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숭배를 거절하자

문화 2006. 1. 16. 03:54 |
『몸 숭배와 광기』(발트라우트 포슈, 2004, 여성신문사)를 읽고

TV에서 연예인들의 예전 모습을 보면 대개는 우스꽝스럽다며 웃게 만든다. 당시 유행의 첨단이 오늘날에는 촌스러움으로 전락하는 것은 꽤 흔한 일이다. 이처럼 아름다움의 기준은 늘 변해왔다. 그러나 어떤 특정 시점에서 지배적인 아름다움 또한 존재해왔다. 『몸 숭배와 광기』는 아름다움 추구에 대한 역사적 조망과 더불어 외모지상주의에 허우적대는 현대인의 광기를 꼬집는다. 특히 이런 몸 숭배에 좀 더 취약한 여성들의 애환을 많이 나타내려고 하고 있다.


얼마 전 마광수 연세대 국문과 교수가 살빼기와 성형 열풍이라는 주제로 열린 토론 프로그램에서 멋 안내는 것은 게으르다는 주장을 펼쳤다. 마 교수는 “선천적 외모가 주는 자연미보다 ‘인공미’가 더욱 아름답다(마광수, 2005,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 해냄, 172쪽.)”고 주장한다. 그는 인공미 추구의 일환으로서 살빼기와 성형을 긍정적으로 본다. “몸짱ㆍ얼짱 열풍은 정신이 육체를 지배해온 정신우월주의에 대한 반동”이라는 그의 주장은 경청할 만하다. 그러나 “마음을 보고 반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며 외모지상주의를 너무 부추기는 것은 아닌가 우려스럽다.


성형중독 후유증으로 전사회적 충격을 안겨 줬던 선풍기 아줌마의 힘겨운 재활 과정을 지켜보며 아름다움의 문제를 마냥 일개인의 책임영역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외모를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런 노력이 즐거움을 주며 개성을 확장시켜 주는 한(『몸 숭배와 광기』, 33쪽)”에서라면 마 교수의 표현대로 오히려 권장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사회가 외모를 어떻게 평가하느냐(21쪽)”의 관점이 중시되면서 개인의 자유의사보다는 사회적 기준에 도달하기 위한 무한경쟁에 시달려야 한다.


글쓴이는 “육체가 당혹과 부끄러움, 열등감 내지 우월감을 불러일으키는 원천이어서는 안 될 것(270쪽)”이라고 말하지만 다소 이상적이다. 육체든 정신이든 그런 다양한 감정의 원천이 되는 것을 막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인답시고 있는 그대로에 만족하는 것 또한 그리 흡족한 해결책은 아니다. 글쓴이가 아름다워지는 것의 한계선으로 제시한 “내게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된다. 부담을 주어서도 안 된다. 한꺼번에 이루어져서도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이 내 인생을 결정지어서도 안 된다(273쪽)” 또한 원론적인 수준이라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연스러운 육체를 비하하고 인공미에만 탐닉하지 않는 자세를 가지는 것 만한 처방도 쉽게 보이지 않는다. 비록 미적 기준을 강제하는 사회적 측면이 적잖으나 제도 개혁보다는 의식 개혁이 좀 더 근본적일 수밖에 없는 문제인 셈이다.


남성도 외모를 가꾸는 시대라고들 하지만 아름다움의 추구에 있어서 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것은 아무래도 여성이다. “여자는 외모, 남자는 능력”라는 등식이 여전히 극성을 부리고 있다. 여성이 이런 루키즘(lookism)의 광풍에서 벗어나는 길은 여성차별을 넘어서는 개성의 발현이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융(Jung)은 모든 인간은 그 정신 속에 자신과 반대되는 성적 요소, 즉 남성은 아니마(여성적 영혼)를, 그리고 여성은 남성적인 아니무스(남성적 영혼)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융이 말하는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극단적이면서도 서로 조화하고자 한다. 육체는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 있지만, 인간성의 본질은 원래 양성적이라는 것이다. 인격의 성숙을 위해서는 ‘남자’와 ‘여자’라는 사회적 역할에 집착하기보다 내면의 인격을 통합해야 한다는 것이 융의 아니마, 아니무스 이론의 핵심이다. 여성이 남성에게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 시대에 양성성을 갖춘 인간상이 추구된다면 외모에 대한 집착도 상당부분 진정될 것이다.


차이가 차별의 명분이 되는 세상에서는 유럽의 코르셋이나 중국의 전족 같은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게 된다. “고정적이고 획일화된 아름다움”이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괴롭게 만든다.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사회에서 개개인은 좀 더 개성적이고 창의적이며, 무엇보다도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여성과 남성 이전에 궁극적 소수로서의 개인 각자의 다양성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자중자애(自重自愛)라는 말처럼 스스로 무겁게 여기고 사랑하는 자만이 남의 존경과 신뢰를 받게 되어 있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내면적 아름다움을 갖춘 사람이 외면적 아름다움까지 풍긴다면 유쾌한 일이다. 그러나 예쁘다라는 기준을 절대화해서는 안 되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관점으로 묶어두려는 절제가 필요하다. 타인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 아름답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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