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당쟁에서 배운다

문화 2005. 10. 8. 21:57 |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주최한 ‘좋은 서평이 좋은 책 살린다’ 우수 리뷰 이벤트에 응모한 서평이다. 본래는 조선 당쟁을 주제로 쓰려던 글을 쓰려고 생각하던 참에 이 서평 응모전이 열리기에 책 내용을 추가해서 재구성해봤다. 그렇다 보니 서평이라기보다는 당쟁에 대한 내 생각만 늘어놓은 격이다. 그래도 뭐 덕분에 앓던 이 하나는 뽑았다.^^;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 윤휴의 절규

예송논쟁(禮訟論爭)이 한창일 때 서인의 영수 송시열에 대항했던 남인 논객 윤휴가 억지 죄명을 뒤집어쓰고 사약을 마시기 직전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라고 푸념했다. 그의 외침은 예송논쟁에서 당파간 공존의 틀이 무너진 후에 야기될 극한 대립의 전주곡이었다. 이덕일 교수의 『사도세자의 고백』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얽힌 당쟁의 그늘을 추적해가면서 서로를 타도해야할 대상으로 간주했던 참담함을 돌아보게 한다. 가만히 물어본다. “왕으로 삼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 사도세자의 죽음과 영조 탕평책의 한계

글쓴이는 영조의 두 가지 콤플렉스에 천착한다. 어머니 숙빈 최씨의 신분과 경종독살설에 대한 콤플렉스가 영조를 평생 괴롭혔다는 것이다. 특히 경종독살설은 그의 재위기간 내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이는 효종으로 즉위한 봉림대군이 소현세자의 아들이 이어야 할 자리를 가로챘다는 콤플렉스에 시달린 것도 비슷하다. 세자빈 강씨를 역강(逆姜)이라 칭하며 신원 문제를 시종일관 거부했을 뿐 아니라 강빈의 신원과 소현세자 셋째아들의 석방을 직언한 신하를 죽이기까지 한다. 영조가 이인좌의 난이나 나주 벽서 사건 때 분개한 것도 모두 자신의 즉위 명분과 정통성 문제에서 비롯된다. 노론이 나주 벽서 사건을 소론 전체를 역적으로 몰고자 할 때 영조가 추인하게 되는 것도 영조 즉위과정의 한계인 셈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세자와 영조의 생각이 갈리기 시작한다.


세자는 경종 시절 노론의 왕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은 객관적으로 볼 때 문제가 있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분명 신하가 임금을 택한 ‘택군’이었으며, 당시 그러한 행위는 역적으로 공격받을 소지를 충분히 갖고 있었다. 그러니 수십 년이 지난 이제 와서 복수할 만큼 정당성이 있는 행위는 아니라고 본 것이다. 그간 당론 조제가 임금의 역할임을 기회 있을 때마다 훈계하던 정치적 가르침에 비추어 보아도, 지금의 옥사는 지나친 것으로 보였다.
- 이덕일. 2004. 『사도세자의 고백』. 휴머니스트. 194쪽


영조는 탕평을 통해 포용하려했던 소론을 내치려고 하였으나 세자는 이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수십 년 간 절치부심하며 과거사 재평가 작업을 해온 영조로서는 자신과 다른 생각을 표명하는 세자는 아들이라기보다는 정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청나라에 볼모로 갔다가 귀국한 소현세자 부부를 정적으로 여기고 냉대했던 인조의 좀스러운 증오심이 재연되는 순간이다. 다만 글쓴이가 누차 강조하듯 눈물 많고 정 많은 영조는 아들만 죽음에 몰아넣었을 뿐, 며느리와 손자들까지 죽인 인조의 비정함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말이다.


소현세자의 비극은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유구한 경험을 다시금 선보였다. 사도세자의 비극도 비슷한 면이 많지만 당쟁의 틀에서 좀 더 바라볼 필요가 있다. 세자가 반노론의 입장을 밝혀가며 소론쪽으로 기울자 노론은 자신들의 지위를 사수하기 위해 세자를 향한 공세를 펼치기 시작한다. 노론이 조작한 나경언의 고변까지 터지자 영조는 세자에 대한 적개심을 부당(父黨)과 자당(子黨)이란 표현을 통해 드러낸다. 이제 영조는 아들을 정적을 넘어 역적으로 여기고 결국 뒤주에서 가둬죽인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영조의 탕평정치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영조는 자신의 정통성을 옹위하기 위해 결국 노론 중심의 일당 독재체제를 암묵적으로 승인하게 된다.


사도세자의 비명횡사 이후 세손의 지위도 위태로워졌다. 노론의 견제를 뚫고 등극한 정조는 즉위 일성(一聲)으로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외친다. 뒤주 속에서 비참하게 죽은 아버지에 대한 절절한 추모의 정을 듬뿍 실었을 이 말에 노론 대신들이 얼마나 아연실색했을지 짐작이 간다. 정조는 영조가 못다 이룬 탕평의 꿈을 이루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도 아버지의 원통한 죽음을 갚아 나갔다. 이에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을 지어 친정의 무고함을 항변하려 한다. 이 노회한 정객의 글재간으로 말미암아 사도세자는 실제 이상으로 정신이상자가 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글쓴이는『한중록』의 순수성에 거듭 의문을 제기하며 사도세자의 죽음의 실체를 흥미진진하게 풀어가고 있다. 혜경궁의 눈물이 “진정 애통해야 할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가 아니라 억울한 죽음을 초래한 가해자들을 위해 흘린 것(이덕일. 2004. 『사도세자의 고백』. 휴머니스트. 353쪽)”이기에 동정 받을 수 없다고 일갈할 때 여간 통쾌한 것이 아니다.


『사도세자의 고백』은 글쓴이의 필력에 힘입어 경종, 영조 연간의 당쟁을 실감나게 전해준다. 이 책은 당쟁의 한 사례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당쟁 전반에 대한 문제의식을 확장하는 데 무척 도움이 된다. 또한『한중록』을 비판적으로 독해하며 당쟁의 끔찍함을 반면교사로 삼을 것을 촉구하고 있다. 현종 연간의 예송논쟁과 숙종 연간의 환국 정치, 경종 연간의 신임옥사를 거쳐 가면서 각 붕당들은 자꾸만 피를 부르는 당쟁의 심각성을 깨우쳤어야 한다. 영조와 정조가 탕평책을 앞세워 난국을 타개하려 애썼지만 대다수 사대부들은 편 가르기에만 몰두했을 뿐 화해와 상생을 발휘하지 못했다. 결국 정조의 마지막 노력이 무색하게 붕당정치보다 더한 세도정치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 당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혹자는 사색당파 운운하며 조선 정치의 후진성을 논하는 것은 일제 식민사학의 주장이라며 의분을 터뜨린다. 물론 조선시대의 당쟁이 한국인의 분열적인 민족성에 기인한다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이론은 부적절하다. 당쟁의 부정적인 측면만을 최대한 부각시키고 이를 한국사 전체로 일반화 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 연구는 최대한 그 시대의 과제와 현상을 들여다봐야 한다. 선악의 이분법으로 두부 자르듯이 재단할 수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유교적 문치주의가 당쟁으로 진행된 것에는 명암이 있게 마련이다. 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과거시험으로 관리를 뽑았던 능력 위주의 경쟁이 심하다보면 단결이 잘 안되는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능력 위주의 경쟁 사회에서 단결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로 능력주의 자체를 문제시하기보다는 능력주의야말로 우리가 계승해야 할 정신적 자산이라는 주장은 음미할 만 하다(이성무. 2000. 『조선시대 당쟁사1』. 동방미디어. 21~22쪽 참조). 당쟁 말기로 갈수록 능력주의는 많이 빛을 발하지만 당쟁을 사갈시하는 것보다는 균형적인 관점을 보여준다.

팔은 안으로 굽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조선 당쟁을 칭찬하기에는 꺼림칙한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당쟁에 휘말린 이들이 자당의 이익 수호에만 급급해 균형감각을 상실하고 인간에 대한 예의마저 잃은 경우가 너무나 많았다. 가령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존망의 위기 앞에서도 서로를 비난하느라 바빴던 붕당을 곱게 보기란 힘들다. 사실 임진왜란 때는 모든 당파의 공과가 병존했다. 북인은 김덕령, 곽재우 등 많은 의병장을 배출했고, 남인은 유성룡이 이순실, 권율 등을 중용한 공이 있다. 서인은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했고, 부사 황윤길의 침략 예언 보고를 했다(이덕일. 1997.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22쪽 참조). 그런데도 나 잘났다만 외쳤으니 이 얼마나 밉살맞은가. 점입가경으로 당쟁 말기로 가면 갈수록 원한에 사무쳐 서로를 저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쟁의 여러 긍정적인 기능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사대부들만의 잔치를 벗어나지 못한 것 역시 큰 폐단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예송논쟁이 제 아무리 고상한 철학논쟁이요, 고도의 정치이론이라고 한들 민생과 동떨어진 그들만의 탁상공론 혐의가 짙다. 영조가 노론과 소론 간 공존의 틀을 만들려고 애썼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사대부들만의 정치 독점을 흔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배층의 탕평도 중요하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피지배층의 사회참여를 확대하고 이들을 아우르는 통합의 정치가 절실했다. 정조는 일반 백성들의 민원사항을 수렴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했고, 모든 노비를 해방시키는 정책을 준비했다. 농업 생산력의 발달과 신분제의 변동으로 말미암은 변혁의 욕구에 유연하게 대처하려 했던 정조의 개혁성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정조의 좌절이 더 안타까운 까닭이다.

사림파는 훈구파의 집요한 견제와 숱한 사화를 이겨내고 마침내 사림의 시대를 열었다. 높은 도덕성과 엄밀한 학문성을 자랑하던 사림파는 사소한 일로 분당을 거듭하더니 종국에는 시대변화에 뒤쳐져 사회발전의 걸림돌이 된다. 진보의 표상이 수구의 온상으로 전락하는데 많은 시일이 걸리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피를 뿌렸다.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 눈의 티끌에 성내는 당쟁의 폐해는 김효원과 심의겸의 동서분당 시발점부터 나타났다. 가장 오래 정권을 잡은 서인-노론 계열에 가장 큰 책임을 돌려야겠지만 동인, 서인, 북인, 남인, 노론, 소론할 것 없이 정권을 잡았을 때 반대파를 제거하는 것일 상례였음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 역사의 부끄러운 점을 볼 때는 적잖은 용기가 필요하다.

오늘날 한국 정치도 사림시대의 그늘을 경계해야 한다. 박정희 전대통령은 당파 싸움을 “세계에서도 드물 만큼 소아병적이고 추잡한 것”이라 비판했지만, 그 자신도 정권 연장을 위해 지역감정을 조장하고, 국가보안법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며 사상 공세를 일삼았다. 겉으로는 대의명분과 개혁성을 앞세우면서 독선과 아집, 지역주의, 연고주의, 줄서기에 연연한다면 당쟁의 폐단이 다시 고개를 들 것이다. 특히나 민주화 세력에게 당쟁의 교훈이 필요하다. 사회 각지에 넓어지는 진보의 영역에서 얼마만큼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실현하고 있는지 겸허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사림파는 권력의 달콤함을 맛보면서 훈구파의 과오를 답습하기 시작했다. 세월의 무게는 영원할 것만 같은 것도 녹슬게 만들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도 낯설게 만든다. 개혁의지로 타오를수록 역사를 외경하고, 자신 앞에 솔직할 필요가 있다. 높을수록 낮아지는 정신이 그립다.

비단 조선시대 당쟁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을 향한 아귀다툼은 늘 존재했다. 또한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는 것도 여지없이 증명해보였다. “과거 역사에 대한 판단은 현재의 세계관이 아닌 그 당시의 인식틀과 논리, 그리고 다른 이들의 신앙과 신념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는 다원주의 원칙에 의거해서 내리는 것이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박노자, 허동현. 2003. 『우리 역사의 최전선』. 푸른역사. 200쪽)”라는 박노자의 견해에 동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당쟁에 몸담았던 유학자들 상당수가 너무 편협했다. 그들이 살아온 환경과 시대적 분위기를 십분 감안한다 하더라도 자신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겨서 당론으로 국론을 통일하려 하고, 반대파를 발본색원하려 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불완전한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토론을 나누고, 비판을 가한다. 부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주의주장을 없애는 길은 그 주의주장의 제창자와 추종자를 모조리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 주의주장 자체의 허실을 가리면 그만이다. 아무리 왕조사회의 인식틀과 성리학적 사고방식이 절대적 진리와 집단주의적 사고와 맞닿아 있다고 하더라도 살육으로 점철된 당쟁까지는 이르지 말았어야 했다.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던 것인가.

한국 정치가 당쟁의 병폐를 끊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더군다나 이제 경쟁은 안에서보다 밖에서 더 치열하다. 지연과 학연을 바탕으로 다투던 당쟁의 폐해와는 서둘러 결별해야 한다. 사회 내부의 모순에 허덕이느라 시대 정세를 읽지 못하고 나라를 잃는 수모를 당해야했던 조선의 비운을 되풀이해서는 곤란하다. 이제 예송논쟁 따위나 하며 한가하게 소일할 여유는 그리 많지 않다. 글로벌 경쟁 아래 우리끼리 다퉈서 이기면 세상을 다 차지한 것인 양 좋아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상호공존을 추구하는 국내정치, 평화와 번영을 지향하는 남북관계 조성에 더 이상 사도세자와 같은 희생제의가 필요 없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 칼 포퍼의 세계 3이론을 새기며

박세채는 1683년 탕평론을 제기하면서, 당파에게는 우열론을 써야 하고, 권력을 쥐고 흔드는 간신과 그들에게 붙은 무리에게는 시비론을 써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붕당은 사리와 분별이 있는 사대부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를 따지기보다는 ‘누구는 우수하고 누구는 열등한가’를 가리는 우열론(優劣論)이 적절하다는 것이다(박광용. 1998. 『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149쪽 참조). 조선의 현실에서 주자의 시비분별론(是非分別論)보다는 우열조제론(優劣調劑論)이 단기적으로 불가피하다는 인식에서 나온 고육책이리라.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와 다원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현대사회에서는 우열조제론은 단순히 단기적 처방이 아니라 영구한 대책이 될 공산이 크다.

박세채의 논설도 훌륭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칼 포퍼의 세계 3이론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포퍼는 물질의 세계(세계 1), 주관적 마음(정신, 의식)의 세계(세계 2)와 구별되는 객관적 사상의 세계, 마음의 산물이면서도 그 인식주체와 독립해 존재하는 세계 3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상, 언어, 윤리, 제도, 과학, 예술 등을 설명한다. 세계 3은 그 기원에 있어서는 인공적 산물이지만 일단 그러한 이론이 존재하게 되면 자신의 고유한 생명을 가지며,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귀결을 산출하며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Popper. 1977. 『자아와 두뇌』(The Self and Its Brain) 참조). 이에 따르면 어떤 이론이나 지식을 말하는 사람과 그가 내놓은 이론, 지식은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말에 대한 비판”과 “사람에 대한 비판”을 구분해야한다는 것이다.

세계 3은 인간의 산물들의 세계로서 일단 존재하게 되면 그것을 생산해낸 인간과 분리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세계 3은 세계 2에서 파생되었으되 의도치 않은 논리적 귀결들과 문제, 인식주체를 벗어난 독자적인 발전과 전개들로 구성되는 자율적 영역이라는 것이 포퍼 주장의 핵심이다. 주관적 인식의 세계인 세계 2와 객관적인 인식의 세계인 세계 3의 구별은 획기적이다. 비판과 토론에서 누가 주장했는가보다 어떤 주장을 했느냐에 주안점을 두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인 것이다. 이 전환은 어떤 “사람”과 그 사람의 “주장”을 동일시하지 않는 혜안을 선물해준다. 자신의 그른 점을 지적하는데 자신을 싫어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은 미성숙하다. 건설적인 토론을 인신공격으로 제멋대로 오해하고 물타기를 하는 사람은 비겁하다. 주장 자체의 잘잘못을 가리기보다는 인간 됨됨이를 걸고넘어지는 것은, “사람=그 사람의 말과 글”이라는 등식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는 우를 범하고 만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보면 지식의 생산자를 그 지식과 동일시하여 어떤 사상이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경우, 그 사상의 산출자를 없애버렸다. 이는 정치적 해결은 될 수 있어도 학문적 해결은 될 수 없다. 이러한 방식의 정치적 해결은 항상 폭력을 수반한다. 열린 사회는 이러한 정치적 해결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 신중섭. 1999.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자유기업센터. 114쪽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도입될 때 전세계 천주교 역사에 유례없는 극심한 박해가 자행되었다. 천주교를 공격하는 공서파(攻西派)의 강경 대응 주문에 정조는 정학을 지지하면서도 “사교(邪敎:천주교)는 자기자멸할 것이며 정학(正學:유학)의 진흥에 의해 막을 수 있다”고 탄압에 반대했다. 사상의 자유시장을 옹호한 개명군주 정조의 바람과는 달리 정조 사후 혹독한 탄압이 이어졌다. 그러나 교조화된 성리학의 답답함을 서학으로 풀게 된 이상 수천의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선교사에 의한 전파보다 현지인들의 자발적인 수용이 강한 한국 천주교 보급은 사대부 계급 간 밥그릇 싸움에 신물이 난 백성들의 저항이었다. 홍경래가 최후로 버틴 정주성이 관군에 함락되면서 2983명이 사로잡혔을 때 자행된 사건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열 살 이하의 남자 224명과 여자 842명을 제외한 1917명을 모두 처형한 것은 지역 차별을 반성하지 않고 피로써 잘못을 감추려했던 역사의 비극이다. 어디 그뿐인가. 장보고에게 비수를 꽂는다고 신라 골품제의 비효율성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노비 만적을 강물에 던진다고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육신을 거열형에 처한다고 해서 수양대군의 찬탈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전봉준을 죽여도 사람을 하늘처럼 귀하게 여기라는 가르침이 식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자기의 이론과 더불어 같이 죽지 않게 되었을 때, 인간은 용감하게 새로운 모험을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지적 전통은, 전에는 엄청난 무게를 가지고 방어적 태도로 기존의 교설을 보존하는 데 봉사하였으나, 지금은 탐구적 태도의 뒷전으로 밀려나서 변화를 위한 힘으로 바뀌었다.
- 브라이언 매기. 1998. 『칼 포퍼』. 문학과 지성사. 78쪽

이제 사람을 없애 그 사람의 이론과 사상을 손쉽게 정리하는 야만을 저지르기 힘든 세상이다. 세계 3이론은 그 사람이 내놓은 지식과 인식, 내뱉은 말과 글을 비판함으로써 보다 자유롭고 열린 세상을 만든다. 가수 김민기는 자신의 노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무덤덤한 이유를 “내가 만든 노래지만 이미 내 손을 떠났고, 노래란 향유하는 사람들 나름의 창조를 통해 다시 태어나는 것(정혜신. 2005. 『사람 VS 사람』. 개마고원. 159, 160쪽 참조)”이라고 말했다. 이 말처럼 세계 3 속에서 끊임없이 수정되는 지식들을 모두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에 빠지지 않는 겸손함을 가져야한다. 세계 3이론은 치열하게 토론하고 정직하게 경쟁하되 겸허하게 수용하고 깨끗하게 승복하라는 깨달음을 준다. 사람을 원망하기는 쉽지만 그 사람의 생각을 반박하는 것은 많은 노력이 드는 일이다. 세계 2와 세계 3을 분간함은 건전한 정쟁을 이끌어나가는 원동력이다.


-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관용!

윤휴의 볼멘소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사도세자의 비극은 현재진행형인지 모른다.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를 적대시하는 풍토가 잦아들지 않는 한 이 세상은 성인과 악당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광경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다원주의 사회에서 절대선과 절대악이란 사실상 거의 존재하지 않고, 선악이 복합적으로 존재하기 일쑤다. 『사도세자의 고백』에서 배워야할 것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관용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고 싶은 유혹을 버리기가 마음만큼 녹록지 않을 것이다. 고종석의 다음과 같은 말을 늘 곁에 두자. 버리면 가볍다. - [憂弱]


문화로서의 전체주의를 제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우선 진리의 전유권(專有權)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남들이 진리를 전유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진리에 대한 사랑을 줄이는 것, 열정의 사슬을 자유로써 끊어내고, 광신의 진국에 의심의 물을 마구 타는 것이다. - 고종석. 2002. 『자유의 무늬』. 개마고원. 143쪽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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