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9일 국립중앙박물관을 다녀왔다. 조금이라도 기다리는 시간을 줄이려고 개관 시간 전에 서두른 덕분에 별 무리 없이 입장할 수 있었다. 이번 관람은 사전답사의 성격이 짙어서 동선 파악과 주요거점 확보 등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게 된 후 찾으니 하나하나 그 의미가 각별했다. 적당히 생략하며 넘어갔는데도 둘러보는 데 5시간 정도 걸렸다. 함께 온 답사 동반자는 지치지도 않냐며 성화다. 집에 가서 저녁 무렵에야 피곤함을 좀 느꼈을 뿐 그야말로 박물관을 사뿐사뿐 잘도 걸어다녔다.^^;


국보 83호 금동 반가사유상을 친견한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서투른 사진 실력으로 어렵사리 찍어 온 사진은 당분간 내 컴퓨터 배경화면을 장식할 예정이다. 일본에서 온 고려불화 두 점 앞에서 눈이 떨어져라 황홀경을 만끽했다. 4미터가 넘는 부석사 괘불탱도 장관이다. 백제 금동대향로도 명불허전이었으며 백제 산수문전은 지극히 아름다웠다. 신라 사천왕사 녹유사천왕상의 조각은 어찌나 세련되며, 성덕왕릉 원숭이상은 또 얼마나 정겨운가. 황복사 순금제여래좌상과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 앞에서는 황금빛이 주는 찬란함에 매료되어 떠날 줄을 몰랐다. 고려청자 죽순모양 주전자와 칠보무늬 향로의 미감에 아찔했고, 다시 만난 백자 달항이리도 여전히 정겨웠다. 감은사 석탑 사리장엄구와 고려 청동 11층탑은 금속공예의 백미였다.


대강 훑어봤는데도 진귀한 보물들이 가득했다. 일본, 영국, 프랑스 등지의 유명한 박물관들이 조금 폄하해서 장물 집합소라면 우리네 박물관은 남의 것 약탈한 흔적은 거의 찾을 수 없는 평화와 문화의 이상적인 만남이 아닐까 자화자찬해봤다. 궁궐 답사 등을 통해 목조 건축에만 약간 관심을 가지고 있던 내가 이제는 조각, 공예, 회화, 건축 등 한국 고미술 전반에 대한 애호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음을 실감했다. 예전에는 오로지 글자만 있는 책만을 고집했는데 이제는 멋들어진 화보집, 풍성한 도록에도 열광하고 있다. 결국 관람을 마치고 나오기 전에 들른 문화상품점에서 백제 금동대향로 도록을 지르고 말았다. 다만 무척 비용이 많이 들어서 앞으로도 이 취미를 간직하려면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전의에도 불탄다.^^;


흔히들 친한 사이에는 정치나 종교 문제를 꺼내지 않는 게 좋다고 말한다. 정치나 종교에서의 차이만큼 첨예한 갈등을 유발하는 것도 없기 때문에 이를 염려한 처세책일 것이다. 물론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친밀감을 높이는데 보탬이 될 것이다. 하지만 서로 다르게 살아왔음을 감추는 데는 한계가 있다. 자신만이 옳다고 우기지 않으면서 서로의 다른 모습을 발견하며 배우고 다투는 것이 진정한 우애가 아닐까 싶다. 기실 정치나 종교 문제에 대한 티격태격보다 더 민망한 것은 기호나 취향을 문제 삼는 것이다. 4500만의 기호, 60억의 취향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만의 잣대로 재단하려는 편협함만큼 볼썽사나운 것도 없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Procrustean bed)는 내다버려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극우파 인사들이 빨갱이 사냥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나, 일부 개신교도들이 사탄을 때려잡겠다며 호들갑을 떠는 것을 보고 지인들에게 분노를 토로하는 것이 구박거리는 아니다. 이런 공적 영역에 대한 토론이 활발한 것이 건강한 사회이며, 반대로 사적 영역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한껏 존중해주는 것이 성숙한 사회다. 가령 역사를 좋아하고 문화유산 완상을 즐기는 나는 내 나이 또래에서 문화적 소수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소수파 이전에 한 개인으로서 내 마음이 끌리는 것에 아낌없는 시간과 정성을 쏟을 자유가 있다. 남의 미감이 소중한 만큼 나의 미감도 충분히 존중받겠다는 지극히 세속적인 꿍꿍이다.^^;


좋아하는 선배님 한 분이 자신의 삶을 이루는 세 개의 꼭지점에 대해 쓴 글을 보고 영감을 얻어 나 또한 세 개의 꼭지점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해봤다. 선배님 글의 내용인즉슨 공학적 숫자놀이로 밥벌어먹고, 음악으로 향락하며, 책읽기와 글쓰기 같은 글자놀이를 즐기는 삼각형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선배님의 정리를 빌리자면 工-♪-冊이라는 세 꼭지점이 있는 삼각형을 추구하는 셈이다. 나도 선배님과 비슷한 삼각형을 그려볼 수 있을 것 같다. 경제, 경영 분야로 밥을 벌어먹으면서(과연?^^;) 역사와 문화유산에 끔뻑 넘어가고, 마찬가지로 글 읽고 쓰는 기쁨을 추구할 공산이 크다. 경제, 경영의 經, 문화생활은 돈이 많이 든다는 점에 착안하여 財(문화재의 재字의 의미도 있다), 그리고 텍스트 사랑으로서의 書... 이로써 經-財-書라는 꼭지점을 가진 삼각형이 탄생한다.


인문학적 교양과 사회과학적 전문성간의 균형, 문예적 기질의 원만한 발현,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 input한 양을 넘어서지 않는 output 등등의 대강의 얼개가 나온다. 아무래도 정삼각형이 되기는 글렀고, 이등변삼각형이 될 수도 있고, 한 개의 꼭지점이 끼어들어 사다리꼴이 될 수도 있고, 어쩌다보면 육각형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당장에 經이라는 꼭지점 대신 공무원 철밥통을 끌어안아 볼까 기웃거리는 모양새에서부터 흔들리고 있으니 말이다. 이 경우에 공무원의 公이라고 해야 하나, 철밥통의 鐵이라고 해야할지의 사소한 문제가 남지만.^^; 여하간 아직 나의 진로는 반죽하기에 따라 달라지는 찰흙이며, 어떻게 이어 붙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수수깡과 같다. 안개 속에 헤매는 기분이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니 너무 조바심 낼 필요도 없겠다.


올해 말까지 무료로 개방하는 국립중앙박물관인지라 그 핑계로 몇 번 더 찾아갈 참이다. 바지런히 유물원정대를 꾸려서 출정을 해봐야겠다. 그나저나 유물원정대 일정을 위해 기껏 잡아준 소개팅 날짜도 미뤄버렸다. 한 꼭지점에 충실하다 보니 문화적 소수파를 자초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도 자기 좋아하는 일 하는데 남 눈치까지 볼 만큼 여유는 없다. 내가 흠모하는 고종석 선생님께서 당신의 팬에게 해주신 말씀인 Carpe Diem, 즉 Seize the day를 주문처럼 외워보자.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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