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 경영B반 웹진에 객원기자로 들어가 처음 맡은 일감이 열 줄 짜리 연재물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짜임새 있는 연재물을 궁리하다가 한글 자음 ㄱㄴㄷ을 열쇠말(키워드)로 하는 시 감상을 생각해봤다. 고종석 선생님의 『언문세설』 형식을 따왔다.

한국어 자음의 기능부담량이 동일하지 않은지라 어떤 때는 너무 넘쳐서 선택하기 힘들고, 어떤 때는 딱히 마땅한 게 없어 애태웠다. 가까스로 시 선정은 마쳤는데 그간 잊고 있던 주옥 같은 시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왜 진작 이렇게 하지 못했나 서글프다.

나처럼 비문학적(!)인 녀석이 살가운 마음과 아름다운 언어를 헤집을 수 있을지 걱정스럽지만 애를 써보겠다. 2006년 1월부터 2007년 4월까지 틈틈이 연재되다 보니 나도 정리하는 걸 잊고 있었다. 그리 영양가 없는 글이지만 내 머리 아파 낳은 자식을 내칠 수 없는 노릇, 후기를 덧붙여서 소개한다.


『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1)

ㄱ- 고려가요 「가시리」

붙잡아둘 일이지만/ 시틋하면 아니 올세라// 서러운 님 보내옵나니/ 가시자마자 돌아서 오소서


헤르만 헤세의 말대로 사랑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기보다는 고뇌와 인고 속에서 얼마나 강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그만한 대가를 감내하지 않고서는 누릴 수 없는 기쁨이기에. 양주동은 「가시리」를 "동서문학 별장(別章)의 압권"이라고 격찬했지만 가시리는 기교나 표현이 거의 산문에 가깝다. 시가라고 보기에는 너무 푸석푸석한 담박함이 흠이 됨직하다. 어쩌면 절창이라는 찬사는 몇 안 되는 고려가요 가운데 비교우위 정도인지도 모른다. 괜한 험담에도 불구하고 고은의 표현대로 가시리는 "위대하게 단순"하다. 가는 듯 돌아오라는 실낱같은 희망은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는「님의 침묵」의 역설과 만난다. 이처럼 집착을 덜어낸 절제된 미련이야말로 연애하는 이들의 미덕이 되어야 한다. 고종석은 "이 시의 화자가 남자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 이 여리고 애틋한 사랑이 여성만의 전유물은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된다. 내 둘레에 가시리 가락처럼 슬퍼하고 참아내는 남자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후기 - 연재물의 첫 소재였던 가시리는 나름대로 많은 공력이 들어갔다. 일단 현대어 풀이를 어떻게 하는 지도 고민이 많았다. 영감을 얻기 위해 관련 논문까지 뒤적이고 집에 있던 먼지 쌓인 문고판 책도 찾아봤다. 양주동 선생의 저 유명한 가시리 평설은 예스런 말투가 너무 많아 해독이 여의치 않아 크게 보탬이 되지는 않았다. 산출물을 보니 하잘것없지만 창작의 고통은 장단(長短)을 가리지 않는다. 강준만 선생이 『글쓰기의 즐거움』에서 언급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오스카 와일드가 누군가에게 편지를 부치면서 자기 편지가 너무 길어서 미안하다고 썼다고 한다. 시간이 없어서 편지 길이를 짧게 못 만들었다면서...^^;



『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2)

ㄴ- 이형기의 「낙화」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JP님 그간 건강하셨습니까?
저는 「낙화」에서 떠남의 미학을 읽을 때마다 마음 한 구석에서 당신을 생각합니다. 10선 국회의원이 되겠다며 비례대표 1번을 받아들던 당신은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면서도 모른 체했습니다. 미셸 투르니에는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앞모습은 꾸밀 수 있으나 뒷모습은 꾸미기 어렵지요. 화사하고 씩씩한 앞모습보다는 너절하고 쓸쓸한 뒷모습이 그 사람의 참모습에 좀 더 가까울 겁니다. 당신은 뒷모습을 보일 기회를 너무 많이 놓쳤습니다. 메이저 전 영국 총리는 57세의 이른 나이에 정계를 은퇴하며 "떠나야 할 때를 넘겨 머물기보다 남들이 머물라 할 때 떠나겠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일으킨 기업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은퇴한 정문술 전 미래산업회장이라고 왜 괴로움이 없었을까요. 수로부인에게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라"라고 노래했던 삼국유사의 노인은 홀연히 사라졌기에 아름다웠습니다. 아쉬울 때 내려오지 못한 당신을 반면교사로 삼습니다. 저는 있을 때 잘할 게요. 고맙습니다.

* 이형기 시인은 2005년 2월 2일 고대 안암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습니다. 1주기 즈음하여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후기 - 요즘도 낙화가 교과서에 실려 있는지 모르겠다. 중학교 국어시간에 처음 접한 이후 이 시는 내 애송시 가운데 늘 앞자리에 있다. 김종필은 마지막 순간까지 “서산(西山)을 붉게 물들이며 떠나고 싶다”는 노욕에 빠졌지만 그리 아름답지 못한 저녁놀이었다. “나아가지 못할까 걱정하지 말고, 물러나지 못할까 걱정하라(不患其不能進前 而患不能退步)”는 퇴계 선생의 말씀이 사무친다.


『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3)

ㄷ - 김영랑의 「독을 차고」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 않아 너 나마저 가 버리면/ 억만 세대(億萬世代)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虛無)한듸!'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벗과 영랑의 가상대화>
벗: 나도 독을 차보고 싶었지만 부끄럽게도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네.
영랑: 유족함에 개같이 숙이느니 따가운 볕 아래 고개를 들고 싶었어. 천년을 늙어도 가락을 잃지 않는 오동나무처럼, 일생이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말일세.
벗: 날선 모습은 자네답지 않네만 좀 둥글게 둥글게 살수는 없겠나?
영랑: 그렇게 둥글게 살다가 떼굴떼굴 굴러서 나락으로 떨어진 걸 많이 봤지.
벗: 살다보니 세상의 비루함과 인심의 야박함에 절망하는 데 익숙해져버렸네.
영랑: 우리가 자꾸 쓰러지는 것은 꼭 이룰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 헤매고 있는 까닭은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벗: 아등바등해봤자 우리네 삶은 푸른 바다 속의 좁쌀 한 톨(滄海一粟)이지 않은가?
영랑: 그렇기에 풀 한 포기 앞에서 모래 한 알 앞에서도 솔직하게 살려고 하는 것일세. 도무지 대충 살수가 없단 말이지.
벗: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말이 우리를 얼마나 배신했던가.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 같은 친구야!
영랑: 벗이여! 칠흑 속에 지칠 때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쉬어 가세나!


후기 - 사실 이 글은 유치환, 조지훈, 박노해, 백석 시인 등의 시구를 슬쩍슬쩍 차용해 대화문 하나를 만들어냈다. 패러디한 문구를 맞혀보라는 퀴즈를 내볼까 하다가 반응이 시큰둥할 거 같아서 그만 뒀다.^^; 대개 그렇겠지만 나는 벗과 영랑의 심정을 반반씩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고 평소에는 영랑인척 하다가 결정적 순간에는 벗처럼 사는 게 아니라 늘 고민하며 접점을 찾는 거 같다. 이걸 단순히 기회주의적이라든가 이중적이라고 지칭하기보다는 양가적(兩價的)인 캐릭터라고 적당히 둘러대 본다.^^;


『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4)

ㄹ - 김수영,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취해도 쉽게 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우리는/ 오랜만이라며 서로 눈빛을 던지지만/ 어느새 슬그머니 비어버린 자리들을 세며/ 서로들 식어가는 것이 보인다


우리는 종종 왁자지껄한 술자리에서도 로빈슨 크루소가 됩니다. 외로움을 달래려 더 술을 마시는지도 모릅니다. “한 번 마셨다면 응당 삼백 잔은 마셔야 한다”고 이태백이 말했다지만 좋은 술벗이 있다면 석 잔으로도 충분할 겁니다. 논어에서 공자는 술을 마시는 데 한도를 정하지는 않았지만 술에 취해 어지러워지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다(唯酒無量 不及亂)고 했습니다. 유주무량과 불급난 중에 하나는 어떻게 해볼 수 있겠지만 이 둘을 결합시키기란 고연전 지는 것만큼이나 어렵네요.^^; 아주 가끔은 지워진 기억을 더듬어가며 사무치게 부끄러울 때도 있겠지만 대개는 오래도록 도란도란 환담을 나누고 싶습니다. J. 헤이는 “술은 비와 같아 진흙에 내리면 진흙은 더욱 더럽게 되나, 옥토에 내리면 아름답게 하고 꽃피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네 술자리가 구접스러운 세상사 시름을 날릴 수 있는 훈훈한 옥토가 될 수 있기를! 인생은 짧아도 술병 동낼 여유는 늘 있게 마련입니다.^^; 아찔했던 사발식을 추억하며 정철의 장진주사를 읊조립니다. “꽃 꺾어 산(算) 놓고 무진무진(無盡無盡) 먹세그려.”

* 이 시인은 ‘풀’,‘눈’,‘폭포’의 시인 金洙暎(1921~1968)이 아닌 동명이인 金秀映(1967~)입니다.


후기 - 소설가 김연수는 고교시절 참고서에서 봤던 이백의 시 장진주(將進酒)의 첫 구절 “그대 보지 못하는가(君不見)”를 떠올리며 ‘결국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는 것을 뼈아프게 깨달았다고 한다.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황하의 물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흘러서 바다로 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음을/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고대광실의 거울 앞에서 백발 서러워하는 것을/ 아침에 푸른실처럼 검던 머리 저녁에 흰눈처럼 되었음을/ 인생의 뜻을 얻었으면 즐기기를 다할지니/ 금 술잔으로 하여금 공연히 달만 쳐다보게 하지 말라...”라는 구절이 소설가의 마음을 짠하게 했다. 나는 “그대 잊지 않았는가(君未忘)”를 읊조린다. 젊은 날의 높은 꿈을 벌써 잊지는 않았는가를 습관처럼 되뇌고 싶다.


『익구의 얼렁뚱땅 시읽기』(5)

ㅁ - 서정주, 「무등을 보며」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玉)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미당은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다고 말합니다. 물질적인 궁핍은 고매한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가난은 "타고난 살결과 마음씨"를 헝클어 놓습니다. 미당 만한 재능이 없는 범인들은 오랫동안 헐벗고 외로울 겁니다. 더군다나 미당 자신은 "옥돌같이 호젓이 묻"히지 않았습니다. 생명파의 대표주자였던 미당은 손잡지 말아야 할 것에 손을 내밂으로써 스스로의 생명의지가 얼마나 너절한지 보였습니다.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드높인 미당의 친일 행적과 군사 독재에 대한 굴신 앞에 탄식합니다. 그의 삶에서 발견되는 역겨움을 통해 예술적 성취와 인격적 성숙 사이의 불일치를 곱씹어 봅니다. 미당 옹호자들의 흠집 없는 영혼에서 나온 문학만을 허용할 수는 없다는 항변에 동감합니다. 그의 과오는 엄중하지만 끊임없이 밀려오는 사면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습니다. 문학만이라도 진실을 벗했으면 좋으련만 역시 헛된 욕심인가 봅니다. 문학이 딱히 더 절개를 지킬 까닭은 없겠지요.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다(難作人間識字人)"던 매천 황현의 절명시가 새삼 숙연해집니다. 미당이 좀 더 부끄러워했다면 좋았을 것을!

* 시인 나이 스물넷에 이런 투명한 시어를 엮을 수 있다는 것이 부럽다 못해 얄밉네요.^^;


후기 - 미당에 대한 논쟁은 앞으로도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 같다. 작품과 그 작품을 생산한 문인의 실제 삶을 어떻게 연관시키고 분리할 것인가 하는 까다로운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얼마 전 물러난 김진표 전 교육부총리는 외국어고 졸업생이 어문계열로 진학하는 비중이 낮다고 질타했지만 정작 그 자신의 딸이 외고를 나와 비어문계열로 진학한 것으로 밝혀지자 여론이 싸늘했던 것도 이와 유사한 사례다. 물론 사람이 밉다고 그 사람의 주장에 아예 귀를 막는다거나 그 주장이 그르다고 그 사람을 제재하려는 식의 태도는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지식인이나 공직자 같은 인물들은 제 주장과 제 생활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을 더 해야 하는 게 아닐까.

김지하 선생은 “미당이 윤리적으로는 친일하고 친독재하고 살았지만 시 하나는 끝내준다는 등의 무책임한 소리를 해서는 안된다. 미당의 삶이 윤리적으로 하자가 있기 때문에 미학적 관점에서도 시의 감동이 안온다”고 평가했다. 무척 설득력 있는 말이다. 또한 미당의 구차한 행적을 옹호함으로써 한국 현대사에 만연한 변절도 옹호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미당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들에 상당 부분 끌리면서도 미당에게 사면의 유혹을 느끼는 내 자신이 민망하다. 모든 예술작품은 생산자의 손을 떠나면 독자적인 생명력을 지니면서 독자들에게 흡수된다는 논리에 내가 적잖이 동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그의 정치적 너저분함까지도 우리 문학이 품고 가야할 유산인지도 모른다. 미당의 행적을 숨기지 않되 그의 시는 더 많이 읽혀야 하는 것이 아닐까. 가뜩이나 시도 안 읽는 세상에.

이남호 선생은 인간 존재의 복합성을 강조한다. 예술가의 삶의 일부를 전체적인 평가로 평면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술과 예술가의 삶이 분리될 수는 없긴 하지만, 그 연관성을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 문학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섣부른 일반화와 단순화일 것”라는 주장도 경청할 만하다. 여하간 미당은 왜 일평생 부당한 권력을 편들었을까. 그래서 그의 시를 아끼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억지스런 변명을 내어놓게 만들었을까.^^;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지게 마련이다. 그림자만 부각시켜 빛을 꺼트리는 것도 잘하는 일은 아니지만 그림자를 의도적으로 감추는 것도 부질없는 처사다. 이 나라에는 아직도 그림자를 감추려는 시도가 너무 많다. 역사가 두려운 까닭은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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