행, 질서, 풍습, 규칙, 법, 기구, 공동체 도는 사회에 대한 '대안'을 선뜻 내놓는 사람들은 현존하는 것들이 많은 대안들 가운데서 가장 나은 것들로 판명되어 사회적 진화를 통해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게다가 '대안'이라고 제시된 것들은 거의 모두 이미 오래 전에 시험되어 버려진 것들이다.
- 복거일, [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2005), 삼성경제연구소, 131쪽


이번 모임의 수확 중에 하나가 열린마음님을 뵌 것이다. 열린마음님께서 고종석 팬카페에 가입인사로 올리셨던 글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의 글을 키운 것의 팔할은 고종석이다. 나의 글은 그에 대한 오마쥬에 불과하고 서양철학이 플라톤의 주석에 불과하듯이 나의 글은 그의 글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 이 진심이 뚝뚝 묻어나는 글을 잡아들고 어찌나 흐뭇했는지 모른다. 고종석 선생님은 우리 둘을 보고 경영학도들이 이런 자리에 나타났다며 신기해하셨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쉽사리 말을 못 붙이는 편이라 그리 많은 대화가 오가지는 못했지만 좋은 친구로 지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대개 나랑 비슷한 점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기 힘든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지내는 편이다(하기야 강퍅한 나 같은 녀석을 찾기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다거나, 바라보는 곳이 비슷한 사람과의 교류를 꿈꾸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저 흩어져서 잘 살고 있다가 우연한 기회에 마주치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흙탕물에서 자라되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 같은 사람을 만나는 건 그 얼마나 기쁨인가.


이윽고 저쪽 테이블에 앉아 계시던 고종석 선생님이 이쪽 테이블로 넘어 오셨다. 초면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약간 불콰해진 모습의 고 선생님은 내게 훈련소 생활의 안부를 물어주셨다. 선생님께서 나를 보고 "반듯한 녀석"이라고 칭하신다. 민망한 마음에 손사래를 쳐본다. 저 정말 비실비실하게 살고 있답니라고 항변을 해본다.^^; 선생님은 술자리에서 "술 좀 마시십시다"라는 말을 즐겨 하시는 것 같다. 그러다가 대뜸 "너 같이 부르주아 같은 애가 소수파를 생각할 수 있을까?"라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던지셨다. 순간 부르주아 되기도 어렵지만 프롤레타리아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보다라는 상념이 스쳐갔다.


나는 막연히 내 자신이 프티 부르주아쯤 되겠거니 생각한다. 궁궐건축에는 사찰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화려한 등급의 단청인 금단청을 볼 수 없다고 투덜거리는 것만 봐도 그렇다. 나는 분명 쁘띠(petit)의 원래 뜻대로 귀엽고 아기자기하게 한평생 꾸려나가는 것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하는 소시민이다. 엘리트주의를 적잖이 지지하고, 고아한 것을 좋아하는 귀족적 취향을 숨기지 않는다. 다만 내가 소수파가 되었을 때 느꼈던 불편함과 두려움을 다수파가 되어서도 잃지 않을 수만 있다면, 올챙이적 생각을 해낼 수 있는 양심적 기억력을 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꽤 그럴듯한 자유주의자, 개인주의자가 되기 위한 내 최소한 아니 최대한의 몸부림이기 때문이다.


고 선생님의 [서얼단상]에 보면 "나는 무던히도 전라도 사람이 되려고 애써왔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번 술자리에서도 진정이 물씬 풍기는 농담(?)으로 경상도 사람이 싫다고, 경상도 사투리가 귀에 거슬린다고 솔직히 토로하셨다. 고 선생님 처음 뵈었을 때 내 고향이 대구라는 말을 듣고 놀라셨던 모습이 선하다(난 생후 5개월간 대구 외할머니댁에서 살고 서울로 올라왔지만). 게다가 내가 경영학도라는 사실에 또 다시 놀라셨다. 내가 아무리 날라리 경영학도에다가 무늬만 경상도 사람이라고 강조를 해도, 경상도와 경영학도라는 표지가 짙게 드리워진 모양이다. 여하간 지금까지는 그 사람이 어느 지역 사람인지 거의 완벽할 정도로 신경 쓰지 않고 살았던 거 같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지역보다는 그 사람의 학력이나 학번에 더 신경이 쓰인다. 망국적 지역주의라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것보다는 다른 거대한 장벽이 있는 셈이다. "나는 전라도 사람이고 경상도가 싫어~"라는 도식이 등장하는 것이 고 선생님의 술버릇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만큼 "전라도 사람이기 이전에 개인"이 되기가 참 어려운 세상이다. 이 말을 하신 선생님 본인에게도 무척 힘들 정도니 말이다.


황인숙 시인님이 나를 잊지 않고 "새우씨"라고 정겹게 불러주셔서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른다(내 아이디가 새우범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인님은 시종 분주하게 움직이셨다. 안주가 떨어졌다 싶으면 얼른 채워주시고, 나가서 긴급 공수까지 해오시고 말이다. 그냥 좀 앉아서 쉬라고 여러 번 권해도 이게 내 일이라며 마다하셨다. 왜 그리 일만 하시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압권이었다. "그래야 권태를 이길 수 있거든요"... 권태라는 단어가 자꾸 입안을 맴돌았다. 나는 이런저런 인사말에서 꼭 재미나게 보내라는 말을 한다. 까딱 잘못하면 지루하고 권태로운 삶의 연속이 될 것을 염려해서일 게다. 문학과는 담쌓고 지낸지 오랜지라 살아있는 시인을 만나서도 그리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하다니 참 서글픈 일이다. 얼마 전 시인님의 시집 [자명한 산책]을 급하게 먹는 밥처럼 후닥닥 읽어 치웠지만 결국 체하기만 했다. 나는 너무 비문학적이다.


고 선생님이 저쪽 테이블로 건너가시고 홍세화 선생님께서 이 쪽으로 넘어 오셨다. young님, 열린마음님과 이런저런 말씀을 나누시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어떤 생각이나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게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연거푸 강조하셨다. 숙고하지 않은 맹목적인 믿음이란 얼마나 허망한가. 나란 녀석은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책들을 읽고, 어떤 사색을 하고, 어떤 사건을 겪어서 만들어진 것인지 대답하기가 너무 막막하다. 홍 선생님의 그윽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저 깊이 궁리하고 널리 배우자는 정도의 깨달음 밖에 건지지 못하는 내 자신이 민망할 따름이다. 하긴 그 마저도 실천을 못하고 있으니 더 비극이지만 말이다.^^; 홍 선생님은 와인 두 잔밖에 못하는 데 오늘은 아홉 잔이나 마셨다고 하셨다. 나는 주책 맞게도 주량이 400% 인상되셨다는 어이없는 말을 했다. 푸하하 홍 선생님은 본인이 술은 잘 못 마시지만 술 따라 주는 건 잘 한다며 내 잔을 부지런히 채워주셨다.^^; 그저 망극하고 황송할 따름이다.


고 선생님은 당신의 벗들을 시종일관 "늙은이들"이라고 조금 위악적으로 칭하셨지만, 사실 그렇게만 늙을 수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곱게 늙는 것은 내게 있어 꽤 중차대한 목표 중에 하나이니 말이다. 지금의 벗들이 세월이라는 가랑비에 너무 많이 씻겨 내려가지 말고, 나중에도 이렇게 도란도란 둘러앉아 정담을 나누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흥겹다. 시간이 제법 흘러 하품들도 한번씩하고 얼굴을 비벼 피로를 쫓는 모습들이 보였다. 제법 배반이 낭자하게 즐기긴 한 모양이다. 한바탕 정리를 해서 가실 분들을 보내고, 남은 분들끼리 맥주를 간단히 더 나누다가 새벽 3시가 넘어 모임을 파했다. 원체 무심한 나이지만 술의 힘을 빌리면 조금 다정해지기도 한다. young님께 전화를 넣어 조심해서 잘 들어가시고, 담에 사무실 한번 놀러가겠다고 인사 드렸다. 열린마음님께도 문자를 통해 조만간 다시 뵐 것을 기약했다.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거스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러다가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을 거스르기는 또 얼마나 힘든가"를 생각했다. 하지만 차차 생각하기로 하고 그저 "좋아한다"라는 단어의 청량감을 만끽했다. 택시비가 6000원이 안 나왔다. 학교와 집이 멀지 않다는 행복감까지 밀려왔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오는 길은 이렇게 상쾌하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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