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봄 대학교 1학년 1학기 국어작문 과제로 제출했던 과제물이다. 예전에 쓴 조악한 글을 만날 때 가슴이 시린 것은 그 당시의 부박함이 아쉬운 것보다 지금도 크게 나아가지 못함을 발견했을 때의 당혹스러움 때문이리라.

쇼펜하우어 지음, 김재혁 옮김.『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 고려대학교출판부, 1997.

[논쟁에서 이기자. 그리고 거기서 배우자]

철학사상보다는 기이한 행동으로 더 잘 알려진 쇼펜하우어는 그의 확고한 인간에 대한 불신(?)을 바탕으로 논쟁에서 이기는 방법을 설파한다. 그는 부단히 논리학과 토론술은 다른 것이라고 말하는데서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논리학은 이성적인 존재의 고독한 사고인 반면, 토론술은 두 이성적인 존재의 상이성에 따라 생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논쟁적 토론술'이라고 명명한 것은 언제나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인간의 태생적인 태도에 대한 학설이라고 목청을 높인다.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어떤 명제의 객관적인 진실성 여부와 논쟁을 통한 그 명제의 타당성 여부는 별개의 문제라고 말한다. 결국 논쟁은 자신의 주장이 정당성의 외관을 획득하기 위한 - 말 그대로의 싸움(爭)이라는 - 것이다. 그 현상의 분석 또한 염세주의자라는 별명에 걸맞게 내리고 있다. 인간의 타고난 허영심, 수다스러움, 부정직함이 합작(?)하여 진실을 좇기보다는 비록 허울뿐일지라도 자신의 승리를 좇게 된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이 책을 일종의 예방주사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논쟁을 할 때 상대방이 써먹을 술책들을 미리 파악하고 그에 대비하라는 뜻이다.


쇼펜하우어가 늘어놓는 38가지 방법들은 어떤 일정한 체계가 갖추어지지 않고 중구난방 식으로 되어있다. (어쩌면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그가 소개한 방법 중에 하나를 이미 독자에게 써먹고 있는지도 모른다.) 토론술의 기초에서 언급된 골격을 빌려 나누어 보려해도 여의치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특히 대사상논증과 대인논증 중에서 대인논증의 비중이 훨씬 커 보이며 쓸모 있어 보이는 요령들도 거의 다 대인논증에 편중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런 나눔이 무색할 정도로 쇼펜하우어는 작정하고 "모로 가도 서울로 가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그는 논리학은 논쟁에서 소용이 없으며, 상대방을 공략하는 각종 부정직한 요령들만이 논쟁에서 승리를 거머쥐게 할 것이라는 신념을 우리에게 펼쳐 보이고 있다.


쇼펜하우어의 요령들을 가만히 따라가다가 혼란에 빠졌다. 수능을 위한 언어영역에서 논리적 사고 영역에서 배웠던 각종 논리적 오류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오류를 발견하고 비판하는 숱한 문제들을 풀던 나로서는 갑자기 그 오류들을 논쟁에서 활용하라는 쇼펜하우어의 논리에 적잖이 헤맸다. 조금만 살펴보면 동음이의어를 활용하라는 요령은 '애매어의 오류'이며, 개별적 경우의 시인을 보편적 진리의 시인으로 간주하라는 요령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범주 혼동의 오류' '군중에 호소하는 오류'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 '의도 확대의 오류' '논점 일탈의 오류' 등을 끊임없이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그는 논리학과는 별개의 문제로서 자신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얼마 전 까지는 그런 오류들을 발견해서 지적하는 것을 업으로 하던 이에게는 분명 산뜻한 충격이었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밤에 난다"라고 헤겔이 말했다. 낮에 세상 속에서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난 뒤 밤이 되어서야 사람은 비로소 지혜를 얻는다는 뜻으로 학문이 현실보다 뒤쳐지는 것에 대한 경계를 말하는 재미난 문구이다. 나의 이런 어지러움에도 헤겔은 이런 처방을 내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 됐든 그는 첫 번째 요령으로 "상대방의 주장은 최대한으로, 자신의 주장은 최소한으로 하라"를 제시한다. 공격할 틈은 많이 만들되 방어할 틈은 최소한으로 하라는 간단하면서도 멋진 요령이다. 그러나 그 역효과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쇼펜하우어가 빠뜨리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너무 그 정도가 지나치면 상대방이나 청중으로부터 '소심하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아무리 자기 논의의 범위를 이리저리 축소시켜서 성을 세워 상대방의 화살을 잘 피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일단 옹졸하다는 인식을 심어주면 이겨도 시원찮게 되고 만다. 설득력은 섬세한 수성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청중들은 때로는 성문을 열고 나가는 박진감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요령들은 마지막에 다다라서는 인신공격과 무례함으로 대응하라는 너스레를 떤다. 병법에도 삼십육계 줄행랑이 있듯이 그도 최후의 궁지에서는 마지막 발악(?)을 주문하고 있는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온다.


쇼펜하우어가 애초에 아주 실용적인 목적에서 이 책을 지었음을 천명했듯이 나도 실생활에서의 논쟁에서 그의 요령들을 검토해 보는 것이 그의 의도에도 맞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그 동안 내가 온라인 상에서 친구와 논쟁을 벌였던 부분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보겠다.


지난 경험들을 돌아보면서 가장 먼저 기억이 나는 것이 있다. 나에 대한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인다는 내용의 글을 쓰다가 인용한 한 문구는 쇼펜하우어도 미소를 지어 보일 만 하다. 그 한마디인즉슨, "The way to be successful is to follow the advice you give to others. - 성공으로 향한 길은 당신이 남들에게 해 주는 바로 그 충고를 자신이 직접 따르는 것이다." 이 한 문구로 말미암아 나의 글의 요지는 "당신의 비판을 수용하겠다. 그러나 나에게 하는 비판을 당신 스스로가 따르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바뀌는 절묘한 반전을 꾀한 것이다. 어쩌면 치졸한 대인논증인 피장파장이라고 폄하할 수 도 있겠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왜 그러면 그것대로 행동하지 않는가?"라고 반문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엄청난 무안을 주며 청중들에게 상대방에 대한 신뢰를 깎아 내리는 작용을 한다. 물론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쇼펜하우어의 요령을 적용해보자면 충분히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겠다고 판단된다.


좀 더 정치 사회적인 문제로 논쟁을 벌였을 때 논쟁은 더욱 격렬했다. 김대중 정권의 실정을 꼬집는 친구의 글이 올라왔다. 그 중에 하나로 새만금 간척 사업을 반대하며 환경을 버리는 그 정책은 비판받아야 한다는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비쳤다. 이에 나는 반론을 제기했다. 환경의 가치를 들먹이지만 전북 도민들의 개발 요구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점잖게 맞받았다. 구체적인 사례로 전북 도민의 절반인 1백만 여명이 사업 추진 지지 서명을 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이미 공사가 절반 이상 진행된 상태에서 공사 중단 운운하는 것은 전북 도민을 우롱하는 처사라고 목청을 높였다. 그러고서 나는 두 가지 비수를 던졌다. 하나는 한나라당을 지지한다는 친구 글의 성격을 이용했다. 쇼펜하우어가 상대방이 인정하는 권위에서 근거를 마련하라는 요령을 제시했듯이, 나도 "한나라당도 새만금 사업에 대해 명백히 반대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친구가 수긍하지는 않았다 치더라도 청중들에게는 분명 많은 효과가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또 하나는 "교실 안의 쓰레기나 잘 처리하자"는 억지였다. 논의와는 별반 관계가 없다고도 할 수 있지만 당장 우리 주위의 형편이나 살피자는 뉘앙스를 풍기면서 친구의 주장에 타격을 가했다. 친구의 매서운 주장에 나의 비수가 어느 정도 잘 꽂혀 들어갔는지 친구의 재반론에서는 오염된 시화호의 사례를 드는 다소 감상적인 접근으로서 새만금 사업에 대한 논의를 접었다.


또한 친구는 교육의 실정을 물고 늘어졌다. 무시험 전형이라는 정책으로 수험생의 혼란과 각종 해악을 끼쳤다며 기세를 올렸다. 나는 사안을 보편적인 쪽으로 끌고 가서 보편적인 것을 공격하는 요령을 사용했다. 제도 몇 개가 바뀌었다고 해서 우리 의식 속의 학벌주의를 몰아내지 못하고 있는 점을 지적하는데 안간힘을 썼다. 우리 스스로가 학벌주의의 철저한 신봉자이면서 교육 문제를 논한다는 것의 태생적 한계를 지적하며 논의의 선을 그었다. 원체 불리한 입장에서의 고육지책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서지 않고 논의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 포문을 열었다. 교육 문제는 입시가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사립학교 개혁법에 대한 한나라당의 미온적 태도를 꼬집었다. 최소한 청중들에게 양비론이라도 심어주기 위한 전략이었다. 실제로 다른 한 친구는 우리 둘의 논쟁을 '그게 그거'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친구의 공들인 주장에 김이 빠지게 하는 다른 친구의 반응이 있었다. "코사인 법칙이나 익혀라" 물론 서로 다 같은 반 친구로서 농담 삼아 던진 말이다. 그런 주장하느라 시간들이지 말고 수학 공식이나 하나 더 외우라는 이런 사소한 핀잔에도 그 친구는 상당한 타격을 입지 않을까 생각된다. 적의 적은 동지라 하더니 그 친구가 어쩌다보니 나를 도운 셈이 된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요령은 나, 상대방, 청중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단순한 청중에서 나아간 '제삼자'의 역할을 살펴보는 것도 유의미한 일이 될 것이다. 제삼자의 지지를 활용하는 것 또한 논쟁에서의 무시 못할 방책이다.


그 후 다른 논쟁에서 나는 쓴잔을 마셔야 했다. 어려운 수능을 성토하는 분위기에 나는 대안 없는 비판에만 몰두하는 것을 문제 삼는 글을 올렸다. 그러자 그 친구는 나를 무섭게 몰아 부쳤다. 대안 없는 것은 오히려 교육당국이라고 지적하면서, 기막힌 한 방을 날려 나를 나가떨어지게 했다. 수시모집 합격생인 나를 수시제도의 수혜자라고 판단하고 수시제도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측면 공격을 한 것이다. 내가 수시제도에 대해 상대적인 침묵을 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그것을 물고 늘어졌고 그 전술은 청중들에게 유효했다. 쇼펜하우어 역시 청중을 어떻게 다루느냐, 청중에게 어떻게 자신이 옳다고 느끼게 만드느냐하는 문제를 중요시했다. 청중이 똑똑하지 못하기 때문에 진실만을 외치기보다는 다양한 편법으로 청중들을 구워삶으라는 그의 제안은 실로 정확했다. 나는 논쟁의 성패는 결국 청중이 가린다는 점을 실감하고 그 논쟁에서 꼬리를 내려야만 했다.


지나간 논쟁들을 살펴보면서 나와 친구 사이에 오갔던 말의 파편 중에서 상당수가 쇼펜하우어의 요령에 부합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온라인 상에서의 논쟁이라서 비교적 차분히 이루어졌고 의미 없는 말로 교란시키거나, 상대방이 화를 내는 부분을 집중 공략하는 등의 요령들은 활용하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무척 재미있고 뜻깊은 작업이었다.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며 논쟁의 장을 펼치지 못하게 하는 시대는 이제 지났다. 그야말로 백화제방백가쟁명(百花齊放百家爭鳴)을 일컫는 시대이다. 그러나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토론에 대한 냉소가 팽배하다. 그 냉소에서 벗어나 자신의 주장에 최선을 다하는 성숙된 토론 문화를 일구어내야 할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예방주사는 잘 맞아야겠지만 거기에 천착해서는 안될 일이다. 논쟁에서 이기는 방법도 중요하지만 논쟁에서 배우는 방법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글에서 든 사례들은 온라인 상의 제 고등학교 커뮤니티에서 저와 제 친구가 올린 글들을 참조했음을 밝힙니다)
Posted by 익구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지나가던행인 2006.02.16 23:26 Address Modify/Delete Reply

    이 38가지 방법을 통해서.."논쟁"에서 이기고 "청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겠지만..

    진정 우리 사회에 필요한 '생산적' 논쟁이 되기는 힘들지 않을까요..ㅎㅎ;;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TV에서 하는 토론을 보면

    항상 그런것 같애서.....ㅋ;

  2. 小鮮 2006.02.18 16:57 Address Modify/Delete Reply

    생산적 논쟁이 생각만큼 재미가 없다는 게 딜레마죠.^^; 일부 정치인들이 그걸 악용해서 선전선동과 헛된 구호로 대중을 현혹하기도 하지만요. 다만 현실정치판이 여론을 마냥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논리의 엄밀함뿐만 아니라 청중에 대한 호소력도 필요하다는 지적을 경청할 만 합니다. 옳은 방안이라고 할지라도 논쟁에서 패배하는 것에 초연할 수 있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