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객원기자(?)로 일하고 있는 경영B반 웹진 2005년 11월 1호에 기고한 원고를 전재합니다. 일전에 익구닷컴에 올린 [조선 당쟁에서 배운다]를 정리해본 글입니다. 익구닷컴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화려한 레이아웃의 향연이 펼쳐집니다.^^;

 

           끝나지 않을 것처럼 무덥던 여름도 어느새 그 자취를 감추고, 이제 북악산도 알록달록한 단풍에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 가을은 또한 가장 책을 읽기 좋은 계절이기도 합니다. 쌀쌀해진 가을바람에 코트 옷깃을 여미며 한권의 책을 넘기는 飛반인의 모습,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멋진 모습이지 않을까요?

 그렇기에 준비했습니다. ‘늦가을, 飛반인의 문화 산책’! 이번 웹진은 飛반인들에게 가장 ‘대학의 지성인’이라는 칭호에 어울리는 인물로 설문조사 된!! 최익구 선배님의 글을 싣는 기회를 가져 보았습니다.

 


 

          이덕일, 1997,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한줄 서평 - 선조부터 정조까지의 조선 당쟁을 깔끔하게 돌아본다>

          이덕일, 2000,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김영사.

          <한줄 서평 - 시대를 역행한 한 정치가에 대한 추상같은 비판이 돋보인다>

          이덕일, 2004, 『사도세자의 고백』, 휴머니스트.

          <한줄 서평 -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보는 영조 탕평책의 한계를 짚어본다>

          이덕일, 2004,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1, 2권) , 김영사.

          <한줄 서평 - 정약용 일가의 이상과 좌절을 통해 정조시대를 추억한다>

 


 

[관용이 흐르는 사상의 자유시장을 꿈꾸며]

- 이덕일 역사서 4종 세트(?)를 통해 조선 당쟁을 헤집다

 

                              역사를 좋아하는 이들은 낙관적인 편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그 숱한 대립과 갈등 속에서도 망하지 않고 꾸준히 이어져왔고, 때때로 후퇴하지만 대개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길게 보고 너그럽게 볼 수 있는 안목이야말로 역사를 읽으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보배이다. 역사를 궁리하면서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나아가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창의적으로 모색할 수 있는 의지를 기를 수 있으리라. 대중적인 역사서를 집필하기로 유명한 역사학자 이덕일의 저서를 통해 조선 당쟁의 진면목을 만나보자. 독선과 오만에 빠진 닫힌 사람들에게서 역설적으로 겸손과 화해 그리고 열린 사회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조선 중기 사림파는 훈구파의 집요한 견제와 숱한 사화를 이겨내고 마침내 사림의 시대를 열었다. 높은 도덕성과 엄밀한 학문성을 자랑하던 사림파는 사소한 일로 분당을 거듭하더니 종국에는 시대변화에 뒤쳐져 사회발전의 걸림돌이 된다. 진보의 표상은 수구의 온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 눈의 티끌에 성내는 당쟁의 폐해는 이조정랑 임명을 둘러싸고 대립한 김효원과 심의겸의 동서분당 시발점부터 나타났다. 인사상의 이견에서 비롯된 사소한 갈등은 내 편이 아니면 죽여야 하는 극한 대치를 낳았다. 동인, 서인, 북인, 남인, 노론, 소론할 것 없이 정권을 잡았을 때                 반대파를 제거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팔은 안으로 굽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조선 당쟁을 칭찬하기에는 꺼림칙한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당쟁에 휘말린 이들이 자당의 이익 수호에만 급급해 균형감각을 상실하고 인간에 대한 예의마저 잃은 경우가 많았다. 가령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존망의 위기 앞에서도 서로를 비난하느라 바빴던 붕당을 곱게 보기란 힘들다. 임진왜란 때는 모든 당파의 공과가 병존했는데도 말이다. 그런데도 나 잘났다만 외쳤으니 이 얼마나 밉 살 맞 은 가. 점입가경으로 당쟁 말기로 가면 갈수록 원한에 사무쳐 서로를 저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당쟁이 끝끝내 사대부들만의 잔치를 벗어나지 못한 것 역시 큰 폐단이었다. 영조가 당파간 공존의 틀을 만들려고 애썼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사대부들만의 정치 독점을 흔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배층의 탕평도 중요하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피지배층의 사회참여를 확대하고 이들을 아우르는 통합의 정치가 절실했다. 농업 생산력의 발달과 신분제의 변동으로 말미암은 변혁의 욕구에 유연하게 대처하려 했던 정조의 좌절이 더 안타까운 까닭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을 향한 아귀다툼은 늘 존재했지만 당쟁에 몸담았던 유학자들 상당수가 너무 편협했다. 물론 역사 연구는 최대한 그 시대의 과제와 현상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온 환경과 시대적 분위기를 십분 감안한다 하더라도 자신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겨서 당론으로 국론을 통일하려 하고, 반대파를 발본색원하려 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불완전한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토론을 나누고, 비판을 가한다.                       부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주의주장을 없애는 길은 그 주의주장의 제창자와 추종자를 모조리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 주의주장 자체의 허실을 가리면 그만이다.               아무리 왕조사회의 인식틀과 성리학적 사고방식이 절대적 진리와 집단주의적 사고와 맞닿아 있다고 하더라도 살육으로 점철하지는 말았어야 했다.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던 것인가.


  정조는 천주교를 공격하는 공서파(攻西派)의 강경 대응 주문에 성리학을 지지하면서도 “정학(正學:성리학)이 밝아진다면 사학(邪學:천주교)는 자기자멸할 것이다”며 탄압에 반대했다. 사상의 자유시장을 옹호한 개명군주 정조의 바람과는 달리 정조 사후 혹독한 박해가 이어졌다. 그러나 교조화된 성리학의 답답함을 서학으로 풀게 된 이상 수천의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현지인들의 자발적인 수용이 강한 한국 천주교 보급은 사대부 계급 간 밥그릇 싸움에 신물이 난 백성들의 저항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홍경래가 최후로 버틴 정주성을 함락시켜 여자와 열 살 이하의 남자를 제외한 1917명을 모두 처형한다고 해서 지역차별의 불씨가 사그라지는 것은 아니다. 장보고에게 비수를 꽂는다고 신라 골품제의 비효율성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노비 만적을 강물에 던진다고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육신을 거열형에 처한다고 해서 수양대군의 찬탈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전봉준을 죽여도 사람을 하늘처럼 귀하게 여기라는 가르침이 식는 것은 아니다.


 

 

 

 

 

 

 

 

 

 


<- 1800년 재위 24년만에 정조가 승하한 창경궁 영춘헌

 

 

오늘날 한국 정치는 사림시대의 그늘을 경계해야 한다. 박정희 전대통령은 당파 싸움을 “세계에서도 드물 만큼 소아병적이고 추잡한 것”이라 비판했다. 하지만 그 자신이 정권 연장을 위해 지역감정을 조장하고, 국가보안법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며 사상 공세를 일삼았다. 겉으로는 대의명분과 개혁성을 앞세우면서 독단아집, 지역주의, 주의, 줄서기에 연연한다면 당쟁의 병폐가 다시 고개를 들 것이다. 특히 개혁 세력에게 당쟁의 교훈이 필요하다. 사림파는 권력의 달콤함을 맛보면서 훈구파의 과오를 답습하기 시작했다. 세월의 무게는 영원할 것만 같은 것도 녹슬게 만들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도 낯설게 만든다. 개혁의지로 타오를수록 역사를 외경하고, 자신 앞에 솔직할 필요가 있다. 높을수록 낮아지는 정신이 그립다.

 


사회 내부의 모순에 허덕이느라 시대 정세를 읽지 못하고 나라를 잃는 수모를 당해야했던 조선의 몰락을 잊어서는 곤란하다. 이제 예송논쟁 따위나 하며 한가하게 소일할 여유는 그리 없다. 더군다나 이제 경쟁은 안에서보다 밖에서 더 치열하다. 우리는 상호공존을 추구하는 정치를 위해 “사람”과 그 사람의 “주장”을 동일시하지 않는 혜안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그른 점을 지적하는데 자신을 싫어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은 미성숙하다. 건설적인 토론을 인신공격으로 오해하고 물타기를 하는 사람은 비겁하다. 사람을 원망하기는 쉽지만 그 사람의 생각을 반박하는 것은 많은 노력이 드는 일이다. 사람 자체를 매장하려 하지말고 그 사람이 내놓은 지식과 인식, 내뱉은 말과 글을 비판해야 한다. 앞으로는 사람을 없애 그 사람의 이론과 사상을 손쉽게 정리하는 야만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치열하게 토론하고 정직하게 경쟁하되 겸허하게 수용하고 깨끗하게 승복하자.


  예송논쟁이 한창일 때 서인의 영수 송시열에 대항했던 남인 논객 윤휴가 억지 죄명을 뒤집어쓰고 사약을 마시기 직전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라고 푸념했다. 상호공존의 틀이 무너졌음을 암시하는 윤휴의 볼멘소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송시열과 같은 독선을 만나는 것도 흔한 일이며, 사도세자의 비극과 정약용 일가의 비운은 현재 진행형인지 모른다.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를 적대시하는 풍토가 잦아들지 않는 한 이 세상은 성인과 악당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광경이 계속될 것이다. 조선 당쟁에서 배워야할 것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관용이다. 선악이 복합적으로 존재하기 일쑤인 다원주의 사회에서 사는 것이 혼란스러울 때, 나와 다른 생각을 만날 때 칼 포퍼의 다음과 같은 말을 꺼내보는 것은 어떨까. - [憂弱]


                                                         I may be wrong and you may be right, and by an effort, we may get nearer to the truth.

(내가 틀릴 수 있고 네가 옳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공동의 노력에 의해서 진리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다).

- K.R. Popper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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